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의사와 우신행장

표의사
소재지: 전남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


충 절 문


충 의 문


증병조참판공 휘 우신 묘
소재지 전남 영광군 내서면 봉루동


신 도 비


증병조참판공 휘 우신장군 동상
소재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상무대내)


贈兵曹參判靑松沈公諱友信行狀
公諱友信字公擇麗朝文林郞衛尉寺丞洪孚之後也文林郞生諱淵仕終閤門祗侯閤門祗侯生諱龍仕終典理正郞 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靑華生諱德符仕終左侍中靑城伯諡定安公定安公生諱溫仕終領議政靑川府院君諡安孝公卽
昭憲王后之皇考也安孝公生諱澮翊戴佐理功臣領議政靑松府院君諡恭肅公恭肅公生諱瀚漢城府右尹純誠明亮佐理功臣靑川君夷敬公生諱順徑漢城府左尹靑城君贈兵曹判書靖國功臣胡襄公生諱興源成均進士生諱鐩仕終谷山郡守 贈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卽公之考也妣 贈貞夫人朴氏正郞宗豪之女嘉靖甲辰八月二十一日生公公容儀秀邁志氣倜儻自幼業文筆法亦遵勁且有勇力未嘗以視人雖一家人亦無知者因讀書致傷食滯膈煩仍成渴病醫敎以射的嘗徃通津値鄕人會射公發無不中人皆異之一日申判尹砬與其弟硈來謂公曰有滯食之病者率多廢業君亦不能勤攻學業誠可惜也若積痼不瘳則將未免齷齪沒世矣以君才器捨文取武則鳴劍夷吾此固男兒事也而國家亦得一干城也公曰吾性素剛以武拔迹必不能行于世也公少時受業於平川府院君申公磼故與申公兄弟相善也公再從兄靑陽君義謙及仲父畿伯銓聞申公之言謂判書公曰此兒器度不凡而病廢學業申某之言亦似有理幸君無沮焉仍勸令如申公之言公不獲已赴擧遂中丁卯式年武科時年二十四矣調宣傳官例陞都摠府都事除甕津縣令居三載監司爲其所親以非理奪邑民之田公以法爭之强監司怒公遂棄歸民擁馬使不得行公乘私馬夜半潜發旣歸歎曰申公誤我矣吾不能隨人俯仰也絶意仕宦未嘗出門庚辰丁判書公憂哀毁逾制幾至滅性壬午服闋適 下敎培養將才思菴朴相公言於朝曰沈某曾爲西邑倅時御下嚴而有恩持身簡重而勤於國事此牧民御衆之才也第性太剛歷試老成則可任大事遂除洪州判官公雅不欲行而親舊敦勸黽勉赴任二載竟解歸未久連除平壤判官天安郡守皆稱病篤不赴庚寅除軍器寺僉正數月呈病遞職辛卯丁母夫人憂壬辰四月倭警甚急金相命元出陣漢江 啓以沈某才武鮮比請起復爲從事官公辭不獲 命半日哭於几筵戎服以從未久元帥罷兵赴 行在公無所屬遂挈家歸通津由海道趨湖南六月到靈光農舍過初朞及建義集衆爲覲王之計謂所親曰吾出身之日已許國一死况起復之後退伏田里敢爲全軀保妻子之計乎遂聚家僮擇丁壯者百餘人散家財以募兵從者數千人率之以北至湖西再遇賊皆敗之十二月入守水原禿城京城留鎭之賊三遣兵攻之公出奇設伏輒挫其鋒賊畏之不敢復逼時倡義使金公千鎰住江華巡察使權公慄守幸州相爲聲援未久賊棄京城而走癸巳四月李提督如松追賊南下請倡義使率義兵同徃或謂公不必行也公曰已與金公約以同死生不可後也金公時久病部曲頗移屬他將餘存疲弱見公所將頗精甚喜連營而進朝廷除南陽府使兼鎭撫畿輔而公已南矣時我師多左次而石曼子平行長等分據右道而沿海各處有侵軼湖南之計諸公議以爲賊必將窺覦湖南晋其衝也六月十四日與慶尙兵使崔公慶會忠淸兵使黃公進助防將張公潤復讐將高公從厚等遂入晋州賊曾敗於晋欲泄其憤且以擅棄京城秀吉之督過又急欲屠一名都以塞其責合兵十餘萬圍之乃六月二十日也城池器械無一可恃居民及避亂者雖多而創殘之餘能戰者少諸公分門而守張公潤爲南門守把將公爲東門守把將倡義使及崔公慶會等徃來應援賊設雲梯起土山晝夜急攻砲丸如雨城中隨力備禦竭力相拒賊亦多死而益添生兵我旣無外援矢石亦盡第六日黃公中丸而死七日張公又中丸旣失兩人城中氣喪翌朝賊盡銳登城南門先潰凶鋒闌入公時在東門見事不可爲乃馳詣倡義使所駐處則金公方在矗石樓上公酌酒與金公相誓曰死後同爲厲鬼以殺賊擲杯而起金公先投潭水公曰我武人不可徒死卽下樓背水而立以射賊矢盡弓折之後北向四拜而投水乃癸巳六月二十九日也 