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서원과 의겸신도비명 |
월정서원 |
대사헌 휘 의겸 묘 안내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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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
大司憲靑陽君諱義謙神道碑銘
本朝自弘治戊午黨禍頻仍皆以小人而攻君子至于 宣廟之世則士流之中自分彼此人有得失禍及國家可勝歎哉其始也沈公諱義謙字方叔以舍人禀事於領相元衡適見金公孝元寢具在其甥室心有所疑及金公登第聲名日盛公屢遏淸選後金公又屢招公過未必有意於修隙也不幸浮薄之徒造言生事顯有分黨之漸栗谷李先生憂之建請兩出以爲鎭定之計公爲開城留守自是數年之間橫潰之勢日增月益時仁弘最嫉公爲掌令倡言公曾喪私親圖起復而不果欲劾公時栗谷爲大憲諭之曰必無是理仁弘不聽栗谷議於牛溪曰我不從德遠則必怒而去時輩必執此攻我我去則時事益不可爲勢湏從之德遠仁弘字也牛溪歎曰德遠起此風浪可恠也已栗谷畧搆啓草請罷公主意以爲身居戚里積失士類之心也栗谷謂仁弘此啓辭十分稱停一字不可加减仁弘唯唯翌日連啓添以援附士類等語 上問士類何人仁弘歷擧鄭松江澈諸人以對曰相與締結窺覘形勢栗谷大驚招仁弘責之曰何負也仁弘媿謝避嫌而遞當仁弘再啓也松江字栗谷而責之曰豈料吾輩死於叔獻之手乎栗谷笑謝曰吾見事遲爲人所賣然兄之責我不亦過乎乙酉仁弘之徒攻公不有餘力以及公之儕輩而一番士類無有得脫者至於栗谷牛溪兩先生幷書名天府殆如元祐之奸黨碑矣然後人不惟 公而亦知攻公者之爲人矣未幾公不勝喪而歿于丁亥九月得年五十三墓在坡山之紫谷里沈氏出自靑松麗氏朝有衛尉丞洪孚其後德符門下侍中靑城伯是生安孝公溫本朝 昭憲王后之考也歷二代舍人順門有名燕山朝其子領議政連源諡忠惠公又其子靑陵府院君諱鋼夫人李氏贈判書薱之女凡有十子 仁順王后第一公其第三也出後族父監察泓妣淸州韓氏盖沈氏貴顯異於他族忠惠公懼盛滿命諸孫名以謙而公亦自號巽庵云公文藝夙成年十七發觧二十一進士二十八捷文科由槐院歷注書說書禮曹佐郞司諫院正言入玉堂爲副修撰兼知製敎吏曹佐郞賜暇湖堂成均典籍兵曹正郞司憲府持平侍講院文學弘文館校理議政府檢詳舍人司憲府執義司諫院司諫副應敎諸司正典翰直提學陞通政爲承政院承旨自後周流吏禮兵刑工叅議大司諫判決事特陞大司憲則又歷工刑禮叅判漢城府右尹及爲開城留守則 宣廟乙亥歲也越二年移拜全羅監司瓜遞還朝則已無容足地歸臥坡山村舍庚辰以禮曹叅判復出爲咸鏡監司未幾辭遞帶散階仁弘主論至於兩司俱羅翌年壬午拜全州府尹李潑白惟讓等用事公與一時羣賢同罹文綱而公卒焉公氣岸濶達容貌魁偉律己甚嚴趨義如奔孝友恭儉出於天性以故雖居戚畹嫌逼之地而士流無不推重然攻斥戚畹自是好題目而又 宣廟屢有不悅公之語故强者喜命懦者承意爭相下手非以公爲眞有罪也當 明宣之際洗滌幽枉登崇俊良淸明之治後世莫及皆公之力也盧蘇齋自海上出來曰吾儕遭逢雖幸無乃有後弊乎亦不能無嫌於公也及乎 宣廟有曰吾欲法朱子入珥渾之黨而時人又以兩賢爲公之黨則公之黨甚有光華而從之者日衆矣當公之困滯也公歎曰我則雖百端困辱而他餘諸賢不爲擯斥則死無所恨矣亦可見忘己爲國之忠矣栗谷之隨僚議駁公盖欲鎭定紛挐保合異同而文元公金先生每言此一着雖出於一段誠心亦未知其何如也盖當初公與金公一時之爭皆無深意而至於末流魚爛河決栗谷牛溪皆爲奸黨而國事至於罔極者豈二公之心哉金公亦深歎之謂公曰吾二人者雖爲亂階而實相爲知己至其孫金判書世濂謂公諸孫曰人謂吾兩家爲世讐而實則世交也嗚呼吾猶及前輩風流其淳厚如此然而金公以亂雜中蒼黃徵事阻於淸選後之不能懲前也如此至於今日則又三分五裂國事愈不可爲此實公之罪人也夫人韓氏經歷興緖之女長男惀襲封靑平君次縣監贈領議政女適叅判尹愃靑平男翼世議政男應敎光世縣監挺世靑雲君命世府使長世安世弼世佐郞凞世四女適柳儁成汝容判書李植李承亨尹叅判男判書順之翊贊元之持平澄之郡守誼之今至五六世內外子孫不可殫記其顯者搢爲同樞檍樞爲僉樞樬爲府尹權爲翰林濡爲應敎外裔修撰李冕夏判書李端夏注書申儀華平陵君申範華校理申啓華同知成雲翰承旨李東溟承旨成虎徵正郞成虎臣副提學李畬而承嫡統者曰佐郞澂也四代孫若橫以諸宗人之意來請公銘余生也後不得詳公之世矣竊嘗見退溪先生嘗有稱道之語而以書勉公以國事曰戚里有賢國家之福也栗谷嘗白 上曰某外戚之佳者又曰其爲人也好善公之有功於世道而爲羣賢所賢如此至於後輩雖交口攻公亦未敢顯斥罪過而曰沈某固無可罪以戚畹久執權柄爲不可云以此論之則公之始卒可知矣銘曰 國運中否朝論陂倫初如涓滴終乃滔天謂公爲崇公不辭焉公歎曰余實有尤愆攻我太甚以及諸賢云胡不平俾國卒瘨我心慺慺我憂悁悁惟公秉心公耳國耳不人爲非不我爲是逡巡退聽任其拳踢安素坦焉是公偉量盖公初年功在扶陽如是而止義當益章匪公利昏而難央央眷戀王國卒以取敗苟原其心可幸無罪廉藺初乖賈寇終平是非利壞卒豈私爭徇源究委王國之楨惟是陝姦持公益急終爲大憝公名尤立同公受擯道德之尊公惟泯默理自聚分百世之後是非乃定我搨始終鐫于樹經 奉朝賀 宋時烈 撰 대사헌청양군휘의겸신도비명병서(번역문) 조선 무오(戊午:1498)년부터 당화(黨禍)가 잦았으니 다들 소인으로 인해 군자를 공략한 것이다. 