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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 자랑스런 13相臣
2022-09-05 12:20:33 | 조회: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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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 정안공

심덕부 沈德符 (4세조 1328-1401)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 시호는 정안(定安)이다.

고려말에 문하시중(영의정), 조선 초기에 좌정승을 역임함으로써 고려와 조선 두왕조에 걸쳐 이름을 날린 문무를 겸비한 재상이었다.

1380(고려 우왕1) 진포대첩에서 도원수를 맡아 수하의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과 함께 서해를 침략한 왜구 적선 500척을 괴멸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이때 최초로 전쟁에서 화약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나라의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388년 이성계를 도와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위화도회군에 참여하고, 조선개국에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회군공신1등에 책록되고 청성백에 봉해졌다.

한양 천도 결정후에는 경복궁과 종묘 등 수도 한양 건설의 총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서예로도 이름을 날렸는데,특히 행서가 뛰어났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다.

 

영의정 안효공

심온 沈溫(5세조,1375-1418)


자는 중옥(仲玉), 시호는 안효(安孝), 군호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다.

고려말 11세 어린나이에 감시 문과에 급제하여 부친 심덕부와 함께 조선 개국에 적극 참여했다.

개국원년에 병조 의랑으로 관직을 시작, 승승장구하여 1411년 황해도 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414년에 형조호조판서,한성부판윤, 이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소헌왕후의 아버지로서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 즉위를 알리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방문하는 중에 아우 심정이 상왕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판한 것을 빌미로 政敵 박은 등이 역모죄로 모함하여 귀국길에 압송, 사사(賜死) 되었다.

죽기전에 안효공은 억울한 마음을 담아 후손 들에게 반남박씨 집안과는 혼인하지 말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태종 사후 외손자인 문종이 즉위하자 억울한 누명이 밝혀지고 신원(伸寃)되어, '安孝'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13-10번지에 있다.

 

영의정 공숙공

심회 沈澮(6세조,1418-1493)


자는 청보(淸甫), 시호는 공숙 (恭肅)이다.

세종 비 소헌왕후의 동생이었지만 부친 심온의 참화로 어린시절 양부모 밑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부친 사후 33년 만에 신원되자 늦게 벼슬길에 올라 겸손한 자세와 강직한 성품으로 관직에 충실하여 1457(세조3) 40세에 공조판서에 올랐다. 세조의 지극한 신임을 얻어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거쳐 49세에 좌의정을 역임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불굴의 재상으로 명성을 떨쳤다.

관직에 나선지 17년만에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관직생활 중에 양부모 상을 당하자 임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낙향하여 묘소아래 바위굴에서 3년간 시묘(侍墓)를 했다. 상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참여하였고 1491년에는 성종으로부터 궤장(机杖)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경북 선산에는 공숙공의 효행을 칭송하여 시묘암을 지역의 명물로 잘 보존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월용면 영태리에 있다.

 

영의정 충혜공

심연원 沈連源(9세조,1491-1558)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1516(중종11)생원과에 장원급제하고, 1522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하면서 1526년 문과중시 병과에도 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해박한 지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대사성, 한성부판윤,예조판서,우찬성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54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서 해마다 승진하여 좌의정을 거쳐 1551(명종6)에 영의정이 되어 8년동안 조정을 이끌었다.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서 추국에 참여하여 위사공신2등에 책록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중종인종실록 편찬의 책임을 맡았고, 공사에 강직하여 사위에게도 국법을 어긴 것을 엄히 치죄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국토지리에 밝아 지도를 만들어 국방을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으며, 가뭄에 대비하여 수차를 보급하는 등 백성의 어려움을 끔찍하게 챙겼다.

심문으로서는 유일하게 종묘의 명신당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에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좌의정 만취당상공

심통원 沈通源(9세조,1499-1572)


자는 사용(士容),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어려서부터 소문난 천재였으며 1519년 생원시에 13등으로 입격하고,1537년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한 뒤에 문과중시 병과를 다시 급제했다.