朝廷追錄宣武功臣只錄公原從一等功臣 贈判決事公之子詡上書訟于 朝金相命元諸公亦多稱公冤加 贈兵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公起義之日長子詡年纔二十餘公不令從行詡累日不食涕泣請從公不得已許之到水原賊南走後公謂詡曰吾本不樂仕今爲國有此擧今賊退矣吾未久將解兵歸通津汝須徃靈光挈家以來且賊若留屯嶺南必將傍侵湖南汝其速徃也旣行之三日公與金倡義俱南盖知南下之必危而詒語子而送之也城未陷兩日前公作遺書兩件付家僮之勇智者曰若有可乘之隙則抽身而出可也其人半夜潜出百重鐵筩脚中兩丸僅達靈光詡始知公之在晋晝夜馳進則城陷已屢十日矣俟賊退卽入城則積骸與城齊暑炎旣甚霖雨經兩旬賊又遞死人衣服之稍完者尤無以辨詡晝夜號痛遍閱潭水積骸中終不得辨與金黃家諸人皆招魂而返城中軍民死者六萬餘人老弱或顚仆於積尸之不有一二得脫者本州軍校姜姓人年六十亦負屍得生言於公之子曰賊入城時倡義使在矗石樓上與東門守把將酌酒相誓射賊力盡相繼投水而死賊見力戰者雖已死必褫其衣斬臠之其族人有與倡義使同死之人故賊退之後卽徃尋之亦無以辨識云公遺書曰凡死而葬者爲藏其軆魄也死於戰場不得其屍者或以衣冠虛窆甚無謂也吾常非之吾死之後勿爲無稽之事以城陷之日爲忌日祭於廟愼勿背斯言也其一卽區處外家事也公篤於奉親日具三牲 管竟夕惟親之所樂無所不爲友愛兄弟湛樂度日恒怡怡如也家無妾媵閨門嚴整厮役雖多甘旨之具賓客之供而已平生尙氣節敦行誼見人之善褒揚不已見人之不善輒峻責之雖朋儕之間必面斥其非其人若服而改之則喜而與之益厚若不能悛改又無媿服之意則斥以絶之由是愛公者雖多而亦多有怨之者矣素不喜酒未嘗盡而愛人好客晝夜滿堂使之相酬酢觀其酣醉以爲戱樂輕射好施賑人乏窮無所吝惜性雖豪爽深思放逸若或無客正坐看書食滯氣疲則或投壺或射的以暢其氣自處若文人雅士素有渴病好服凉冷流頭日俗作水團餠公輒飮蜜漿數椀曰此眞吾佳節也使岳武穆到黃龍府痛飮其快意亦必如是洪州解歸時有庶族隨行者告公曰金矢之直魚鹽之價盈溢官庫請以若干疋造射帿公曰吾京鄕兩家帛將腐矣粟亦紅矣雖造十數帿一開帿可辦何必用此乎苟有一毫取於官者人將不食吾餘矣初起義時盡罄家貲以供軍需所親或謂公曰公傾財破産而爲此擧一不幸子孫何依盍少留之以爲子孫之地乎公曰文信公平生自養豪侈及起兵入衛也痛祛前習吾常慕之馬援有守錢虜之說高歡亦云財物可常守耶彼尙有斯言况赴國難者已忘其軀况恤其他乎若使賊蹂躪八路顧此財物能爲吾子孫之有耶脫如君言後世稱爲忠臣子孫以此遺之不亦厚乎聞者愧服家世素淸貧而朴正郞林夫人兩家資財皆累鉅萬公自少及長自奉甚侈洎起義之後與卒伍之最下者同甘苦麾下咸樂爲之死終無怨叛者平生簡伉不妄交人尤不肯隨人俯仰少不愜意則雖權貴略不屑焉見人之昏夜奔競者若將퐠已有時出門非親舊吊慶則兄弟及群從之家也仕不前人與世背馳轗軻以終者職之由也公配全州李氏肅川副正億年之女無育公娶長興林氏宣敎郞湜之女也以公 封貞夫人有三子曰詡曰曰誡女三人曰姜克承曰成俊英曰李喜熊詡再上疏斥 國家不當與倭賊通和仍屛居鄕里不赴朝廷有錄用之命而亦不仕以終後 贈吏曹叅判子二人曰世鐸文科持平曰世鼎文科監司 有二子曰世彦世傑誡敎官不仕有二子曰世英世雄姜克承有一子曰履慶成俊英有一子曰遠僉正李喜熊文科縣監有二子曰時馪時馪世鐸有四子曰思渾早歿思沉前縣監椰出系思沖早歿世鼎有二子曰思泓前持平思澂奉事世彦有一子曰東老世傑有一子曰思涵世英有四子曰思淑監役不仕思泌思涉思漢世雄有四子曰思潤思溟思洙思澤內外曾玄孫以下衆而不盡記

肅宗丁卯
議政府左議政 畏齋 李端夏 撰



증병조참판청송심공휘우신행장(번역문)
공의 휘는 우신(友信)이요 자(字)는 공택(公擇)이며 시조는 여조말의 문림랑 위위시승(衛尉寺丞) 휘 홍부(洪孚)이고 청성백 좌정승 휘 덕부(德符)는 4세조이며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휘 온(溫)은 5세조요,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휘 회(澮)는 6세조이고, 한성부우윤 청천군 이경공 휘 한(瀚)은 고조부이며, 한성부좌윤 청성군 호양공 휘 순경(順徑)은 증조부요, 진사공 휘 흥원(興源)은 조부이고, 곡산공 휘 수(鐩)는 아버지로 후일 공의 임난공훈으로 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정부인에 추증되었고 정랑(正郞), 박종호(朴宗豪)의 따님이다.
