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종보기사 > 연재
5화 - 일송상공(諱: 喜壽 11世祖 )과 기생 일타홍의 사랑

다시 일타홍과의 이별

 

심정승과 배위 광주 노씨의 쌍봉묘 옆에 일타홍의 제단 / 일타홍 묘비 뒷면에 새겨진 일타홍과 심희수의 시

심수찬이 일타홍을 대동하고 금산고을에 부임한지도 어언 2년이 되었다. 그간 날이 가면 갈수록 일타홍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떤 이는 못난 아들보다 일타홍이 열 번 낫다고 하며 은근히 부러워하였다. 그렇게 보면 일타홍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이 아닌가!

그러나 서방님의 지위가 높아갈수록 일타홍은 반대로 시름이 깊어만 가는 것이다.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서방님이 더벅머리였을 때가 더욱 행복 하였다.

서방님에게는 조강지처이면서도 서방님이 처녀장가를 드신 날 그녀는 소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 하였다.

‘내가 심희수 라는 남자 하나를 잘되게 하기 위해 따라왔는데 이제 일이 성취되고 보니 목적하는 바는 다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서방님의 일이 끝나면 나는 이집을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머리가 가벼워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새 아무도 모르게 사(死)약을 구하고 있었으니 과연 이문제로 목숨까지 버려서야 될 말인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닌가. 그러고 나서 며칠 후의 일이다.

심 사또가 공무를 보고 있노라니 종 녀석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하는 말이 “마님께서 갑자기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십니다. 사또님이 속히 들어오셔서 보셔야 하겠습니다.“

심 사또가 불길한 생각에 불이 나게 안으로 달려와 보니 일타홍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있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사람 같이 보였다.

심 사또는 일타홍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마구 흔들어 대며 소리치는 것이다.

“이봐! 정신 차려요! 왜 갑자기 이러는 거요? 머리가 아픈 것이요?”

한참 만에 눈을 뜬 일타홍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서방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소첩은 서방님을 모시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그 목적을 다 했기에 소첩은 먼저 가려하옵니다.

소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봐! 죽기는 왜 죽는다고 그래! 무엇 때문에 ...”

심 사또는 일타홍을 가슴에 와락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일타홍아! 그렇게 고생만하고... 네가 왜 죽어야 하느냐! 어째서...”

심 정승은 옆에 사람도 아랑곳없이 목을 놓아 통곡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일타홍은 점점 더 가쁜 숨을 몰아쉰다.

또 잠시 눈을 뜬 일타홍이 목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서방님 저를 꼭 안아 주세요. 서방님 품에서 잠들고 싶...”

말도 끝내지 못한 채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나이는 38세요. 심희수를 만난 지 꼭 20년이 되는 해이다.

심 사또는 일타홍의 몸을 힘껏 끌어안은 채 몸이 점차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슬픔에 잠겨있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그 청춘을 다 바쳤는데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다니 하늘을 우러러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 가! 심 사또는 몇 번이고 되뇌이는 것이다.

며칠이 지났다. 심정승은 일타홍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 선산에 묻기로 하고 시신을 운구 중이다.

원래 법도로는 기녀 소실을 선산에 묻을 수 없는 것이나 몰락해 가는 한집안을 일으켜 세운 공로가 커서 그리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운구가 금강(錦江)에 이르렀을 때다. 갑자기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 하였다. 가을비마저 촉촉이 뿌려대니 일타홍이 그리워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을 억제 할 길이 없다.

상여를 내려놓았다. 한참을 쉬었다 다시 떠나려하니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 심 사또는 생각하기를 일타홍이 가는 길이 서러웠던가!

상여 채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시(詩) 한 수를 지으니,

 

한 떨기 고운 꽃이 버들 수레에 실려서

향기로운 넋이 주저하며 가는 곳 어디뇨

금강에 가을비 내려 붉은 명정 적시니

그리움 내 님의 이별의 눈물인가 하노라.

 

얼마 후 상여가 떨어졌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선영에 묻고 난 다음부터 벼슬이 자꾸만 높아져서 마침내 정승반열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을 비롯해 평난 호종선무(平難扈從宣武)공신까지 四공신이 되었다.

그런데 심정승은 가정생활은 일체 돌보지 않고 국사에만 열심히 매달려 일하곤 하였다.

