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흥택(1855~?)은 봉익대부공파 정랑공(휘 덕귀)후손이며 22세손이다. 청송심씨족보에는 『을묘생 횡성군수 配청풍김씨 父중선』으로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1855년 철종조에 태어났고 사망시기는 실전되었다. 이렇듯 우리 문중에서 그의 존재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역사에서 심흥택의 발자취는 뚜렸하게 살아있다.
심흥택은 수도 한양에서 태어나 신진관료로 출사(出仕)하여 1895년 4월 25일에는 내부(內部, 현 행정안전부) 소속 경무청(현 경찰청) 총순(摠巡, 서장급)에 임명된다. 1년 후인 1896년 4월 7일 경무관(警務官)으로 승진하고 같은 해 7월 26일 강원도 흡곡군수(1910년 통천군 편입)로 임명된다.
※기록출처: 규장각 소장 「의주(議奏)」,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외안(外案)」
흡곡군수 시절 백성들에게 애민선정(愛民善政)을 베풀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관(官)의 전답을 내어주었다는 소식이 「독립신문」 1896년 12월 24일 자에 보도되기도 했다. 흡곡군수 재임 1년 만에 심흥택은 면직됐다. 이후 5년 동안의 관직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 증손 재봉(봉익대부공파 25세손, 해군중령 예편 67세) 씨 말에 의하면, “이 당시 증조부가 민족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지방군수로 좌천되었다”고 종조모(從祖母)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1897년 3월 발행된 『독립협회 보조금 수입 인명』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란 자료에서 '심흥택 5원'을 기부한 기록을 발견했다. 그리고 구한말 민족운동의 요람인 서울상동교회 설립(1888년) 머릿돌 헌금자 명단에는 심흥택과 부인, 아들(상철, 상준, 상열) 이름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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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택 군수 옛모습(가운데) |
1906년, 독도가 우리 영토 임을 밝힌 「독도보고서」를 쓰다
1903년 1월 26일, 심흥택은 49세에 제3대 대한제국 강원도 울도군수(현 울릉군수)로 임명된다. 일본의 울릉도 침탈이 본격화되던 혼란기에 심흥택 군수는 4년 2개월 간의 역사적인 울릉군수 직을 맡게 된 것이다. 4월 20일 현지에 도착한 심흥택은 부임 하자마자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 거주 문제를 제기하고, 일본인들의 불법 벌목을 금지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등 관할 군수로서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해 간다. 또한 교육의 불모지였던 이곳에 향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는다. (이후 제5대 울릉군수로 부임한 심능익 군수가 1908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관어학교(지금의 울릉초등학교)를 세움으로써 청송심씨 선조들이 울릉도 교육의 기틀을 닦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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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를 찾은 일본 시찰단 모습(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심흥택 군수) |
을사늑약 체결 다음해인 1906년, 일본은 시마네현 관리들로 구성된 시찰단 45명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심흥택 군수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한다. 심흥택은 사태의 중대성을 직감하고 이 사실을 즉시 조정에 알리기 위해 독도에 관한 보고서를 쓰게 된다. 일본이 독도를 침탈했다는 내용의 긴급 보고서를 상급기관인 강원도관찰사 서리 겸 춘천군수 이명래 뿐만 아니라 의정부 참정대신에게도 올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전방위로 대처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보고서 내용은 대략 『본군(本郡·울도군) 소속 독도가 바다밖 100여리에 있는데, 일본 관원들이 찾아와 이르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 영토로 편입되어 시찰차 방문했다'고 하니 잘 살펴 헤아리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본군 소속 독도'라는 분명한 표현으로 독도가 우리땅 임을 밝히고, 공식문서에서 '독도'라는 지명을 최초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사태 파악이 늦어질 것을 우려해 동일한 보고서를 강원도관찰부 뿐만아니라 내부(內部, 현 행정안전부)에도 따로 발송하기도 했으니 그가 이 사안을 얼마나 중대하고 급박하게 보았는지 알 수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군사전략적 목적에서 대한제국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하고, 무주지(無主地) 선점이라는 억지논리를 내세웠다. 심흥택 군수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심흥택 보고서는 당시 여러 신문에 기사화 되어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공론화 된다. 1906년 5월 9일자 「황성신문」 기사는 "울도군수 심흥택씨가 내부(內府)에 보고하되"라며 심흥택이 독도에 관한 보고를 중앙정부에 직접 했다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 5월 1일자에는 보고서 기사 외에도 '내부(內部)'의 지령도 함께 게재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는 “내부에서는 울도군수에게 일본인이 독도를 일러 일본 속지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니 이 보고가 아주 아연할 일이라고 지령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도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면서 "섬의 형편과 일본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다시 조사·보고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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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심흥택의 현명한 조치는 일본이 독도를 강점할 당시에 독도가 주인 없는 섬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의 보고는 독도가 방치된 섬이 아니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심흥택의 독도보고서는 대한제국 관리가 공문서에 독도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독도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핵심 문건으로 평가된다.
