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군도 (왼쪽부터 沈덕부 할아버지, 이성계, 이지란) |
627년 전 위화도 회군 현장에 있던 장수 셋의 초상이라는 그림이 나타났다. 출정을 앞두고 찍은 기념사진인 셈이다. 화면 중 3인은 훗날 역성혁명의 주역들이다. 가운데가 이성계(1335~1408)라고 한다. 좌 이지란(1331~1402), 우 심덕부(1328~1401)가 호위하고 있다. 용과 호랑이 등 용맹의 상징들도 보인다.
비단에 채색하고 장지로 배접한 이 그림(90×160㎝)의 제목은 ‘장수군도(將帥軍圖)’다. 1000년을 간다는 장지는 거의 녹아내린 상태로 세월의 흐름을 전하고 있다.
소장자는 “장쩌민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을 때 베이징에서 현지 고위층에게 선물받은 것이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줬더니 원나라대 용문매병과 함께 이 회군기념도를 줬다. 그림을 처음 입수한 사람은 자신이 평양에 파견했던 직원이라고 하더라”고 밝혔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 표시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 등 국가 미술기관의 그림에 개인의 서명이 없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다.
장쩌민(89)은 1989~2002년 총서기로 재임했고, 이 고위층은 1995년 청와대를 찾아와 김영삼(1927~2015) 대통령도 만난 것으로 확인된다. 위화도 회군도는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 있었던 셈이다.
명나라 요동 정벌차 출정했던 이성계 등은 1388년(고려 우왕 14) 음력 5월 의주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회군,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이지란은 우군 조전원수, 심덕부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의 서경도원수였다.
심덕부와 이지란은 1390년(공양왕 2) 책봉된 회군공신 45명에 들었다. 둘 다 회군 1등공신이다. 이듬해에는 공신전도 받았다.
‘위화도 회군도’의 심덕부와 대조할 만한 영정은 남아있지 않다. 이지란은 귀화 외국인다운 용모다. 본명이 퉁두란(퉁쿠룬투란티무르)인 이지란은 여진족 출신이다. 전해지는 초상화와 유사하다. 이성계는 7세 연상인 심덕부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일뿐더러, 공식초상 격인 조선태조어진(전북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 수장고)과 닮지도 않았다.
소장자는 “조선태조어진은 이성계 재위 당시에 그렸다는 어진을 1409년(태종 10)에 모사한 것이 시초다. 1763년(영조 39)에는 수리도 했다. 그리고 1872년(고종 9)에는 낡은 원본을 새로 모사했다. 위화도 회군도와 국보 어진, 두 그림 속 인물 중 어느 얼굴이 이성계의 실제 모습인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