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증손 덕부(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청송(靑松)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부 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청기현(靑己縣)인데 신라(新羅) 때 적선(積善)으로 고쳐서 야성군(野城郡 : 현 영덕군)에 속했다가 고려(高麗) 초에 부이현(鳧伊縣)이 되고 운봉(雲鳳)으로 개칭하여 예주(禮州 : 영해)에 속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진보현(眞寶縣)에 합하였고 1419년(世祖 元年)에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 후에 진보와 분리되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靑松)으로 개칭하였으며,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王朝)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일찍이 조선(朝鮮) 개국(開國)을 시작으로 명문벌족(名門伐族)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심씨는 덕부의 아들 7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 가장 화려한 인맥(人脈)을 이루었다. 세종(世宗)의 장인이면서도 상왕(上王)인 태종(太宗)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王命)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溫)은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다섯째 아들이다. 온(溫)의 장녀는 태종의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중전(中殿 : 昭憲王后)이 되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兵權)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온(溫)의 막내 아우인 정이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에게 “내금위(內禁衛)에 군사의 결원이 심해 시위(侍衛)가 허소(虛疎)한 바 어찌 전보(塡補)하지 않는가”하니 강상인이 “군사를 한곳으로 모은다면 어찌 그 다소(多少)를 논 하겠는가” 하였다. 이 말이 상왕의 귀에 들어가 무술옥사(戊戌獄事)가 일어났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박 은(당시 좌의정)이 “심 온(沈 溫)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에서 피체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水原)에서 자진(自盡)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온(溫)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 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溫)의 현손(玄孫) 의(부사맹 의창(義昌)의 아들)와 융( 경력 의검(義儉)의 아들)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하였다. 온(溫)의 아우 종(淙)이 태조의 부마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고, 온(溫)의 둘째 아들 회(澮)는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3대[4세 덕부(德符), 5세 온(溫), 6세 회(澮)] 영상(領相)의 영예를 누렸다. 회(澮)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원(湲 : 내자시 판관(判官) 역임)의 아들 순문(順門)은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어의(御衣)에 대하여 크기를 논(論)한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 「정암연주(靜庵筵奏)」에 의하면 그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죄목으로 화를 입었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두고 대간들이 무척 논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설(一說)에는 순문(順門)이 무척 사랑했던 기생을 연산군이 강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이 같은 관계를 둔 연적(戀敵)에 의한 대립감정이라고 한다. 또 그의 할아버지 회(澮)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연유로 관작(官爵)이 추탈(追奪)되고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고도 한다. 순문의 아들로 명종(明宗) 때 영의정에 올라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던 연원(連源)은 아버지 순문(順門)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형을 당했으므로 일생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항상 왕실의 외척됨을 경계하여 그의 손자 이름들을 모두 겸(謙)자 돌림으로 지었다고 한다. 연원(連源)의 아우 봉원(逢源)은 명종 때 사예(司藝)를 지내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그림 글씨 음률 의술 등에 능통하고 시문(詩文)에도 조예가 깊었다. 심기안정법(心氣安定法)을 터득하여 태화산(太華山) 기슭에서 집을 짓고 살며 자호(自號)를 효창노인(曉窓老人)으로 하여 하얀 수염을 날리며 산수(山水) 틈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도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하며, 동작도 휴식도 조절하였고 마음 쓰는 것도 그 심도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는 듯 하였다. 막내 아우인 통원(通源)은 명종(明宗) 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치사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연원(連源)의 아들 강(鋼)은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버지로 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를 거쳐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권귀 속에서도 가풍을 지켜 신진사류로서 화를 당하려던 박 순(朴 淳)등을 아들 의겸(義謙)과 함께 구하고 권신 이 양(李 樑)을 제거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의겸(義謙)은 서인의 거두로서 선조 때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는 동안 사림(士林)의 명망이 높았으며, 충겸(忠謙)은 임진왜란 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림군(靑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 충겸(忠謙)의 아들 열(悅)은 인조 때 경제에 능한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좌?우의정과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동지돈령부사 봉원(逢源)의 손자 희수(喜壽)는 선조 말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후 권신 이이첨의 전횡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되어,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 시로써 여생을 보냈다. 부사(府使) 종침(宗?)의 손자이자 설의 아들로 효종조(孝宗朝)의 영상이던 지원(之源)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들 익현(益顯)과 함께 필명(筆名)을 떨쳤으며, 지원의 증손 사정(師正)은 산수화(山水畵)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저명했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수현(壽賢 : 응교 유(濡)의 아들)의 아들 육(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던 달원(達源)의 손자 우승(友勝)은 호조참판에 올라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행패를 다스리다가 무고를 당했고, 그 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사후(死後)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흥원(興源)의 손자 우신(友信)은 임진왜란 때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던 기원(器遠)은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나 인조 22년에 회은군(懷恩君) 사건에 연루되어 피화(被禍)되었다.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환지(煥之 : 교리 태현(泰賢)의 손자. 진(鎭)의 아들)도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참판 염조(念祖)의 아들 상규(象奎)는 순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당대의 제 1인자로 손꼽혔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용맹을 떨쳤던 우정(友正)의 아들 현(言見)은 인조 때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을 지내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피난가서 청병(淸兵)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묘(家廟)의 위패(位牌)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疎)를 쓰고 부부가 함께 자결했다. 역사상 이들 부부처럼 태연하고 절도 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 때 부부의 나이가 70세였다. 조카 심동구(沈東龜)가 배를 대놓고 피난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현(言見)은 애써 돌려보내고 조복을 입은 다음 동향사배를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유소(遺疏)를 지었다. <신(臣) 현(言見)은 동향사배하고 남한산성에 계신 주상전하에게 올리옵나이다>로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은 임금에 대한 보은(報恩)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유소(遺疏)를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후 부인 송씨를 돌아보며 “정(情)은 백년을 같이하고 의(義)는 한번 죽음을 같이하니 내가 충신(忠臣)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 하며 함께 죽을 것을 권유하자, 송씨는 “종용당고사(從容堂故事 : 죽음이 주는 생리적 고통이나 정신적 갈등을 무화시킨다는 뜻)을 본받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갑시다” 하고는 목을 매었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 때 한성부판윤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판서를 지낸 경택(敬澤), 형조판서 의면(宜冕), 공조판서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의원(宜元), 고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갖가지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겪었던 순택(舜澤), 예조판서 이택(履澤),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상학(相學)이 유명했으며, 상훈(相熏)은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와 이조판서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을 역임하였고,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훈(熏 : 본명 대섭, 상록수 저자)과 함께 명문 청송심씨를 더욱 빛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송심씨(靑松沈氏)는 남한(南韓)에 총 65,744가구 212,7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