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전래궐의사적(上世傳來闕疑事蹟)
我東沈氏發蹟事實旣無可徵文獻而源流譜靑松沈氏章有曰沈忠高麗官至中尹子公佐(一云賢佐)國子進士子守貞國子進士子洪孚文林郞衛尉寺丞云云源流譜未知誰人所作而亦未知從何溯考也宗人東濟家古牒亦有此三世諱啣而註以高麗時進士賢佐自中原東來云意者此牒亦出自源流譜而傳寫歟窃惟乙巳刱譜時去古未遠家聲蔚暢溯考先蹟何患無源流譜又何無東濟家牒而無此三世起自文林郞公爲鼻祖則其無稽可知而亦不可使後世不知故謹識于此而備後攷
우리나라에는 심(沈)씨의 발상한 사적(發蹟)의 사실을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고 원류보(源流譜)의 청송심씨 장(章)에 이르기를 심충(沈忠)은 고려조에 벼슬이 중윤(中尹)에 이르렀고 그 아들 공좌(公佐 : 또는 현좌(賢佐)라고도 함)는 국자진사(國子進士,國子監:李朝改稱成均館)이며 또 그 아들 수정(守貞)도 국자진사이고 그 아들은 홍부로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라고 운운하였다.그러나 원류보는 누구의 저술이며 또한 무엇을 근거하고 참고하였는지 분명치 않다.
종인(宗人)동제(東濟)의 집 고첩(古牒)에 역시 3세의 휘함(諱啣)이 있으며 고려초에 진사 현좌(賢佐)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가첩 역시 원류보에서 옮겨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을사년 최초로 창보할 때에 상계(上系)가 그리 멀지도 않고 집안에 고관대작이 많이 계시는 처지에 선조의 사적을 고증(考證)함에 있어 어찌 원류보의 참고와 동제(東濟)의 가첩을 참고하지 않았을리 없고 3세의 기록이 전무하여 문림랑공(文林郞公)으로 시조를 삼은 것을 보면 3세의 휘함(諱啣)을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또한 참고로 이에 기록하여 후일에 생각하도록 갖추노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종인 상윤(相允)씨 가승(家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沈忠 高麗所尹 配南陽洪氏 墓中臺山亥龍乾坐 合封
子 公佐(一云 賢佐) 國子進士 配坡平尹氏 墓上同 合封
子 守貞 國子進士 配礪山宋氏 墓上同 合封
子 洪孚 文林郞 配咸安趙氏 墓普光山 合封
子 淵 閤門祗侯 配坡平尹氏 墓南堂山辰坐 上下封
(번역문)
심충은 고려의 소윤이며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묘지는 중대산 해룡의 건좌에 합봉하였다.
자 공좌(일명 현좌) 국자진사이며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곳에 합봉하였다.
자 수정 국자진사이며 배위는 여산송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곳에 합봉하였다.
자 홍부 문림랑이며 배위는 함안조씨이다. 묘소는 보광산에 합봉하였다.
자 연 합문지후이며 배위는 파평진씨이다. 묘소는 남당산 상하분이다.
주)이상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당 각 성의 족보를 상고하였으나 기록된 것을 아직 찾지 못하였고 중대산에는 다른 고총(古塚)을 더 찾을 길이 없다.
관향건치연혁급지방리정(貫鄕建置沿革及地方里程)
東國輿地勝覽①云靑松本高句麗時靑杞縣新羅時改積善縣又改野城縣考慮初爲鳧伊縣又改雲鳳縣成宗改靑鳧縣屬于禮州 太祖三年合爲眞寶 世宗元年以王后之鄕陞爲靑寶郡後析眞寶以松生縣來合仍改靑松郡 世祖陞爲都護府以安德縣來合今庚戌以眞寶郡來合在慶尙北道距京城五百九十里大邱府二百]十里
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청송은 본래 고구려때 청기현(靑杞縣)이었고 신라때는 적선현(積善縣)으로 고쳤으며 또 야성현(野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부이현(鳧伊縣)이라 하였으며 또 운봉현(雲鳳顯)으로 고쳤다가 성종때 청보현(靑寶縣)으로 고쳐 예주(禮州)에 속하게 하였다. 경술년에 진보군(眞寶郡)을 합하였으며 경상북도에 있으니 서울까지 590리 대구까지 210리가 된다.
주)동국여지승람: 성종의 명으로 노사신(盧思愼)등이 편찬한 지리서로 이 책을 중종때 이행(李荇등)이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엮음.전 55권 25책으로 8도의 연혁 풍속 능표 궁궐 관청 학교 산업 성왁 사찰 역원 교량 효자.열녀문 인명 현(縣)의 사적등을 기록한 책
청송읍지 등본(靑松邑誌 謄本)
太祖三年合于眞寶縣 世宗卽位之年以 王后之鄕陞爲靑寶郡後析眞寶松生縣來合因改今名 世祖陞爲都護府以安德縣來屬
태조3년에 진보(眞寶)에 합치고 세종원년에 왕후(王后)의 탄향(誕鄕)이라 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뒤에 진보를 갈라서 송생현(松生顯)에 합치고 청송군이라 고쳤다. 세조가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안덕현(安德縣)에 속하여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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