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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쓰마야키 14대 심수관 별세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온 14대 심수관(沈壽官)을 아버지 13대 심수관이 도자기 작업실로 불렀다. 바늘을 꽂은 흙덩어리를 물레 가운데 올려놓고 돌렸다. 물레는 도는데 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심을 찾는 것이 앞으로 네 인생이다." 아들은 훗날 그 말이 '조선 도공(陶工)의 피와 기술을 이어받은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임을 깨닫게 된다.

일본의 조선 도공 후예이자 한·일 문화 교류의 가교로 불린 심수관가(家)의 제14대 심수관(92·사진) 선생이 16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일본 이름은 오사코 게이키치(大迫惠吉)다. 심수관가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규슈(九州) 남쪽 가고시마(鹿兒島)로 끌려간 도공 심당길(沈當吉)과 그 후손들이 400년 넘게 명맥을 잇는 도예 가문이다. 심당길을 납치한 왜장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였다.

타국에 끌려간 도공의 후손들은 단군 사당을 짓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상의 땅을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풍토에서 도자기 기술을 발전시켜 갔다. 심당길 가문의 12대인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높이 2m에 가까운 '금수대화병'을 출품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고, 그 후손들은 대대로 같은 이름을 쓰게 됐다.

14대 심수관은 가고시마 지역의 도기를 의미하는 사쓰마야키(薩摩燒) 진흥의 주역이었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에 큰 꽃병을 출품해 관심을 끌었으며 1998년 개최된 '사쓰마야키 400주년 축제'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의 모델로 일본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남다른 인연도 있다. 1964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에게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을 둘러보니 어떻소?" 대통령의 질문에 "일본 미술관과 박물관엔 칼과 창 같은 무기가 많은데 한국엔 별로 없더라"고 대답했다. 순간 눈을 번쩍인 박 대통령이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는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미(美)가 아니지요." 나중에 이 말을 전해 들은 시바 료타로가 감동해 박 대통령을 만나본 뒤 여러 매체에 그의 인간미를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1998년 왜군의 도공 납치 400년을 맞아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화제였다. 그는 심수관가의 뿌리인 남원에서 도자기 제작에 사용할 불을 채취해 현해탄을 건너는 행사도 기획했다.

1974년 서울대 강연 당시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답변해 화제가 됐다. 일제의 악행(惡行)은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한국인들이 막연한 애착심으로 "당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아니냐"고 묻는 것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비치기도 했다. 그는 "사쓰마 도자기는 불행한 시대의 바람에 아버지인 한국의 종자가 어머니인 일본의 대지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것"이라고 했다.

한·일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1989년에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됐다. 심수관요(窯)는 지난해 6월 도쿄의 한국문화원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 기념 특별전을 개최했다. 아들인 15대 심수관(일본명 오사코 가즈테루·大迫一輝·60)이 그의 후계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8/20190618003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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