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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가 낳은 의병장 심우신 【Ⅱ】

김포가 낳은 의병장 심우신(沈友信) 【Ⅱ】

심우신 장군의 증 정부인 전주이씨와 정부인 장흥임씨 합폄묘 (심우신 장군의 묘소는 전남장성에 소재)

4. 성장과정

심우신은 명문가의 자손답게 용모가 준수 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글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살았다.

고매한 선비가 되는 꿈을 가진 심우신은 성장하면서 내심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더욱 문학에 심취하여 주야로 과도하게 독서를 하고 글짓기를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운동부족으로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에 의한 가슴앓이와 소갈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의사는 운동처방으로 활쏘기를 권했다.

심우신은 겉으로는 문약한 것 같았으나 외유내강의 강건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태생적 성격을 집안사람들 조차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심우신의 이러한 성품은 마을의 활쏘기 대회에서 나타났다. 언제나 심우신은 마을 활쏘기모임에 참가했다. 심우신의 이러한 성품은 마음의 활쏘기대회에서 나타났다. 언제나 심우신은 마을 활쏘기모임에 참가 했다하면 항상 백발백중 과녁을 명중하였기 때문이다. 심우신의 이러한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확실한 일시는 알 수 는 없으나 하루는 한성부판윤 신립(申砬)이 아우를 대동하고 와서 심우신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신병인 소화불량을 지니고는 학문에 정진하기가 어렵고 학문을 닦은들 허사가 될 수 있으니 오히려 그대의 숨은 재주인 무도(武道)를 닦으면 건강에도 좋고 나라로서는 간성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대 자신에게는 남아로서 뜻있는 일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 이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에 심우신은 답하기를 “나의 성품이 원래 강직한데다가 무도로서 출세를 한다면 조금도 부드러움이 없어 처세에 문제가 있을 것” 이라고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심우신의 둘째 아버지인 경기감사 심전(沈銓)과 6촌 형인 청양군 심의겸(沈義謙)이 신립의 이야기를 듣고 심우신의 아버지인 심수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의 도량이 보통은 아니나 신병이 있어 학문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이고, 신립의 권유가 일리가 있으니 무도를 닦는 일을 막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래는 학문을 탐구하여 선비가 되거나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나가려하였던 그의 꿈을 접고, 무반이 되기로 마음먹고 무도연마에 열중하였다.

그 결과 심우신은 1567년(명종22년 丁卯) 24세 되던 해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처음 선전관(宣傳官)에 선임 되었다가 도총부 도사로 승진했다.

그 후 황해도 웅진현령으로 제수되어 목민관으로 3년간 근무했다. 당시 황해도 감사가 가까운 친구를 위하여 양민의 농지를 무리하게 강제 수탈하므로 강력히 항의하다 감사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끝내 사표를 던지고 통진(通津)으로 귀향했다. 옹진을 떠날 때 백성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길을 막으므로 밤에 몰래 개인의 말을 얻어 타고 옹진을 빠져 나왔다. 그 후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일체 외부에 출입도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심우신이 옹진현령 재임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권7, 선조6년 8월16일(癸亥) 4번째 기사에 사헌부(司憲府)가 해주목사(海州牧使) 윤옥(尹玉)이 죄 없는 백성을 옥사 시킨 죄로 논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해주목사 윤옥은 아랫사람의 거짓 꾸민 정소(呈訴)를 믿고 한 죄 없는 백성을 죄악에 얽어 넣었고, 뭇 아전들은 몰래 옥졸들에게 부탁하여 참혹한 벌을 마구 가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는데, 검시관(檢屍官)인 강영현감(宋江)과 옹진현령 심우신(沈友信)이 부당하게 감싸서 병으로 죽었다고 핑계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모두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推考)하소서. 북병사(北兵使) 곽순수(郭舜壽)는 재기(才器)가 천단(淺短)하니 가르소서.” 하니 상이 우선 곽순수를 가는 일을 윤허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심우신은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서 선조의 신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며 심우신이 벼슬길을 접은 것은 여러 가지 마음의 갈등과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심우신은 1580년(선조13년 庚辰) 8월25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부친을 통진현 상곳면 학현에 예장하고, 1582년(선조15년 壬午)에 삼년상을 마칠 즈음에 선조는 외우(外憂)에 대비하여 널리 장수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여 배양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당시 재상인 박순(朴淳)이 심우신을 추천 했다. “박순은 심우신은 일찍이 고을의 현령으로 있을 때 부하를 엄히 다스리고 덕을 쌓으며 청백리로서 백성을 통솔할만한 인물로 부지런하고 천성이 강직하여 경험을 더 쌓으면 대임도 맡길만하다.”고 적극 추천했다.