1544년(중종37) 8월21일 김포군 대곳면 약암리 약산에서 출생하니, 용모가 준수하고 지기가 호장(豪壯)하여 어릴때 부터 문학을 전수하였으며, 필법 또한 뛰어났다. 또 용력이 있으되 사람들에게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한집안 식구라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공께서는 독서를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소화불량증에 걸린것이 소갈증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의원은 운동부족으로 생각하고 활쏘기를 권하였다. 공이 통진으로 내려가서 그곳 인사들의 향사회(鄕射會)에 참가하였는데, 활을 쏘기만 하면 관혁에 적중시키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
하루는 한성판윤으로 있는 신립(申砬)이 그의 아우 신할(申硈)과 같이 곡산공 댁을 심방했을 적에 공에게 말하기를 「소화기병이 있는 자는 대개가 학업을 폐지하게 되는바 군도 그렇게 될 것이니 참으로 가석한 일이다. 만약 그 병이 고질화 되면 결국 유감스겁게도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니, 군의 타고난 재질로써 차라리 문학을 버리고 무도를 닦으면 옛날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때에 마무장군(馬武將軍)이 씽씽하는 소리를 낸다는 보검으로, 서변의 오랑캐를 무찔러 이오(夷吾)지역을 제압하였다는 경지가 될 것이니 이는 원래 남아의 일이며, 국가로서는 하나의 간성(干城)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대답하기를 「나의 천성이 강강(剛强)한데다가 또 무도(武道)로써 출신한다면 너무 융화성이 없어서 반드시 세상에 행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공께서 연소할적에 평천부원군 신잡(申磼)선생에게서 수업한 바 있었기 때문에 신립의 형제와 서로 친했던 것이다. 그후 공의 재종형 청양군 의겸(義謙)과 중부인 경기감사 전(銓)이 신립의 말을 듣고 곡산공에게 말씀하기를, 「이 아이는 도량이 보통이 아니나 불행하게도 병으로 인해서 학업을 폐하게 되었으며, 신립의 말이 일리가 있는듯 하니 막을 일이 아니라」하며 신립의 말대로 하기를 권하니 공도 부득이 하여 과거를 보기로 결심하였고 드디어 1567년 정묘에 실시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24세로서 먼저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근무중, 한번은 왕명으로 전라도 영광군에 출장갈 일이 있었기 때문에 풍모가 출중한 공이 선전관의 복장으로 역마를 빌어타고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영광땅으로, 지금의 장성군 삼서면 삼계리 계등앞을 지날적에 기연으로 선교랑(宣敎郞) 장흥인 임식(林湜)의 따님과 재혼하게 되었다. 