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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탐구]시조묘소


소재지: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 산 33(보광산)


청송 보광산 시조 산소 사적 

보광산은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동에 있으니 읍내에서 서남쪽으로 5리쯤 되고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강물이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고 술룡신좌이며 묘전에 작은 비석이 있으니 다만 고려조의 문림랑위위시승 심홍부(高麗朝 文林郞衛尉寺丞 沈洪孚)의 묘라 씌여 있다. 물이 흘러나오는 곳에는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모양이 연꽃이 물위로 솟아있는 것 같아 장쾌하고 기묘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세상에 전하여진 말에는 옛날 바위모양이 기이하고 험준하더니 장사지내던 전날 저녁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 산을 치면서 험한 돌을 부수고 옥순(玉筍)이 솟아 나온 것 같으니 완연히 연꽃의 모양이라 고을사람들이 현비암(賢妃巖)이라 하였으니 대개 지가서(地家書)에서 말하는 왕비가 탄생할 경조(慶兆)라는 것이다. 큰 냇물이 외청룡을 따라 현비암을 둘러싸고 서쪽으로 흘러내려 활을 모양을 이루었다.

소헌(昭憲)인순(仁順) 두 왕후가 연달아 중사를 보내어 온 산에 잣나무를 심게 하고 청송부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여 만산이 울창하여졌으며 몇 결의 위토를 장만해 주고 청송부에 병속시켜 호장이 관리하였으며 사시(四時:正朝,寒食,端午,秋夕)에 시향을 봉행케 하였다. 제수는 관청에서 봉행하게 하고 또 공조의 장인 11명을 제물군으로 보낸바 그 뒤 16명을 더 보내어 27명이 되었다. 전후의 규칙조목의 책자와 개량문서를 부(府)의 청사에 보관하여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후손 영상(領相) 수현(壽賢)이 당시 균전사로서 보광국내 토지대장외 전답도 등재하게 하고 호장으로 하여금 수세케 하여 제수에 보태 쓰게 하였다.  15대손 봉휘(鳳輝)가 청송부사로 재임시 전답의 측량을 다시하여 70여복을 더 붙여주고 종인으로서 도내 수령으로 오는 사람에게 권고하여 힘을 합해서 제기를 장만하고 그전에 없었던 향로석을 신설하였다. 봉휘의 자 성희(聖希)가 본도의 도백으로 와서 상석을 개비하고 기사를 찬하였으며 성희의 질(姪) 공저(公著)가 영천군수로 재임시 표석을 고쳐 세웠다.

묘 앞에 만세루가 있으니 제사를 지낼 때 비가 오면 만세루상에서 행사하였으며 본부의 객사 남쪽에 찬경루가 있으니 그 앞에 큰 내가 있어 물이 불어서 건너지 못하게 되면 찬경루상에서 망제(望祭)를 지냈으니 대개 호장의 집이 부내에 있어 제수를 관청으로부터 진봉하기 때문이다.

갑오년 이후로는 토지의 결수를 승총(陞總 : 징세(徵稅)에서 빠진 논밭을 세부(稅簿)에 기록하던 일)하고 호장을 폐하니 몇 백년 동안 행하여오던 봉사절차가 낭패되었다. 종중에서 산유사를 선정하여 부남과 부서종중에서 1년에 1인씩 정하여 수호하고 향사케 하되 향사는 한식과 추석 두 번으로 정하여 종유사가 총관리를 하게 하였다.

전해 내려온 위토는 대전사와 쌍계사 두 절의 중들이 다 판 것을 신축년에 후손 상익(相翊)이 본부의 토지대장을 조사하여 부동면 상의리의 밭 22두 7승 5합지기와 논 44두 1승지기와 대지 5두 4승지기와 현남면 당동리의 밭 34두 4승1합지기와 논 32두 8승 5합지기와 대지 2두 7승 5합지기 도합 170필지를 돌려 받고 대장을 등봉하여 관인을 찍어 종중의 궤속에 보관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잃어버렸다. 종유사 장례경(掌禮卿) 상한(相漢)이 종의에 의하여 소나무등을 벌매하여 토지를 매입해서 더 보태었다. 기미년 산야구분 측량시에 종중공동소유로 연명날인하여 신고하였다. 산야면적은109정 2단 1무 21보(327,651평)이다

 

상세전래궐의사적(上世傳來闕疑事蹟)

我東沈氏發蹟事實旣無可徵文獻而源流譜靑松沈氏章有曰沈忠高麗官至中尹子公佐(一云賢佐)國子進士子守貞國子進士子洪孚文林郞衛尉寺丞云云源流譜未知誰人所作而亦未知從何溯考也宗人東濟家古牒亦有此三世諱啣而註以高麗時進士賢佐自中原東來云意者此牒亦出自源流譜而傳寫歟窃惟乙巳刱譜時去古未遠家聲蔚暢溯考先蹟何患無源流譜又何無東濟家牒而無此三世起自文林郞公爲鼻祖則其無稽可知而亦不可使後世不知故謹識于此而備後攷