<보고서 번역문>
보고서호외
울도군수 심흥택 보고서에 따르면, 본군(本郡) 소속 독도가 외양(外洋) 100여 리쯤에 있아온데 본월 초4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 쯤에 윤선(輪船) 1척이 군내 도동포(道洞浦)에 정박하였습니다. 일본 관리 일행이 관사(官舍)로 와서 스스로 이르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領地)가 된 고로 시찰차 방문했다”고 하는바, 그 일행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오키도사(隱岐島司) 히가시 분스케(東文輔) 및 사무관 진자이 요시타로(神西由太郞), 세무감독국장 요시다 헤이고(吉田平吾), 분서장(分署長) 경부(警部) 가게야마 간파치로(影山巖八郞), 순사 1인, 회의원(會議員) 1인, 의사•기수(技手) 각 1인, 그 밖에 수원(隨員) 10여 인이 먼저 호구수•인구•토지 및 생산물의 다소를 물었습니다. 다음으로 인원 및 경비가 얼마인지를 물으며 제반 사무를 조사할 양으로 기록해 갔기에 보고하오니 밝게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과 같이 보고하였기에 이에 준하여 보고하오니 밝게 살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광무 10년(1906) 4월 29일 강원도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 의정부 참정대신 합하(閤下)
-강원도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가 심흥택 군수의 보고서를 받고서 1906년 4월 29일 의정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독도군수에서 횡성군수로 이어진 항일운동
독도 보고서를 올린 심흥택은 이듬해에 강원도 횡성군수로 발령을 받는다. 이로써 심흥택은 1903년 1월에서 1907년 3월까지 4년여의 제3대 울도군수 임기를 마감하고 1907년 3월 13일 횡성군수로 부임한다. 3월 16일자 「황성신문」기사 '서임급사령(敍任及辭令, 인사명령)'에서 그의 횡성군수 부임 사실이 보도되었다.
그런데 심흥택은 얼마 안 있어 의병들에게 붙들려가는 뜻밖의 변을 당한다. 그해 8월 11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횡성군수 심흥택씨를 본월 7일에 포병이 착거(捉去)라 하얏더라"고 보도했다. 심흥택을 붙잡아간 이들은 군대해산 조칙에 반발해 봉기한 민긍호 휘하의 원주의병들이었다. 원주진위대 장교 출신인 민긍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8월 봉기하여 원주 횡성 인근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부 병력을 횡성으로 보내 횡성군수에게 군수지원을 요청했다가 심군수를 납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흥택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 8월 16일자 「황성신문」은 "어떻게 조처함은 미상이거니와 해(該) 군수는 방환이 되얏다더라"고 보도했다. 의병들의 군수지원 요구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심군수가 석방됐다는 보도다. 8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심흥택이 붙들렸을 당시에 원주 유림들이 의병들에게 석방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심군수가 의병부대에서 무사히 풀려난 것은 아마도 그가 걸어온 길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흡곡군수 부임이전 한양에서의 민족운동활동, 울릉군수 시절의 애국적 관직생활, 횡성군수 부임 직후의 활동 등 그의 행적이 의병들로 하여금 이같은 판단을 내리게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민족교육·야학운동으로 항일투쟁의 대열에
횡성군수 심흥택은 부임 이래 읍내에 보통소학교와 야학당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황성신문」 1908년 8월 26일자 기사에는 "본군수 심흥택 씨와 군내 유지들이 본도 학회 지회를 창립하고 멀지않은 기일에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이 50~60에 달함이"라는 내용이 보도되었고, 「대한매일신보」 2월 15일자에는 "횡성군 화성학교는 설립한 지 5개월에 횡성군수 심흥택 씨의 권면과 임원재씨의 열심으로 주야 학생도(徒)가 60명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하였다.