1545년 문종이 즉위하자 홍문관 부응교로 등용되어 시강관으로 임금의 학문을 도왔으며, 직제학으로 승진해서는 문장에 능하여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1549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대사헌, 한성부판윤,공조판서,예조판서,좌찬성,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560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심연원 (영의정)과 함께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1564년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경상도관찰사 시절 풍기군수 이황이 요청한

소수서원의 사액(賜額,임금이 현판을 내린)을 성사시켜 조선 최초로 소수서원을 나라에서 공인한 사액서원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1545년에는 沈門 최초의 족보인 '을사보'를 만들어 명문가로서의 청송심씨를 빛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에 있다.

 

좌의정 일송상공

심희수 沈喜壽(11세조,1548-1622)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68(선조1)성균관에 입학,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 (賜暇讀書,국가연구장학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했고, 이어서 대사헌, 형조호조예조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고 양관 대제학을 겸직했다. 이후에 좌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1606년 좌의정에 오르고 1608년 광해군으로 왕권이 교체된 후에는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일송상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관직에 연연치 않고 직언하는 진정한 충신이었다. 이로 인해 임금의 노여움을 사는 일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사필귀정으로 복권되었다. 또한 중국어에 능통하여 국난 때 마다 對明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이여송 장군을 맞았고, 정유재란 때에는 경리(經理) 양호를 설득하였다. 특히 경략사(經略使) 송응창의 접반사로 西道에 머무르면서 그를 설득하여 관서지역의 기민구제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가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일송집'이 있다.

상주 봉암사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89번지에 있고, 고양시 사적37호로 지정되었다.

 

영의정 남파상공

심열 沈悅(12세조,1569~1646)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부친은 심충겸이고, 숙부인 심예겸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쳐 경기도,황해도,경상도,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호조판서를 지냈고 형조판서, 강화부유수, 병조판서를 거쳐 1638년 우의정으로 승진하면서 호조판서를 겸직했다. 1643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곧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관직에 있을때 외교,민생,재정,교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효성있는 정책을 건의하여 朝廷 운영에 기여했으며, 특히 탁지(재정)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문장과 글씨에도 출중했으며 저서로는 南坡相國文集(6), 放逸奏議를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에 있다.

 

좌의정 청원부원공

심기원 沈器遠(13세조,1587~1644)


자는 수지(遂之), 군호는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이다.

1623년 유생신분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고 형조좌랑,사헌부 지평,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으로 승진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도원수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는 4道 都檢察使가 되어 소현세자를 전주로 피란시켜 分朝를 도왔다. 그공을 인정받아 1628년 강화부유수가 되고 전라도 관찰사,한성부판윤을 거쳐 1634년 공조판서로 승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이되어 한양도성 방어의 책임을 맡았고, 이어서 팔도 도원수가 되어 남한산성 방어의 책임까지 맡았다.

병자호란 후에 남한산성수어사,병조판서,우의정을 거쳐 1643년 좌의정이 되고 靑原府院君에 봉해 졌다.

전쟁이 끝나고 심기원 등 反淸세력은 청나라의 계속되는 무리한 요구에 대항하여 나라와 군사연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위해 반청의 외교자세를 선명하게 할 목적으로 인조를 상왕으로 받들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이를 빌미로 김자점 등 親淸세력은 供招(심문 조서)를 조작하여 이들을 역모로 몰아 심기원을 처형했다.

병자호란 이후 첨예해진 친청반청세력 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김자점 일파는 가장 강력한 政敵沈器遠을 제거하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13相臣 중 유일하게 묘소가 없다.

 

영의정 만사상공

심지원 沈之源(13세조,1593-1662)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이다.

1620(광해12)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벼슬을 거부하고 은거했다.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에 등용된후 정언,교리, 응교,집의 등 청요직을 주로 지냈다. 1636(인조14)병자호란 때 노모때문에 미처 어가를 호종치 못해 문외출송 당했으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를 시작으로 대사간,대사성,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효종 즉위 후에도 병조이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아들 심익현이 숙명공주와 혼인하고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을 맡았으며, 총호사가 되어 효종의 국상을 치렀다.