선조의 대에 이르러서 선비들 중에서 스스로 저들과 우리라는 극한적 대립으로 득실을 가렸으니 장차 그 화가 국가에 미치게 되어 크게 탄식할 일이었다. 심공의 이름은 의겸(義謙)이고 자는 방숙(方叔)인데, 그 처음으로 사인(舍人)으로서 영의정인 윤원형(尹元衡)의 집으로 품의(稟議)할 일이 있어서 갔더니 마침 김효원(金孝元)의 침구가 그 집 사위의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의심스럽게 여겼는데 그 뒤 김공이 과거에 급제하고 명성이 날로 성대함에 공이 여러 번 막았고 벼슬길에 오른 뒤 김공(金公)이 여러 번 공을 초청했으나 반드시 사이를 좋게 하는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천박한 무리들이 말을 만들어서 일을 꾸미니 현저하게 분당(分黨)의 징조가 있었다. 율곡 이선생〔李栗谷〕께서 걱정이 되어 양쪽을 진정시키는 방도로써 지방으로 보내도록 청하여 공이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이로부터 수년간 횡궤(橫潰)①의 세력들이 날로 불어나고 달로 더해졌는데 이 때 정인홍(鄭仁弘)이 공을 가장 미워했다. 장령(掌令)의 직책으로 말을 꺼냈는데 공은 친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며 정인홍이 공을 탄핵하고자 할 때, 율곡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타일러공이 꼭 그렇지는 않다고 했으나 인홍이 듣지 않으니 율곡이 우계(牛溪)②에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덕원(德遠)에게 따르면 반드시 화를 내고 떠날 것이고 시배(時輩)③들은 이것을 잡고 나를 공격할 것이니 나마저 떠나게 되면 일들이 더욱 바람직한 모양이 아닐 것이오.』 덕원은 정인홍의 자(字)이고 우계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덕원이 이같은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 괴이합니다.』 그래서 율곡이 대략 계초(啓草)④를 잡아서 공에게 그만두게 하였으나 본뜻은 공이 척신(戚臣)⑤의 몸이어서 사림(士林)의 처지를 생각한 때문이다. 율곡이 이같은 계사(啓辭)의 내용을 인홍에게 말하고 시비를 그만두도록 당부하고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았더니 인홍이 그렇게 하자고 하고는 다음날 다시 계청을 이어서 덧붙여 있는 사류(士類)들을 갈라 놓아야 한다는 등 말이 첨가되니 임금께서 하문하셨다. 『사류란 어느 사람이냐.』 정인홍이 정송강 철(鄭松江 澈)과 몇 사람을 열거하며 대답하였다. 『이 사람들이 서로 형세를 엿보기로 체결했사옵니다.』 율곡이 크게 놀라며 인홍을 불러서 꾸짖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배신하시오.』 정인홍이 미안하게 여기며 체면상 말을 바꾸었다. 인홍이 재차 계청을 했을 때 송강이 율곡의 자(字)를 부르고 책망하며 말하였다. 『우리들이 숙헌(叔獻)⑥의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겠나.』 이에 율곡이 웃으면서 사과하여 말하였다. 『나의 일을 보는것이 더디어서 인홍에게 뒤졌으나 형(兄)이 나를 책망함이 또한 과하지 않은가.』 