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의사묘정비명

彪義祠廟庭碑銘竝序
森西鶴星里有長川祠卽軍器寺僉正沈公友信俎豆之所也初創於 肅宗癸巳厥後配醉睡軒李公齊衡曁其子雙壺堂端錫盖醉睡曾莅靈光興學字民雙壺按節本道繼述趾美遺風餘韻猶有所不殺也 高宗戊辰未免於大同毁撤至癸卯就遺墟築壇竪碑李公後根澔以本道伯捐俸助之今距癸卯爲八十七年鄕多士與諸後孫積歲蓄力謀厥復元長川爲地甚僻且入軍營新設難於出入乃就沈氏世居之浮龜單享僉正而額以彪義彪義卽公擧義時旗號也祠下有貫日堂堂前立廟庭碑庸表景慕屬余爲文於乎出入是祠不詳公之事可乎乃就畏齋李相公端夏所撰公行狀檃括爲文曰公之先靑松人左政丞定安公德符領議政安孝公溫領議政恭肅公澮靑川君夷敬公瀚靑城君胡襄公順徑谷山郡守贈戶曹判書鐩爲公考以上曰己卯名人修撰贈吏判達源谷山公本生考也公容儀秀邁志氣倜儻受業于獨松申忠憲公磼讀書致病難於專工醫敎以射發無不中申忠壯砬來曰鳴劍夷吾亦男兒事爲國盡忠文武無異公再從兄巽庵義謙仲父畿伯銓又申此意公不得已遂業武登丁卯科時年二十四調宣傳官陞都摠都事壬申出爲甕津縣令時監司有非理公爭之觸怒遂棄私馬夜半馳歸因杜門謝世庚辰丁先公憂哀毁逾制服闋思菴朴相公以牧民御衆之才薦于朝除洪州判官黽勉赴任二年解歸連除平壤判官天安郡守皆不就庚寅除僉正赴任數月呈病遞職辛卯居母憂壬辰四月島夷來侵金元帥命元啓請公起復爲從事官公墨衰以從俄而金公罷兵赴行在公無所屬絜家歸通津轉到靈光農舍過先妣小祥謂所親曰吾旣出身許國一死決起復之後安敢爲全軀保妻子之計遂盡賣田宅家財私備軍粮軍器倡起義兵應從者衆與林豆春朴彦俊金富行崔寅丁忠訓金輔元諸公直至湖西破賊于淸州黃澗等地仍入水原禿城賊悉衆來攻公出奇兵挫其鋒賊不敢逼公曾於楊花戰陣遇倡義使金健齋約以同死生朝廷除公南陽府使兼鎭撫畿輔辭不就從倡義使南下與忠淸兵使黃進一時行軍共守晋州城公爲東門把守將張公潤守南門黃公與崔公慶會守西北相往來應援賊築於城中射破賊窟賊晝夜急攻砲丸如雨公與士卒隨力備禦賊亦多死而益添生兵我絶外援矢石亦盡黃張二公中丸而死城中氣喪賊亦盡銳登城南門先潰公見事急馳謁倡義使倡義使在矗石樓酌酒相酬曰同爲厲鬼殲盡此賊遂投身南江公曰我武人不可徒死背水射賊矢盡弓折北向四拜亦投水而死卽癸巳六月二十九日也城陷前二日作書付家僮之有智勇者達于靈光公子詡晝夜馳進炎霖連日積屍如山賊脫死人之衣服稍完者頓無可辨號哭遍閱不得公屍與金黃家諸人招魂而歸論者以公忠節比擬於唐之巡遠宋之江張公配林氏呈狀于備邊司曰家翁軍功忠烈俱著於前後狀啓而未蒙贈典地下冤抑無以伸之上命依所願施行贈判決事朝家錄勳只以原從一等盖公起義時疏侵軆相之玩寇失機故軆相嫌之至是主事拔公勤王時戰功及禿城三捷之狀也詡乃上書訟于朝金元帥又稱屈加贈兵曹叅判孝宗壬辰進士李章運等疏請合享于晋州彰烈祠至有令該曹稟處之批 肅宗壬辰自太學發通靈光略曰沈公貞忠大節卓立千古眞毅烈大丈夫也際當今歲自貴道宜有公議尙今寥寥可勝嘆哉幸須僉尊亟發淸論依前壬辰例齊聲叫閥期於贈諡賜額亦樹風激浪之一段明年長川祠成尙未得諡額士林稱屈降世愈切焉嗚呼公豈以殉死一節論者哉只知有國忘其身家忠之純矣日具三牲歌管竟夕孝之盡矣家無妾媵閨門嚴整刑之正矣輕財好施不憚已竭德之厚矣一毫無取不肖俯仰廉且直矣孫曾以下多登科第貽後裕而食報靡差也凡爲堂儒者顧瞻而飭躬焉則於扶植世道也豈曰無少補云 銘曰干城其才未及登庸兩相薦引或出或從居官廉公民蒙其澤倡義討賊殞身殉國長江滔滔白日皇皇褒奬爲吝云誰之掌公議千秋誦慕如昨立碑廟庭爲我顧諟

黃州 邊時淵 撰



표의사묘정비명병서(번역문)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에 장천사가 있었으니 곧 군기시첨정청송심공우신의 사당이다.