박순의 추천이 있고 난 후 강원도 홍주판관(洪州判官)으로 제수되어 2년간 근무하고 해임된 후 곧 이어서 1584년(선조17년 甲申)에는 평양판관, 천안군수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사양했다.

1950년(선조23년 庚寅)에는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제수되었으나 수개월간의 신병으로 체직했다.

이어 심우신은 1591년(선조24년 辛卯) 10월9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중(執喪中)에 임진왜란을 맞게 됐다.

1592(선조25년 壬辰) 4월14일 뜻밖에 약20만이 넘는 왜군이 9개 부대로 나뉘어 쳐들어왔다. 전투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부산의 군, 민(軍民)들은 첨사 정발(鄭撥)의 지휘아래 결사 항전 하였으나 성은 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부산을 유린한 왜군은 동래성으로 물밀 듯 쳐들어갔다.

이곳 군, 민들도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지휘 아래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그 후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진격해왔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신립장군을 내려 보내 충주의 탄금대 (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게 하였으나 역시 왜적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런 전황(戰況)속에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야인으로 있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임명 하였다. 김명원은 한강에 진(陳)을 치고 선조에게 “심우신은 무신으로서 그 재능과 무술이 출중하니 상중(喪中)이라도 제복(除服)으로 기용하기를 청한다.”는 장계(狀啓)를 올려 상중인 심우신을 갑자기 군(軍)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심우신은 어머니 상중이라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어머니 영전에 울음으로 고별인사를 올리고 상복을 벗고 군복차림으로 부임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왜군이 서울 근교에 육박하자 선조는 4월29일 세자와 함께 의주를 향하여 파천(播遷)하였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 등 두 왕자를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케 하고, 이덕형을 명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요청 하였다.

한편 한강에 진을 치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은 군대를 파하고 선조의 파천행차를 돕기 위하여 배행(陪行)하게 되니 심우신은 소속이 없는 종사관이 되었다. 생각 끝에 심우신은 통진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 사이 부산에 상륙한지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한 왜군은 다시 북진을 계속하여 임진강에서도 도원수 김명원의 방위군을 격파하고 개성을 점령한 다음, 이어서 6월13일에는 평양마저 함락하였다.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이끄는 왜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함경도까지 유린하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여 근왕병으로 지원하는 자도 없었으며, 정부의 무능에 격분한 백성들이 피난하는 선조의 어가를 막으며 원성을 터트리기 까지 하였다. 서울에서는 일부 노비들이 혼란한 틈을 타 노비의 문적을 맡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 질렀고 이로 말미암아 궁궐이 소실되었다.

그만큼 조정은 왜침(倭針)에 대한 준비가 아주 부족했다.

5. 의병 활동

통진 집으로 돌아온 심우신은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6월 어느 날 가속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서해의 해로를 이용하여 처가가 있는 영광군 외서면 유평리(지금의 장성군 상서면)로 이주하여 농가에 정착하였다. 영광에 정착한 심우신은 10월 모친의 소상을 지내고 난 후 곧 이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군왕을 도와 보국하는 계획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심우신은 친지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 하던 날, 이미 나의 이 한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로 결심 하였다. 하물며 상중기용(喪中起用)이 된 바에 어찌 농촌에 엎드려 안일하게 내 몸이나 처자만을 돌볼 수 있겠는가”라고 창의(倡義)할 것을 외쳤다.