을유(乙酉:1585)년에 인홍의 무리가 공을 공격하다가 여력이 없어서 공의 친구들에게까지 이르니 일반 사류(士類)들도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서명(書名)이 풍부한 율곡과 우계 같은 양선생에까지 이르니 실로 원우(元祐)⑦의 간당과 같은 표적이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오직 공을 알되 공을 공격한 이는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공이 거상(居喪)을 이기지 못해 정해(丁亥:1587)년 9월에 죽으니 향연 53세이고 묘는 파산 시곡리(坡山 柴谷里)에 있다. 심씨는 청송으로부터 이어나왔는데 고려조에 위위승(衛尉丞)인 홍부(洪孚)라는 분이 있었고 그뒤 이름 덕부(德符)는 문하시중으로 청성백(靑城伯)이었고 이분이 아들 안효공(安孝公) 온(溫)을 낳았으니 조선 때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이다. 2대를 지나 사인(舍人) 순문은 연산군 때 유명했고 그의 아들 영의정 연원(連源)은 시호가 충혜공(忠惠公)이고 다시 그의 아들은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이름 강(鋼)인데 부인은 이씨이고 증판서 대(薱)의 딸이다. 무릇 열 자녀를 길렀으니 인순왕후(仁順王后)는 그 첫째이고 공은 셋째인데 종숙부인 감찰(監察) 홍(泓)의 양자가 되었으니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대개 심씨가 귀하게 드날려 타문보다 특이했으니 조부 충혜공께서 성(盛)해서 넘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손자들의 이름에 겸자(謙字)를 달았고 공도 또한 자호를 손암(巽庵)이라고 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주서(注書)와 설서(說書)를 지내고 예조좌랑(禮曹佐郞)과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옥당으로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했고 이조좌랑 때 사가(賜暇)⑧를 얻어 호당(湖堂)⑨에서 공부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과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持平) 시강원 문학(文學) 홍문관 교리(校理) 의정부 검상(檢詳) 사인(舍人) 사헌부 집의(執義) 사간원 사간(司諫) 부응교(副應敎) 및 여러 사(司)의 정(正),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등을 두루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이후부터는 이·예·병·형·공조(吏禮兵刑工曹)의 참의(叅議)를 두루 지내고 대사간(大司諫) 판결사(判決事)에서 대사헌(大司憲)으로 특승한 다음 다시 공·형·예조의 참판(叅判)과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과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으니 이 때가 선조 을해(乙亥:1575)년이었다. 2년이 지난 뒤에 전라감사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으로 돌아오니 이미 발붙일 곳이 없어서 파산(坡山)에 있는 시골집으로 돌아가 쉬었다. 五년 뒤인 경진(庚辰:1580)년에 예조참판으로 복귀했다가 함경도 감사로 나갔는데 오래 되지 않아 사퇴하게 되고 한가하게 지냈는데 정인홍이 조정 공론을 주장하고 양사(兩司)를 조정하였다. 二년 후 임오(壬午:1582)년에 전주 부윤으로 나갔는데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서 공과 한때의 훌륭했던 분들이 함께 문망(文網)⑩에 얽혀들었고 공이 병들어 죽었다. 공은 기질이 날카롭고 활달하며 용모가 우뚝하고 크며 자기 몸을 다스림이 몹시 엄하여 의롭게 나아가고자 했으며 효우(孝友)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은 천성에서 나타났다. 