공의 초취는 전의이씨로 숙천부정(肅川副正) 억년(億年)의 따님이었으나 혈육이 없이 조졸하여 환거중이었는데, 계동 어구에 이르자 동리 사람들이 그 행차를 구경하려고 남자는 도로변에 나와서 환송하였으나, 부녀자들은 울타리 안에서 넘겨보다가 울타리가 넘어지는 바람에 대경 실색하여 모두 도망쳤지만, 유독 당년한 규수 한분만이 점잖은 거동으로 유유하게 그 옆 고루거각으로 들어 가는고로 마음이 끌리어 동리 사람에게서 그 규수가 임식의 따님임을 알아가지고 임씨댁을 심방하여 주인에게 인사한 후 신분을 밝힌 다음 청혼을 함에 이르렀다. 주인도 공의 가문이 명문대가임이 짐작되고 인물 또한 흡족하였으나 인간대사를 졸지에 결정할 수 없으니 영광군수로 하여금 중매하도록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군에 들려 용무를 수행한 다음 사또에게 자초지종 얘기를 한 후 중매 서주기를 부탁하니, 사또 역시 흠쾌히 승락하고 중매한 결과 혼사가 성립되었으며, 처가댁에서는 서랑을 위하여 근 천석 추숫거리를 떼어 주었다.
그후 공께서는 도호부 도사(都事)를 거쳐 옹진(甕津) 현령에 제수되어 재임중 3년되던 해에 황해감사가 그의 가까운 친척에게 주기 위하여 무리하게 백성의 전토를 강탈하는 것을 보고, 공께서 법리(法理)로써 그 부당함을 강경하게 항의 하였던바, 감사가 대단히 노하므로서 드디어 현령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거마를 에워싸고 막으면서 만류하므로, 공은 야밤에 조용히 말을 빌어타고 떠났다. 고향에 도착하여 말씀하기를 「신립이 나를 잘못 보았도다. 나는 과연 윗사람의 비위만을 맞출 수는 없다」고 하며 벼슬길을 단념한 후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학업에 몰두하였으며, 1580년(선조13) 아버지상을 당하여서는 애통함이 지나쳐 실성까지 할 정도로 지내다가 3년복상를 마치었다.
때마침 선조께서 장수재목을 양성하라는 하명이 있어서 정승 사암 박순(思菴 朴淳)이 조정에 추천하기를 심우신은 서도고을의 원으로 재직시 부하를 거느림이 엄격하면서도 은정(恩情)을 베풀고 처신하는데는 간결신중(簡潔愼重)하므로서 국사에 정려하였으니, 이는 넉넉히 백성을 다스리고 중인(衆人)을 통솔할 수 있는 인재입니다. 다만 성격이 너무 강경하지만 그것은 경험을 쌓아 노숙(老熟)해지면 가히 대사를 맡길만한 인물이요」하며 극구 추천한 결과, 드디어 홍주(洪州) 판관으로 제수되었다. 공께서는 담담한 심정으로 사양코자 하였으나, 친구들의 간곡한 권고에 의하여 부임하였다가 2년후에 평양부판관 천안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칭병하고 사퇴하였으며, 1590년에 군기시첨정에 제수되었으되 미구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다음해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인 임진 4월에 왜적이 침공하여 노도와 같이 부산과 동래를 점령하고 도성을 향하여 북진하자, 정승 김명원(金命元)이 도원수에 임명되어 한강변에 포진하였는데, 이때에 상감에게 아뢰기를 심우신은 무술과 재능이 출중하니 상중이라도 제복(制服)으로 기용하기를 청원한다」하여 군의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공께서는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반나절동안 모친의 영전에 애곡하며 고별한 후 군복차림으로 군영(軍營)을 찾았으나, 김도원수는 진영을 떠나 상감의 파천에 배행한다며 행방이 묘연하게 되므로서, 공은 소속이 없게 되니 가족을 이끌고 통진으로 돌아가서 정세를 관망타가 도성이 함락되고 인근읍이 적의 수중에 점령됨에, 권속을 전부 배에 싣고 약산을 떠나 해로로 호남지방으로 가서 법성포에 상륙하니 6월이었다. 