숙종계사(1713)년에 처음으로 창건하였는데 그 후에 취수헌(醉睡軒) 이제형(李齊衡)과 그 아들 쌍호당(雙壺堂) 단석(端錫)을 배향하였으니 취수헌이 일찍이 영광고을에 부임하여서 학당을 세우고 백성을 사랑하였는데 그 아들 쌍호당이 본도의 관찰사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진 정치를 하여 그의 끼친 교화와 공적이 전해지고 있다.
고종무진(1868)년에 대동철폐를 당하였으므로 계묘(1903)년에 철폐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이제형의 후손 근호가 본도백으로서 봉급을 털어서 보조하였으니 지금의 계묘까지는 87년이 되었다. 이 지역의 모든 유림과 여러 후손들이 여러해동안 힘을 모아 예전대로 복원하였는바 장천지대는 너무 벽지이고 또는 군용지로 편입된 까닭에 출입이 곤란케 되므로 심씨가 세거하는 마을 부구동으로 사묘를 옮기어 건축하고 첨정공을 단독으로 모시면서 표의사로 현판을 걸었으니 표의는 곧 공께서 의병을 모집할 때의 깃발의 칭호이다. 사묘아래 관일당이 있고 그 앞에 묘정비를 세워서 사모하는 뜻을 표현하고저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아아 이 사묘에 출입하면서 공의 사적을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
외재 이상공 단하가 지은 공의 행장을 참고로 기록하게 되었다. 공의 선대는 청송인으로 좌정승 정안공 덕부와  영의정  안효공 온과 영의정 공숙공 회와 청천군 이경공 한과 청성군 호양공 순경이 이름난 조상이다.
곡산군수 증호조판서 수는 공의 부친이니 기묘명인으로 수찬증이조판서달원은 곡산공의 생고이다. 공은 용모가 단아하고 기개가 출충한데 독송 신충헌공 잡의 문하에서 공부하는데 글을 읽다가 병이 생기어 공부하기가 어려움으로서 의원의 말대로 활 쏘기를 가르치니 백발백중 하였는데 신충장공 립이 와서 말하기를 검을 잡는 것도 역시 남아의 일이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데 문무가 다른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공의 재종형손암의겸과 중부경기도백전 또한 이런 의사를 강조하므로 공이 부득이 드디어 무술을 연마하여 정묘 무과에 급제하니 그때의 나이 24歲였다. 선전관이 되어서 도총부도사로 승진하였고 임신년에 외직으로 옹진현령이 되었는데 그때 감사에게 비리가 있으므로 공이 다투다가 감사의 노여움을 사게 되므로 드디어 말을 타고 밤중에 고향으로 달려와서는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였다.
경진년에 부친상사를 당하여 애통하기를 예도에 넘치게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다음에 사암 박상공 순께서 공은 나라에 중요한 재목이라고 하여 조정에 천거하므로 홍주판관에 제수되니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이어서 평양판관 천안군수에 제수되어서도 모두 그 부임을 하지 아니하였다.
경인년에 군기시첨정에 제수되어서는 부임한지 몇달만에 병으로 사직하였고 신묘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바 임진년 4월에 왜적이 침범하므로 김원수 명원이 장계하여 공을 상중에서 복직시켜 종사관으로 삼으니 공이 상복으로 종군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김상공이 군대를 해산하고 임금께서 파천하신 곳으로 달려가니 공의 소속이 없게 되었다. 가솔을 이끌고 통진으로 돌아갔다가 영광 농장으로 내려가서 모친의 소상을 치르고 친족에게 이르기를 내가 벌써 출신하여 나라에 한번 죽는 것으로 몸을 바치었는데 황차 상중에서 복직한 다음에 어찌 감히 내몸을 돌보고 처자 안보할 계책만을 할 것이겠는가 하면서 드디어 토지 가재를 모두 팔아서 군량 군기를 사사로히 준비하고 의병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임두춘, 박언준, 김부행, 최인, 정충훈, 김보원 등과 함께 곧바로 호서에 이르러 청주 황간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인하여 수원 독성에 들어갔는데 왜적이 구원병을 이끌고 와서 공격하므로 공께서 용감한 군대를 내어보내 적의 선봉을 무찌르니 왜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양화전진에서 창의사 김천일을 만나서 사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조정에서 공에게 남양도호부사로 경기도진무사를 겸하게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아니하고서 창의사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충청병사 황진과 함께 일시에 행군하여 진주성을 함께 지키는데 공은 동문파수장이 되고 장공은 남문을 지키고 황공과 최공경회는 서북문을 지키면서 서로 왕래하여 응원하게 되었다. 왜적이 동문밖에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산위에서 기거하면서 굽어보아 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공과 황공이 성가운데에 상대로 높게 구축하여 적군을 사격으로 격파하게 되었다.