척신이었기에 더욱 의심받는 처지이나 선비들은 존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인척이었기에 배척을 당했다. 이로부터 좋은 일에도 선조께서 여러 차례 공의 말을 싫어하였다. 강한 자는 명령을 즐겨하고 나약한 자는 뜻을 받드는 까닭에 다툼이 있을 때 서로 손을 쓰나 공에게 진실로 죄가 있음은 아니다.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사이에 있어 시원찮은 인물은 갈아치우고 뛰어난 인재는 끌어 올려서 맑고 밝은 정치를 후세에서 따르지 못했으니 다 공의 힘이다. 노소재(盧蘇齋)⑪께서 해변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와서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은 다행이나 뒤에 무슨 폐단은 없을까?』 그러므로 역시 공에게 혐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 선조 대에 와서 말하였다. 『내가 주자학(朱子學)을 본받고자 이혼(珥渾)⑫의 당에 들어가고 싶으나 당시의 사람들이 이 두 분〔이율곡과 성우계〕을 공(公)의 당이라고 했으니 공의 당은 역시 빛나고 화려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불어났었다.』 공이 곤궁했을 때를 당하여 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비록 백 번 곤욕을 치르더라도 주위의 어진 이들만 배척하지 않으면 죽어도 한될 바가 없다.』 하였으니 역시 그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엿볼 수 있었다. 율곡께서 관료들을 따라서 공을 논박한 것은 대개 분란을 진정시키고자 함이며 내막은 그런 것이 아니다. 김문원(金文元) 선생께서 늘 말씀하기를 『이런 일들은 비록 한결 같은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일어났으나 뒤가 두렵다고 경계하였다.』 하였으니 대략 당초에 공과 김공의 한때의 다툼은 모두 깊은 뜻이 없었으나 종말에 가서는 고기들이 썩으니 물을 갈아야 될 판이었다. 율곡과 우계가 모두 간당을 위해서 국사가 이렇게 억망이 되었으나 어찌 두 분의 본마음이리오. 김공 또한 깊이 탄식하며 공에게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비록 어렵게 되었으나 실상은 좋은 사이였소이다.』 그의 손자인 김세렴(金世濂) 판서(判書)가 공의 여러 손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들은 우리 양가를 세수(世讎)⑬라고들 하나 실은 세교(世交)라고 하였다.』 아! 나와 전동료들의 풍류가 순후하기는 이와 같았으나 김공께서 난리중에 급박한 옥사로 인해 진출길이 막혔으니 이제와서 그 때 일을 징계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오늘날에 와서 다시 삼분오열(三分五裂)되어 국사가 더욱 어렵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공의 죄인이다. 공의 부인 한씨는 경력(經歷) 흥서(興緖)의 딸이었고 2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논(惀)은 청평군(靑平君)으로 습봉(襲封)⑭되고 차남 엄은 현감(縣監)인데 증영의정이고 딸은 참판인 윤선(尹챶)에게 시집갔다. 맏아들인 청평의 아들은 익세(翼世)이다. 둘째 아들 의정의 아들은 응교인 광세(光世)와 현감인 정세(挺世)와 청운군(靑雲君)인 명세(命世)와 부사인 장세(長世)와 안세(安世)와 필세(弼世)와 좌랑인 희세(凞世)이고 네 딸은 유준(柳儁)과, 성여용(成汝容)과, 판서인 이식(李植)과, 이승형(李承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인 윤참판의 아들은 판서인 순지(順之)와, 익찬(翊贊)인 원지(元之)와, 지평인 증지(澄之)와, 군수인 의지(誼之)이다. 