농장인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 닥밭에 우거를 정하고 모친의 소기를 지내자 곧바로 창의(倡義)하기 위하여 근왕병을 모아놓고 외치기를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다가 죽기로 맹세하였다. 하물며 상중에 기용이 된바에 어찌 전리(田里)에 엎드려 내몸과 처자를 보호하고만 있겠는가, 하물며 나라가 위험한 이때에 우국충정의 장정은 나의 표의(彪義) 깃발아래 모이라」고 설득하고, 농장과 가대까지도 처분하여 군기와 군량을 마련하고, 처남 임두춘(林豆春)과 더불어 의병 수千명을 모집해서 장천(長川)에 설비된 훈련장에서 조련시키고 좌우중군의 편대를 편성하여 스스로 통수가 되어 배편으로 법성포를 떠나 북상하였다. 청주에 상륙해서 조헌(趙憲)과 합세하여 10월1일 적장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등을 격퇴하여 청주성을 탈환한 뒤에 궤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영천(永川)과 황간(黃澗)에 이르는 동안 전과를 올리면서 주야 강행군으로 북진하여 12월8일에 수원에 입성했으며, 취약전선인 남양도호부 소재 독성(禿城)에 주둔하면서 능선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적에, 성밖에 있는 적 대부대가 세차례나 공격해 왔으나 공은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반격하여 그때 그때 격퇴시켰으며, 적이 주둔하고 있는 상류에 똥 오줌을 흘려보내 식수를 끊고 악취를 풍겨 적을 철수케 하였다.
그때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장군은 강화에 주둔하고 순찰사 권율(權慄)장군은 행주를 수비하면서, 서로 응원하니 얼마있지 않아서 적들은 도성을 철수하고 남하하였다. 1593년 4월 중국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남으로 진격할 적에 김천일장군을 양화진에서 만나 의병을 거느리고 함께 남하하기로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어떤 분이 공에게 말하기를, 「공은 그들과 함께 갈 필요가 없다」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 이미 김장군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언약하였으니 뒤로 떨어질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사실 김장군은 그때 오랜 병으로 인하여 예하 의병 부대가 대개는 다른 장군에게 이속되었고, 남아있는 병졸은 피로하거나 쇠약한 자들 뿐이라, 공이 거느린 장병들의 정예함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서 군대를 연합하여 전진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공께서 남양주둔시의 전과계장(戰果啓狀)을 받고 남양도호부사겸 기보진무사로 제수되었으나, 공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간 후였다.