우리나라에는 심(沈)씨의 발상한 사적(發蹟)의 사실을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고 원류보(源流譜)의 청송심씨 장(章)에 이르기를 심충(沈忠)은 고려조에 벼슬이 중윤(中尹)에 이르렀고 그 아들 공좌(公佐 : 또는 현좌(賢佐)라고도 함)는 국자진사(國子進士,國子監:李朝改稱成均館)이며 또 그 아들 수정(守貞)도 국자진사이고 그 아들은 홍부로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라고 운운하였다.그러나 원류보는 누구의 저술이며 또한 무엇을 근거하고 참고하였는지 분명치 않다.

종인(宗人)동제(東濟)의 집 고첩(古牒)에 역시 3세의 휘함(諱啣)이 있으며 고려초에 진사 현좌(賢佐)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가첩 역시 원류보에서 옮겨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을사년 최초로 창보할 때에 상계(上系)가 그리 멀지도 않고 집안에 고관대작이 많이 계시는 처지에 선조의 사적을 고증(考證)함에 있어 어찌 원류보의 참고와 동제(東濟)의 가첩을 참고하지 않았을리 없고 3세의 기록이 전무하여 문림랑공(文林郞公)으로 시조를 삼은 것을 보면 3세의 휘함(諱啣)을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또한 참고로 이에 기록하여 후일에 생각하도록 갖추노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종인 상윤(相允)씨 가승(家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沈忠 高麗所尹 配南陽洪氏 墓中臺山亥龍乾坐 合封

   子 公佐(一云 賢佐) 國子進士 配坡平尹氏 墓上同 合封

   子 守貞 國子進士 配礪山宋氏 墓上同 合封

   子 洪孚 文林郞 配咸安趙氏 墓普光山 合封

   子 淵 閤門祗侯 配坡平尹氏 墓南堂山辰坐 上下封

  (번역문)

   심충은 고려의 소윤이며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묘지는 중대산 해룡의 건좌에 합봉하였다.

   자 공좌(일명 현좌) 국자진사이며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곳에 합봉하였다.

   자 수정 국자진사이며 배위는 여산송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곳에 합봉하였다.

   자 홍부 문림랑이며 배위는 함안조씨이다. 묘소는 보광산에 합봉하였다.

   자 연   합문지후이며 배위는 파평진씨이다. 묘소는 남당산 상하분이다.

 

  주)이상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당 각 성의 족보를 상고하였으나 기록된 것을 아직 찾지 못하였고 중대산에는 다른 고총(古塚)을 더 찾을 길이 없다.

 

관향건치연혁급지방리정(貫鄕建置沿革及地方里程)

東國輿地勝覽①云靑松本高句麗時靑杞縣新羅時改積善縣又改野城縣考慮初爲鳧伊縣又改雲鳳縣成宗改靑鳧縣屬于禮州 太祖三年合爲眞寶 世宗元年以王后之鄕陞爲靑寶郡後析眞寶以松生縣來合仍改靑松郡 世祖陞爲都護府以安德縣來合今庚戌以眞寶郡來合在慶尙北道距京城五百九十里大邱府二百]十里

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청송은 본래 고구려때 청기현(靑杞縣)이었고 신라때는 적선현(積善縣)으로 고쳤으며 또 야성현(野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부이현(鳧伊縣)이라 하였으며 또 운봉현(雲鳳顯)으로 고쳤다가 성종때 청보현(靑寶縣)으로 고쳐 예주(禮州)에 속하게 하였다. 경술년에 진보군(眞寶郡)을 합하였으며 경상북도에 있으니 서울까지 590리 대구까지 210리가 된다.

 

주)동국여지승람: 성종의 명으로 노사신(盧思愼)등이 편찬한 지리서로 이 책을 중종때 이행(李荇등)이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엮음.전 55권 25책으로 8도의 연혁 풍속 능표 궁궐 관청 학교 산업 성왁 사찰 역원 교량 효자.열녀문 인명 현(縣)의 사적등을 기록한 책

 

청송읍지 등본(靑松邑誌 謄本)

太祖三年合于眞寶縣 世宗卽位之年以 王后之鄕陞爲靑寶郡後析眞寶松生縣來合因改今名 世祖陞爲都護府以安德縣來屬

태조3년에 진보(眞寶)에 합치고 세종원년에 왕후(王后)의 탄향(誕鄕)이라 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뒤에 진보를 갈라서 송생현(松生顯)에 합치고 청송군이라 고쳤다. 세조가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안덕현(安德縣)에 속하여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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