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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보 심훈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인터뷰

“《상록수》모델인 아버지, 바보처럼 사셨지만 이제는 이해”

《상록수》는 한일병합 후 사반세기가 지난 1935년에 발표됐다.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공모 당선작으로 5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이광수의 《흙》(1932), 김유정의 《봄봄》(1935), 박화성의 《고향없는 사람들》(1936)과 함께 그 시기를 대표하는 농민문학이다. 상록수는 소설인 동시에 충청남도 당진에 정착한 청송 심씨 가족의 스토리이기도 하다.
심훈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간 수감됐다가 퇴학당한다. 그 후 중국에서 문학과 영화를 공부하고 귀국 후 화가 이승만(1903~1975)과 함께 ‘극문회’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1928년 조선일보 기자, 1931년 맏형 심우섭의 도움으로 경성방송국 문예담당이 된다. 그러나 사상 문제로 곧 쫓겨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당진으로 내려가 집필에 전념한다.
심우섭은 휘문고보 1회 졸업생이다. 조선총독부의 총무과, 문서과 등 다양한 부서에서 일했다. 경성방송국 한국어 방송과장을 지냈으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이사로도 근무했다. 이런 전력 때문인지 친일논쟁이 일기도 했다.
심재영은 경성농업학교(서울시립대 전신)를 졸업했다. 부친과 함께 서울 흑석동에서 살다가 1930년 브나로드(‘민중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운동을 위해 당진 부곡리로 내려와 문맹퇴치와 농촌 계몽운동을 벌인다. 모든 사람이 서울로 가고, 서울에서 살기를 원하던 때 거꾸로 벽촌으로 내려왔으니 스스로 힘든 길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심 이사장에게 먼저 “상록수의 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이라는 부친 심재영 선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을 좇지 않고 바보처럼 살았기 때문에 후세에 빛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종종 상록수에 나오는 ‘불요파 불요회(不要怕 不要悔)’를 입에 올리곤 하셨죠. 두려워 말고 후회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저희는 안효공파로 조선 시대 당쟁 시작의 중심에 섰던 심의겸의 형인 심인겸의 자손입니다. 제가 9대 종손입니다. 젊었을 적 아버지께서 귀향하는 바람에 저는 서울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심 이사장은 서울고와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미국 피츠버그대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살다가 2011년 귀국했다. 본인은 이과보다는 심훈 할아버지
를 닮아 문과 취향이라고 했다. 이번에 낸 책도 ‘문과 취향’의 결과인지 모른다.

심천보 이사장과 부인 이경애 여사

-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서울고 동기 중에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이 있습니다. 귀국 후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나라의 발전은 이념적으로 좌우 양 날개가 있어야 하는데, 진보가 영구집권을 꿈꾸고 있다고 합디다. 큰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수는 정신 못 차리고 갈라져서 진보의 정치 쇼에 헤맵니다. 해방 후에 나타났던 이념 갈등과 사회 혼란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좌파가 다시 집권해 소득주도성장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계속한다면 한국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나 아르헨티나처럼 됩니다.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오늘의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이런 시각은 45년 간의 미국 생활과 그곳에서 길러진 국제 감각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하다.

- 독자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3쇄가 나갔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북리뷰를 잘 써줬고, 유튜브인 공병호TV, 김문수TV에서도 소개를 해줍니다. 우리 일가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심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세 달 만에 4000권이 팔렸다면 반응이 뜨겁네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광고를 많이 했어요. 전국의 대학 총장과 대기업 총수에게도 일일이 보냈습니다. 제 논지에 동의한다면 대학생과 젊은 직원에게 소개하겠죠.”

- 미국에서 45년 거주하면서 장남 규천은 하버드대와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차남 규동은 스탠포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하는 등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습니다. 왜 귀국을 결심했나요.
“제 어머니는 미국 하와이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는 해방 전까지 농촌계몽 운동을 하셨는데 해방 후 무고하게 사회주의 운동에 연루되어 2년 가까이 피신을해야 했습니다. 여러번 경찰이 들이닥쳐 어머니를 끌고가서 아버지의 피신처를 묻고 어머니 손목을 묶어 잡아갔습니다. 풀려나서는 정신병으로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치매로 고생을 했습니다.
계모인 김옥순이란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분이 아버지를 모시고 50년간 상록수 터전을 지켰습니다. 부곡리 상당수가 저희 땅이었죠. 지금은 팔기도 하고 기부도 해서 만평 정도가 남았습니다. 계모가 장남인 제가 들어오기를 바랐습니다. 2011년에 아내에게 귀국하자고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따라왔습니다. 제가 종손이니 당연히 들어와야죠.”

- 이곳 생활은 어떻습니까.
“아내(이화여대 약대 졸업)도 만족하고 저도 이곳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번영을 지속하기 바랄 뿐입니다. 어떻게 일으킨 나라입니까. 젊었을 적에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컸습니다. 사실 그래서 유학을 갔습니다. 이제는 아버지 뜻을 이해합니다. 작은 할아버지인 심훈 선생은 36세 젊은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치 있는 삶을 살았잖습니까.”

- 가수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는 좌파가 자주 부르는 노래이고, 이 노래에는 심훈 선생의 시 제목인 ‘그날이 오면’이라는 가사도 여러 번 나옵니다. ‘그날’은
이 땅의 민주화 세력이 그리는 이상향이지요. 

이 질문에 심 이사장은 “몰랐다”며 “한번 들어보자”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기타를 치면서 양희은과 함께 부르는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라는 ‘상록수’ 노래를 유튜브로 들려주자)
“좋은데요. ‘상록수’가 좌도 우도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 같아 새삼 뿌듯합니다.”

심훈 선생이《상록수》를 집필했던‘필경사(筆耕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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