그당시 아군은 호남지역의 동남 산기슭에 분포하여 있고, 적의 괴수인 도진의홍(島津義弘) 소서행장(小西行長)등은 경상우도에 나누어 점거하여 연안각지에서 호남방면으로 침입할 계략이었으므로, 여러 장군들이 상의한 바 적은 반드시 호남을 넘겨다 보고 있으며 그의 요충은 진주성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6월14일에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장윤(張潤),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진주로 들어갔다. 적은 일찍이 진주에서 패전한 일이 있어서 그 분풀이를 하려는 의도와 또는 앞서 서울을 포기한 실수 때문에 왜국의 수령인 풍신수길의 독려가 과격하고 급박해짐으로, 이제 이름있는 요충을 함락시킴으로써 저들의 실책한 것을 메꾸자는 속셈에서 정병 10만여명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으니, 바로 6월20일이었다. 성의 참호라든지 무기들은 전자의 전투때에 파괴되어 이미 쓸모가 없게 되었고, 주민이나 피난민들은 비록 많으나 대개가 부상되어서 전투능력이 있는 자가 적으므로, 장군들이 직접 각 성문을 분담하여 수비키로 하였으며, 장윤은 남문의 파수장이 되고 공은 동문의 파수장이 되고 김천일과 최경회는 왕래하면서 응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적은 높은 사다리를 설비하고 인공으로 산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서 밤낮으로 공격하니 포탄이 비오듯 하고 있었으나, 성안에서도 힘 있는대로 방어하고 반격하여 적에게 많은 사상을 입혔으되, 그네들은 더욱 신병을 보충하여 여유가 있거니와 아군은 이미 외부의 원조가 끊긴데다 궁시(弓矢)조차 다하게 되었다. 접전한지 6일째 되던날 불행히도 황진장군이 전사하였고 7일째에는 남문을 파수하던 장윤장군이 흉탄에 쓰러지니, 이 두 장군을 잃은 성중에서는 사기가 떨어지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적은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성으로 기어올라 남문을 먼저 무너뜨리고, 흉악한 창검으로 쏟아져 들어오니 그때 공께서는 동문을 지키다가 대세가 이미 그릇된 것으로 판단하고 창의사의 처소로 달려가니 김천일장군은 촉석루(矗石樓)에 올라가 있으므로, 공이 술을 따라 김장군에게 주며 서로 맹세하기를 「함께 죽어 원귀가 되어 적을 몰살하자」하며 술잔을 던지고 일어서니 김장군이 먼저 남강물에 빠지거늘 공은 혼자말로 「내 무인인바 어찌 그냥 죽을 수 있는냐」하면서 이내 누각 아래로 뛰어 내려가 물을 등지고 서서 적에게 화살을 쏘아보내다가 화살이 다하고 활이 꺾어지니 공은 드디어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四배를 한 후에 몸을 날려 남강의 물에 던졌으니 때는 1593년 계사 6월29일이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선무공신을 등록하는데 공에게는 다만 원종 1등공신으로 하고 증직으로는 판결사를 기록할 뿐이므로 장자인 허(詡)가 상서로 조정에 호소하니, 김정승 명원(命元)과 여러 조신들이 공의 원울(冤鬱)함을 논의하여 증직에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로 추가하였다. 처음 공께서 의병을 일으키던 때에 장자 허(詡)가 나이 겨우 20인바 공이 출병에 따라가지 못하게 하였더니 허(詡)는 여러날 식음을 전폐하고 울부짖으며 종군하기를 간청하므로 공도 하는 수 없이 허락하였다가 수원에 이르러서 적이 남쪽으로 패주하자 공이 아들에게 타이르기를 「내 본시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번에 국난을 막기 위하여 의거를 하였거니와 적이 이미 패전하였으므로, 나는 미구에 군대를 해산하고 통진으로 돌아 갈터이니 너는 곧 영광으로 가서 가족을 인솔하고 오너라. 또 적이 만약 영남지방에 주둔한다면 반드시 측면으로 호남지방을 침략할 것이니 너는 빨리 갔다와야 할 것이다」하여 떠나 보낸 후 3일만에 공은 김천일과 함께 남쪽으로 진군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가 남쪽 전선으로 가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을 짐작하였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아무 일이 없을 것처럼 말을 꾸며 보낸 것이다.
진주성이 적에게 함락되기 2일전에 공은 유서 두장을 써서 용기와 꾀가 있는 아이종에게 부탁하면서 만약 빠져 나갈 수 있다면 몸을 날세게 하여 빨리 가라고 당부하였다. 그 아이는 깊은 밤에 첩첩이 쌓여 철통같은 곳을 가만 가만 기어 나오다가 총탄을 두어곳이나 맞으면서 간신히 영광땅에 도착하여 편지를 전하니, 허(詡)는 그제야 아버지께서 진주성에 계신줄 알고 주야로 달려가 보니, 진주성은 벌써 함락된지 수10일이었다. 적들이 퇴진하기를 기다려서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해골은 쌓여 성높이와 같은데 무더위는 심하고 장마비도 계속되었다. 적은 시체에서 좀 성한 의복은 모조리 벗겨갔으니 더욱 누가 누군지 분별할 도리가 없었다. 허(詡)는 주야로 울부짖고 돌아다니며 냇물가와 송장더미 속까지 찾아 보았으나, 끝내 공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김장군, 황장군의 가족들과 더불어 초혼만 하고 돌아왔다. 진주성 안에는 군과 백성의 죽은자가 六만여명이고 혹시 노약자로서 시체속에 끼어 있다가 살아 남은 자가 몇사람 있을 정도이니, 그 예로는 본군의 군교로 있었던 60노인 강씨가 시체를 등에 업고 엎드려 있다가 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허(詡)에게 말하기를 적이 입성할 때에 촉석루에 있던 김창의사가 동문을 파수하던 심장군을 만나서 술을 딸아 서로 맹세하고 적을 쏘아 죽이다가 힘이 다하자 서로 연달아 물에 빠져 순절하였고, 또 왜적은 끝까지 잘 싸우던 우리 군사를 보면 비록 죽었더라도 옷을 벗기고 그 육신에 군도로 난도질하는 악질놈들이요, 나의 친척중에도 김장군과 같이 전사한 분이 있기에 적이 물러간 뒤에 시체라도 찾으려 했더니 모두가 알아볼 수가 없이 되었오」하고 참상을 이야기 하였다.