2016년에 발표한 심철기 박사(인수부윤공파 27세손)의 논문 『1907년 원주의병의 쇠퇴와 새로운 항일투쟁의 전개』에서 횡성군수 심흥택이 추진한 야학운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현내면 개화리에 노동국문전습소를 설립한 후 한글을 교수하였다. 한글 해독자는 본국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능력별 수업으로 교육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운영비는 자신의 월급 중에서 충당하였으며, 박용좌·정용면·윤두혁 등도 찬성원으로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21일자 기사에는 "현내면 개화리에 노동국문전습소를 창설하야 초동목우(樵童牧竪)를 매야(每夜) 회집하야 열심 교수하난대"라고 보도됐다. 이렇듯 심흥택은 횡성군수로 부임한 이후 교육사업을 통한 애국적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심철기 교수는 논문에서 "원주의병이 쇠퇴한 이후 원주 일대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이는 원주 지역에서 의병운동뿐만 아니라 자강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심군수가 교육사업을 지원한 것은 민족적 수난기에 역사의 흐름을 따르는 일이었다. 즉 지역의 항일세력과 보조를 맞춰 항일운동 차원에서 야학운동을 벌인 것이다. 현직 군수 신분으로 야학운동을 지원하는 일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종말과 함께 심흥택은 대한제국 횡성군수에서 조선총독부 횡성군수로 신분이 바뀐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에 강제 면직됐다.
항일운동 제대로 평가 안돼.. 독립유공자 인정이 후손들의 바람
이후 심군수의 행방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후손들에 의해 구전(口傳)으로 전해질 뿐이다. 현재 심흥택 군수의 후손들은 그의 묘역이 있는 원주와 인천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한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60~80대의 증손들이 선대로부터 전해들은 증조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증손인 재봉씨가 알려준 심군수의 사망과 장례, 사후 후손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안타까움과 깊은 슬픔을 안겨준다. 재봉 씨의 말에 의하면 "증조부는 평소 일제에 협조하지 않아 강제로 파직된 후 재산을 정리하여 사금채취 사업에 손을 댔다. 그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등 국외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어느 해인가 병든 몸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 당시 일제의 감시 속에 밤에 몰래 장례를 치르고 횡성지역의 이름없는 공동묘지에 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 가족들도 그 마을에 살 수가 없어 강원도 원성군 호저면 옥산리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엄혹한 시절에 당한 일이라 증조부가 타계한 정확한 년도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기일(忌日)이 3월 21일라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다른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랬듯이, 가난을 대물림하며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98년에서야 원주시 호조면에 선산을 마련해서 증조부 묘소를 이장하여 편안히 모셨다. 지금은 가까운 후손들이 작은 종회(총무 보선)를 만들어 매년 초가을에 벌초도 함께 하고 참배도 드리고 있다. 얼마전 횡성군청을 방문해 혹시나 호적자료가 있을까 하여 찾아봤지만 오래전 화재사고로 모두 소실되었고, 심군수를 기리는 공적비가 있었는데 이마저도 일제강점기에 실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재봉씨의 바람은 증조부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대종회에서 증조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울릉도 답사와 종보에 관련기사를 싣는 것에 대하여 후손을 대표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올 가을 철원의 2세조 봉익대부공 추향제에도 참례하여 처음으로 술잔을 올리겠다는 의향도 밝혔다.
아직도 울릉도에 살아 숨쉬는 심흥택 군수
120여년이 흘렀지만 심흥택 군수는 아직도 울릉도 주민들에게 잊지않고 기억되고 있다. 2010년 울릉군은 개군 110주년을 기념하는 ‘울릉군민의 날’ 행사에 심흥택 군수 후손인 재봉씨 부부를 특별 초청하여, 이들을 군민들에게 자랑스런 군수의 후손으로 소개하였다. 울릉군은 2013년 ‘군민의 날’ 행사에도 이들을 초청하여 명예군민증을 증정하였다. 2010년 당시 을릉군 관광과장으로서 심흥택 군수 후손을 초청하는 임무를 맡았던 김기백(전 독도박물관장, 66세)씨는 지금도 심군수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 김 전 과장은 올 봄에도 원주 심군수의 묘소를 참배하고 후손들과 소통의 끈을 놓지않고 있다. 또 전 울릉군 총무과장을 역임하고 현재 울릉역사문화전시관장을 맡고있는 황성웅(67세)씨는 "심흥택 군수가 울릉군 부속섬으로서 독도의 영유권을 최초로 주장했을 뿐만아니라 당시 울릉군 청사를 현재의 위치로 확장 이전시킨 장본인으로 울릉군 역사에 큰 치적을 남겼다"며 심군수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는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심흥택 군수의 공적을 열심히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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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택 군수 묘소(원주시 호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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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후 묘전에 선 후손들<윗줄 왼쪽부터 보선, 현진, 경진, 형진(이상 고손), 재봉/ 아랫줄 왼쪽부터 재구, 재덕, 재헌(이상 증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