왜적이 밤을 낮으로 급하게 공격해오니 탄환이 비오듯하는데 공이 사졸과 함께 진력해서 방어하므로 왜적도 역시 많이 죽게 되므로 적이 더욱 군졸을 많이 증원하게 되었다. 아군에서는 구원병을 절규하였으나 화살이 역시 다 되었고 황공과 장공이 탄환에 맞아 죽게 되니 성중에 장병의 기운이 꺾이었는데 적이 역시 힘을 다하여 성에 오르게 되니 남문이 먼저 무너지게 되었다.
공께서 사세의 급한 것을 보고 창의사에게 달려가니 창의사가 촉석루에서 술을 부어 서로 권하면서 이르기를 함께 여귀(厲鬼)가 되어 왜적을 모두 멸하자고 하면서 드디어 남강에 몸을 던지었는데 공은 이르기를 나는 무인으로서 보람없이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쏘아서 항거하다가 화살이 다하고 활이 꺾어지므로 북향사배하고 역시 물에 몸을 던지어 세상을 마치었으니 곧 계사년 6월29일이었다.
성이 함락되기 이틀전에 편지를 지혜와 용맹이 있는 종에게 부쳐보내서 영광 본집에 전하였는바 공의 아들 허가 밤을 낮으로 달려갔으나 여름 장마가 연일 계속되는 중에 전사한 시신을 발견할 수 없었다.
김공 황공 가족들과 함께 초혼을 하고 돌아왔다. 공론들이 공의 충절은 당나라 현종때 안록산 난리에 전사한 사람들과 송나라의 강만리 장귀가 원나라 군사가 침범한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에게 비유할 만하다고 하였다. 공의 부인 임씨가 비변사에 글월을 올려 이르기를 공의 공적의 충렬은 여러번 장계로서 모두 나타났는데도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지하에서 억울한 것을 펼길이 없습니다 라고 하여서 임금의 명령으로 원하는대로 시행하라고 하교되므로 조정에서 다만 원종일등으로만 기록되었으니 대개 공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도체찰사가 왜란을 방관만하여 기회를 잃었으므로 체찰사가 공의 전공을 시기하여 공의 전쟁공적과 독성(禿城)에서 세번 승전한 장계를 누락시켰기 때문이었다.
공의 아들 허가 글을 올리어 조정에 호소하고 김원수가 또한 억울하다고 하여서 병조참판의 증직을 더하였다.
효종 임진년에 진사 이장운 등이 진주창렬사에 배향하자고 상소로 청하여 해당 예조에서 품처하라는 비답이 있게 되었고 숙종 임진년에 태학으로부터 영광고을에 통문을 발송하였는데 대강 이르기를 심공의 위대한 충절은 천고에 우뚝 서게 되었으니 참으로 의연한 대장부이다.
금년을 당하여서 귀도로부터 의당 공의가 있을 것인데도 아직까지 잠잠하니 너무나 한스럽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빨리 상의하여서 전반 임진년 전례대로 일제히 조정에 호소하여 기어히 시호도 내리고 현판도 내리도록 한다면 역시 풍속교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장천사가 낙성되었으되 아직 시호와 현판을 받지 못하였으니 선비들의 억울한 것이 세월이 지나 갈수록 더욱 간절한 것이다. 아아 공은 어찌 나라를 위하여 전사한 한가지 일만으로 논할 것인가 다만 나라가 있는 것만을 알고 몸과 가정은 잊었으니 순수한 충성이요 어버이에게 날마다 식육으로 봉양하면서 음악으로 즐겁게 하여 드리니 극진한 효도이고 집안에 첩실이 없어 규문이 엄정하니 집안 법도가 바른 것이요 재물은 소홀하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여 자기의 곤궁은 탓하지 아니하였으니 후덕한 것이요 불의의 재물은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청렴하고 정직하였도다. 손증이하에 등과한 사람이 많으니 후대에게 음덕을 물려주어 후손들이 덕택을 입는것이 어김이 없는 것이다. 대체로 유림으로서는 이 사적을 돌아보고 자신을 격려한다면 세상교화를 세우는데 어찌 조그마한 도움이 없다할 것인가 명에 이르기를 나라의 중요한 재목으로 등용이 못되었는데 두 상공이 천거하여서 혹은 부임하기도 하고 사양도 하였다. 관직에 있어서 청렴공정하니 백성이 혜택을 입었도다.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나라에 몸을 바치었다.
강물은 유유하게 흘러가고 태양은 항상 빛나도다. 표창이 미치지 못하였으니 누구의 주관이냐 천추의 공론이 칭송사모하기를 영원하게 하리로다. 묘정에 비석을 세우니 우리의 모범이 되리로다.

단기 4322년 12월   일
황주 변시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