공께서는 일찍이 그러한 사태를 예상하시었던지 전일의 유서중에 말씀하기를 「사람의 죽음에 장사한다는 것은 그 육신을 감추기 위함이다. 전장에서 죽어 시체를 찾지 못할 경우에 혹은 본인의 의관으로서 헛매장하는 풍속이 있으나 그것은 너무 형식에 치우치므로 내가 항상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죽거던 그처럼 황당한 짓을 하지 말고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로써 사망일로 정하여 제사지내면 족하니 부디 배반하지 말것이다」라고 하였고 다른 한 편지에는 외가에 대한 일을 잘 보살피어 처리하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에 어버이 봉양에 극진하여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갖추고 노래와 음악을 밤늦도록 하여, 오직 어버이의 즐거운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며 형제간에도 우애로써 화락한 나날을 보냈다. 또 집안에는 첩이나 종첩이 없으며 내실의 출입을 엄정하게 하고 하인 부림이 많아도 그것은 다 어버이 봉양하는 일과 내객의 접대하는 일 뿐이다. 공은 평생에 지기를 숭고하게 하고 품행을 돈독히 하며, 남의 선행을 보면 반드시 포장(褒奬)하되 만약 남의 불선한 행위를 보면 준엄하게 꾸짖어서, 비록 친구거나 동료간이라도 거리낌없이 배격하고 만약에 자복하고 개과하기로 하면, 대단히 기뻐서 전일보다 더욱 친애하지만 끝내 개전하지 못하거나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단연 절교하고 만다. 그러므로 공을 경모하는자 비록 많으나 또한 원망하는 자도 있다.
원래 술을 즐겨하지 않아 한잔도 다 하지 못하지만 늘 사람을 사랑하고 내객을 사랑하므로, 밤낮에 객실이 차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술을 서로 권하도록 하여 그 취하는 모습들을 즐겁게 보았다. 항상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동정심이 커서 남의 곤궁을 도웁는 데는 아까운 것이 없었다. 천성은 비록 호방하나 사색도 깊어서 내객이 없을 때면 단정히 앉아서 독서를 하며, 소화불량으로 신기가 피곤하면 투호(投壺)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여서 기분을 화창하게 하였다. 또 자처하기를 문사나 학자들의 흔히 있는 소갈병 때문에 차고 시원한 것을 잘 먹는 것과 같이 6월 유두일에 풍속대로 수단(水團)을 만들게 되면 그 꿀물을 단번에 두어대접씩 마시면서 말씀하기를 「오늘은 참으로 나의 명절이다. 옛날 송나라 악비(岳飛)장군으로 하여금 그의 평생소원이던 황용부(黃龍府)에 가서 술을 실컷 마시게 한다면 그 통쾌함이 이같을 것이다」라고 과장도 하였다.