먼저 하인들과 지원하는 장정 백여 명을 선발하여 의병의 대오를 갖추고, 장인(林湜:백만장자였다고함)으로부터 분배받은 2천석지기 농토와 나머지 가산을 전부 기우려서 의병을 모집하니 응모하는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표의(彪義) 두자를 써서 군기를 만들어 들고 장수가 되었다.

처남 임두춘(林逗春)도 부장(副將)으로 참정 하였고, 그 외 중심요원으로 박언준(朴彦俊), 김부행(金副行), 최인(崔寅), 정충훈(丁忠訓), 김보원(金輔元) 등이 더불어 뜻을 같이 했다.

심우신은 삼서면 학성리 장천마을 앞 광장을 연병장으로 정하여 스스로

지휘관이 되어 군율에 따라 의병들을 엄격히 훈련시켰다.

당시 의병이란 유생과 일반농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건장한 노복을 데리고 모병에 응모하는 유생이 많았다. 이들 의병들은 자기 병기를 쓰고, 자기 식량을 먹으며 국가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는데 생명을 바쳤다. 임진왜란 초기에 참패를 거듭하던 관군을 대신하여 삼남지방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크게 전승을 이룬 것도 이들 자원 의병이었다. 이들은 침략군인 왜군의 격퇴와 국토회복, 그리고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군사집단이었다.

임진의병의 거병은 국난을 당하여 자기의 향촌과 나라가 야만적인 왜군에게 짓밟힌다는 민족적 분발심과 저항의식이 크게 작용했고, 오랫동안 유학을 수학한 나머지 몸에 밴 근왕정신(勤王精神)에서 비롯된 애국적인 의거였다. 심우신도 영광에서 거병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하였다. 북상하는 도중에 청주와 황간 등지에서 왜적을 만나 교전하여 적을 패퇴시켰으며, 12월8일 심우신의 의병부대는 마침내 수원까지 북상했다. 여기서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연합전선을 펴고 수비하니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세 번이나 공격해왔다.

이에 심우신은 기발한 전략을 써서 기습작전으로 왜군의 선봉을 제압하니 다시는 덤비지 못하였다. 이어 더 북상하여 양화전에서 창의사 김천일 장군을 만나 회견할 때 김천일 장군은 심우신 의병부대 군률이 있고 정예함에 놀라고, 또 심우신 비분하는 모습에 감격하여 서로 생사를 같이 하자고 맹서했다.

그 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장군은 강화에 주둔하고,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장군은 행주를 수비하면서 서로 응원하고 왜군을 압박하니 이듬해인 계사년 4월18일,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왜적은 서울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1593년(선조26년 癸巳)4월, 명나라 원군이 당도하여 이여송(李如松)장군이 남으로 왜군을 추격 할 때 창의사 김천일 장군에게 의병을 거느리고 함께 가기를 요청하였다.

창의사 김천일 장군은 함께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심우신에게 “그대의 부대는 그들과 같이 갈 필요가 없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하니 이에 심우신이 대답하기를 “내 이미 창의사 김천일 장군과 함께 목숨을 내놓기로 작정하였으니 뒤로 떨어 질수 없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심우신은 아들(詡)을 달래어 본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적이 곧 퇴각할 것이며 나도 머지않아 군졸을 해산하고 통진 집으로 갈 터이니 너는 반드시 영광으로 가서 가족을 데리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심우신의 행동은 마음속으로 남쪽 전선에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였기 때문에 아들만을 본집으로 가도록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로지 살신성인 하여 보국하겠다는 일념이 굳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인즉, 심우신이 김천일 의병부대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된 까닭은 김천일 장군이 오랜 지병으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되었고, 남아있는 여타병졸들도 오랜 전투로 피로가 겹쳐 쇠약한 자들 뿐 이어서 아주 피폐한 형편인데 비하여 심우신이 거느린 장병들의 정예함이 뛰어나기 때문에 김천일장군은 대단히 기뻐하였고, 군대를 연합하여 남하하기로 하였다.

심우신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갈 즈음 조정에서는 심우신이 수원과 독성산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소식을 듣고 심우신에게 남양부사 겸 진무기보(南陽府使兼鎌鎭撫畿輔)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심우신은 이미 남으로 내려간 후여서 부임하지 못했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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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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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3 23: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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