저서로 '만사고'가 있고, 영천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

만사상공 사후에 묘를 파주의 윤관 묘 위에 모셨는데 후손들 사이에 산송이 400여년 간 이어졌다. 얼마전 2005년 양가 합의로 인근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5-1번지에 이장했다. 묘와 신도비가 경기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영의정 지산상공

심수현 沈壽賢(17세조, 1663-1736)


자는 기숙(耆叔), 호는지산( 止山)이다.

1704(숙종30) 늦게 42세에 춘당대문과의 병과로 급제하였다.

1706년 홍문록에 오른뒤에 부수찬,강원도어사, 부교리,지평,헌납을 거쳐 1714년 양양부사로 나갔는데,이때 선정을 베픈 공을 인정받아 충청도관찰사로 승진했다. 이어서 승지,형조참의를 거쳐 강화부유수로 갔다가 경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올랐다. 1724년 영조 즉위 후에도 병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고 1733년 노년(72)에 영의정에 올랐다.

비록 늦게 벼슬길에 올랐지만 내직과 외직을 고루 거치면서 정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고 청렴하게 살아 명재상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강화학파로서 준소(峻少,소론의 일파)의 영수였으며,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쳐 아들 심육, 외손자 홍양호, 고손자 심대윤이 당대의 대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우랑골에 있다.

 

영의정 만포상공

심환지 沈煥之(19세조, 1730-1802)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이다.

1771(영조47) 나이42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뒤늦게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빠르게 승진하면서 정언,교리,대사성 등 주요 언관직을 두루 거쳤다. 당시 義理公議를 중시하는 격렬한 담론을 펼치면서 관직생활에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형조참판에 승진했으나 탄핵되었다가 1793(정조17)에 복권되어 이조참판,양관 제학, 도승지,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795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남인과 소론의 주요 인사들을 앞장서서 징토(懲討)하면서 노론 벽파의 영수가 되었다. 1799년 좌의정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올랐으며,

院相으로서 정국을 주도하는 실권자가 되었다.

보수강경파의 수장으로서 정치적으로 정조와 맞섰지만 물밑에서는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시대를 이끌었다. 특히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으며 유능한 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글씨가 뛰어나 만포체라 했으며, 문집 '만포유고'를 남겼다.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 808-1에 있다.

 

영의정 두실상공

심상규 沈象奎 (20세조,1766-1838)


자는 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89(정조13)춘당대문과의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규장각대교로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아 이름(상규)과 자(치규)를 하사받았다. 순조 즉위 후에 이조참판,형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809년에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2년후에 병조판서가 되어 홍경래의 난을 수습하였다. 이후 광주부유수겸 남한산성수어사를 거쳐 6판서,양관대제학,의정부3정승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34(순조34) 영의정 재직 시에 어린 헌종이 즉위하자 院相이 되어 초기 조정을 이끌었다.

4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하였으며 문장과 글씨, 시문에서도 탁월하여 당대의 대장서가, 대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학문적으로는 북학파로서 이용후생을 주장했고, 정치적으로는 노론 시파의 거두로서 순조시대를 이끌었다. 또한 19세기 한양의 정치,경제,문화의 특권층인 경화사족의 상징적 인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해박한 지식으로 국왕의 정무지침서인 '萬機要覽'을 편찬하였으며, 저서로는 斗室存稿(16)가 있다.

묘소는 북한 지역인 경기도 풍덕군 마륵담리에 있다.

 

영의정 청령공

심순택 沈舜澤(22세조,1824-1906)


자는 치화(穉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850(철종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852년 한림초시에 합격한 후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이후 안변군수,이조참의,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예조형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81년에는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통리기무아문의 사무를 관장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잠시 물러났다가 다음해에 양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1884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갑신정변 후 새로운 민씨정권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빌미로 일제가 조선침략을 위해 강압적인 내정개혁을 요구하자 사직으로 대응했 다. 1896년 아관파천 후에 수립된 새 정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초대 議政 대신에 임명되었다.

1901년 건국공신1등에 책록되어 태극훈장을 수여 받았으며,1904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려 을사5적의 처벌을 주장했다.

1906년 고종황제가 조령을 내려 대한제국 최초의 '공작'작위를 내리고 청령공에 봉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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