공이 홍주판관에서 해임되어 돌아갈때 지방민으로서 수행하던 자가 고하기를, 「관고에 상납물과 토산물이 가득 차있으니 약간의 포목을 내어 포장 관혁이나 만들어 가지고 가십시요」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나의 서울·시골 두곳 집에는 필육이 썩을 판이고 곡식도 썩어가는 터이므로 포장 관혁 수십장이라도 한번 분부만 하면 만들어 낼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관고의 물건을 쓰겠는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관청의 것을 취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본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에 가산을 기울여서 군수비(軍需費)에 충당하므로 한 친척되는 사람이 공에게 권고하기를 「가재를 탕진하고 파산까지 하면서 의거만을 위한다면 불행한 자손들은 어디에 의지하리까? 조금이라도 남겨서 자손의 몫으로 하시지 않으렵니까」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옛날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이 평생을 자신만 돌보아 호사생활을 하다가 일단 의병을 일으켜 위(衛)나라로 들어간 후에는 과거의 습관을 버리었으므로 내가 늘 경모하거니와 그 외의 한(漢)나라 마원(馬援)의 수전노설(守錢虜說)이라든지 제(齊)나라 고환(高歡)의 재물이야기 같은 것을 지킬 수 있겠는가. 저들에게도 이러한 말이 있거늘 하물며 국난을 담당하려는 자로서 이미 그 신명을 망각할 처지에 어찌 여타의 것을 동의하겠는가, 또 만약 적들이 전국토를 유린한다면 남긴 재물이 자손의 것으로 되겠는가, 그대의 말과는 좀 동떨어지지만 후세에서는 충신의 자손이라고 할 것이니, 그러한 것을 남겨 주는것이 또한 후하지 않는가」하니 듣는자가 다 탄복하며 부끄러워 하였다.
원래 공의 가정은 대대로 빈한하였지만 외가인 박씨댁과 처가인 임씨댁은 백만장자이기 때문에 공이 어렸을 때부터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위하여는 극히 윤택한 생활을 해왔으나 일단 의병을 일으킨 후부터는 하졸들과 더불어 감고를 함께 하므로 휘하의 장병들이 다 죽기도 즐겨하고 원망이나 배반하는 자는 전혀 없었다. 공은 평생에 자신(自信)과 자주의식이 강하여 섣불리 사람을 사귀지 않거니와 피동적이거나 남의 비위만을 맞추려 하지 않으며 조금만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어떠한 권력자나 귀족에게도 이끌리지 않고 사람들 중에 경쟁심으로 자기를 누르려는 자가 있으면, 그를 상대로 함이 없이 다만 자신의 행동만을 삼가서 혹시 출입을 하더라도 친구의 경조인사라든지 형제간이나 측근자의 집을 방문할 뿐이었다. 벼슬에 있어서도 남보다 앞서려 하지 않았으니, 이러함은 세정에 배치되는 태도이며 환로(宦路)에 차질을 가져옴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허(詡) 극() 계(誡)이며 세딸의 서랑은 강극승(姜克承) 성준영(成俊英) 이희웅(李喜熊)이다. 장자인 허는 조정에 두차례나 상소하여 국가가 왜적과 화친을 통함은 부당하다고 적극 반대한 후 고향에 은거하여 조정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며, 특별 임용하는 명에도 취임하지 아니하다가 여생을 마친 후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허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맏인 세탁(世鐸)은 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을 지냈으며, 다음 세정(世鼎)은 문과 급제한 후 감사까지 역임하였다. 공의 차자인 극도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세언(世彦) 세걸(世傑)이다. 공의 막내아들 계는 교관으로 피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세영(世英) 세웅(世雄)이다. 또 공의 장서인 강극승은 독자 이경(履慶)을 두었고, 둘째 서랑 성준영도 독자 원(遠)을 두었는데 첨정이고 끝서랑 이희웅은 문과급제 후 현감으로 두 아들을 두었으니 시빈(時馪) 시겸(時馦)이다.
다음 세대로 허의 장자인 세탁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사혼(思渾)은 조졸하고, 사침(思沉)은 전 현감이고 욱()은 출계하고, 사충(思沖)은 조졸하였으며 허의 차자인 세정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사홍(思泓)이요 지평 사징(思澂)은 봉사(奉事)이다. 극의 장자 세언은 독자 동로(東老)를 두었고 차자인 세걸도 독자 사함(思涵)을 두었다. 계의 장자인 세영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사숙(思淑)은 감역이고, 사필(思泌) 사섭(思涉) 사한(思漢)이며 차자인 세웅도 네 아들을 두었으니 사윤(思潤) 사명(思溟) 사수(思洙) 사택(思澤)이다. 이밖의 내외증손 현손이하는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한다.

숙종정묘 1687년
의정부좌의정 외재 이단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