얼마나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지 하루는 임금이 집으로 들어서니 천장은 뚫어져서 구석구석 비가 샌 흔적이 있고 뒤주를 열어보니 쌀 한 톨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임금이 이것을 보시고 하도 어이가 없어 이게 어찌 정승댁이라 하겠는가? 하시며 내구마(임금이 타기 위해 기르는 말)를 한 필 내어주시고 이 말을 팔아 집을 수리하라 명하셨다.

심정승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임금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옛날 선왕께서도 행하여 오던 풍습이니 사양치 말고 받으라 하셨다.

사실 이렇게 까지 살림이 빈한한 것은 삶에 의욕이 잃어서인지 알 길이 없으나 정당하게 지급하는 녹봉까지도 일체 수령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심정승은 청송심씨 문중에서 두 분밖에 없는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그러나 그간에 있었던 모두는 금산명기(錦山名妓) 일타홍의 숨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심정승은 그 많은 벼슬을 거칠 때마다 목메어도 잊지 못한 사랑하는 女人을 그리워하였고, 또한 숨을 몰아쉬며 꼭 안아 달라던 일타홍의 그 모습 그 순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이 한 많은 一生을 살아온 것이다.

심정승은 68세를 맞아 병을 핑계로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로에 묻혀 살았다. 심정승은 일타홍과 사별 후 벌써 한 30여 년이 되었으나 일타홍과 함께 지낸 그 20년간의 기억들이 어제와 같이 생생하기만 하다.

심정승은 그님을 생각하면 혼자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것 자체가

덧없는 것이었다.

이에 시 한수를 지어 속에 담아 있는 심경을 드러내니

 

조보를 볼 필요도 없으리라

병든 눈을 감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청산이 오래도록 꿈속에 드리니

세상사는 유유히 맡겨 버리리

(조보(朝報:아침마다 조종에서 하던 일)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련다. 사랑에 병든 마음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라.

그님이 싱싱하게 가슴속에 살아 있으니 세상사 모두 세월에 흘려보내리라.)

 

심정승은 75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선산인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원흥리에 장사 지냈다.

저승이 있다면 이 두 분은 이곳에서 만나 해후를 하였으리라.

심정승의 묘가 있는 묘하 마을에는 지금도 360여년을 한결 같이 지켜온

심정승의 종손집이 있으며 심정승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심정승은 배위 광주 노씨와 함께 쌍봉으로 모셔져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 있어야 될 일타홍의 산소는 보이지 않고 비석 전면에 일타홍 금산이씨 지단(一他紅錦山李氏之壇) 이라고 써있는 삼척단비(三尺短碑)만이 두 분 쌍분묘 옆에 홀로 쓸쓸히 서있다.

일타홍의 산소는 실전이 되어 후손들이 제단을 세우고 비석 뒷면에 아래 두 시를 새겨놓았다.

 

일타홍이 죽기 전에 지은 시

〈상월(賞月)〉

亭亭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우뚝 솟은 초승달 오늘따라 더욱 밝고

一片金光萬告情 (일편금광만고정)

한 조각 달빛은 만고에 정다워라.

無限世間今夜望 (무한세간금야망)

오늘밤 끝없는 세상을 바라보니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백년의 근심과 즐거움을 느끼는 이 몇일까

 

심희수가 일타홍의 상여를 따라가며 지은 시

〈유도(有悼)〉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류거)

한 떨기 고운 꽃이 버들상여에 실려

香魂伺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향기로운 혼이 가는 곳 더디기만 하네

錦江秋雨丹旌濕 (금강추우단정습)

금강에 겨울비 내려 붉은 명정 적시니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그리운 내 임의 눈물인가 보다.

 

* 심희수의 생애 및 활동사항

1570년(선조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8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했다.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 선조의 비위에 사성(司成)으로 전직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의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했는데, 이는 중국어를 잘했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구제에 진력하였다.

1599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해 유생들의 심문을 고려하자 그 불가함을 말해 뜻을 관철 시켰으며 그 해 가을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승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재상에 올랐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 이덕형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의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령부사(領敦領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鈞)과 중국 야사에 나타난 중계문제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었다.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충추부사에 임명 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생1548년(명종3) ~ 1622년(광해군14) 壽75

[享祀日 음력10월1일, 영정(影幀)포세 음력10월25일]로 후손들은 이날 재각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   심희수와 일타홍의 사랑 끝. -

 

뒤로가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