지금 五, 六대에 이르러 내외자손을 다 기록할 수 없고 그 가운데 저명한 사람은 진(搢)이 동지중추부사이고 억(檍)과 추(樞)가 첨지중추부사이며 총(樬)이 부윤(府尹)이고 권(權)이 한림(翰林)이고 유(濡)가 응교이다. 외손에는 수찬(修撰)인 이면하(李冕夏)와, 판서인 이단하(李端夏)와, 주서(注書) 신의화(申儀華)와, 평릉군(平陵君) 신범화(申範華)와, 교리 신계화(申啓華)와, 동지사(同知事) 성운한(成雲翰)과, 승지 이동명(李東溟)과 성호징(成虎徵), 정랑 성호신(成虎臣), 부제학 이사(李畬)이며 적통을 이은 이는 좌랑인 징(澂)이다. 四대손인 약횡(若橫)이 집안 사람들의 뜻을 모아와서 공의 명을 부탁하니 내가 후세에 태어나서 공의 세대를 상세히 알지 못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찍이 퇴계 선생께서 도학의 말씀을 하시다가 공이 국사에 힘쓸 때 「척신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니 국가의 복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율곡이 일찍이 임금께 말씀드릴 때 이렇게 아뢰었다. 『심모(沈某)는 외척 중의 아름다운 자라. 그의 사람됨이 선행을 좋아한다.』 공은 세상에 유공한 일을 하고 군현(群賢)으로부터 어질다는 일컬음이 이와 같으나 후배들은 때때로 입을 모아 공을 공격하면서도 감히 죄과를 드러내어 헐뜯지는 못한다고 말하였다. 『심모(沈某)는 실로 죄될 만한 것은 없으나 인척으로서 오래도록 권세를 잡은 것이 옳지 못하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공의 일의 자초지종을 가히 알 것이다. 명(銘)에 이르되, 국운이 맞다 안맞다 하니 조정의 의론이 조리에 어긋나고 처음에는 방울물이더니 종내는 큰 물이 하늘까지 창일하네. 공에게 빌미를 돌려도 공은 사양하지 않고 공이 탄식하여 가로되 나에게 실로 허물이 있다고 하였네. 나를 헐뜯음이 극심하여 제현(諸賢)에게 미쳤으니 어찌나 불평이 많은지 나라가 병들었네. 내 마음은 슬프고 근심하여 편하지 않네. 오직 공의 마음 가짐은 공도(公道)와 국가뿐이니 남들을 그르다 아니하고 나를 옳다 아니했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기다렸으니 온갖 수모 감당했네. 평탄한 것을 편안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공의 위대한 아량일세. 대개 공의 초년에는 부조(扶助)에 공을 두었고 여기에 이르러서 그 뜻이 더욱 빛났다네. 공리에 어둡지 않았으니 어려운 일 잘 처리하고 왕국을 사랑했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했으니 진실로 그 마음에 기인하여 죄되지 않음이 다행일세. 염인(廉藺)⑮이 괴란시킨 것을 가구(賈寇)⑯가 평정하고 시비가 이해(利害)로써 무너졌으니 일찍이 사사다툼으로 마쳤네. 근원을 쫓아 끝을 탐구하니 왕국의 정간(楨榦)⑰일세. 오직 좁고 간악한 자가 공을 상대로 더욱 급박하니 마침내 원망만 남고 공의 이름 우뚝하게 섰네. 공이 함께 물리쳤으니 도덕으로 존귀하고 공은 입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나 이치는 자연스레 명분으로 모였다네. 백대가 지난 뒤에 시비가 안정되면 이 글 모두 베껴가서 비문으로 새기리라. 봉조하 송시열이 지음. 註① 횡궤(橫潰):횡포하고 어그러뜨림. ② 우계(牛溪):성혼(成渾)의 호(號)임. ③ 시배(時輩):당시의 무리. 즉 요직에 있는 상대당인들을 낮추어서 이른 말. ④ 계초(啓草):상소문의 초고. ⑤ 척신(戚臣):왕의 친인척이 되는 신하. ⑥ 숙헌(叔獻):율곡 이이(李珥)의 자(字)임. ⑦ 원우(元祐):중국 송(宋)나라의 연호. ⑧ 사가(賜暇):나라에서 공부를 시키기 위한 휴가. ⑨ 호당(湖堂):독서당 조정에서 젊고 유능한 관리들을 가려서 글을 읽게 하던 곳. ⑩ 문망(文網):상소문 등으로 인한 사건. ⑪ 노소재(盧蘇齋):노수신(盧守愼)의 호(號). ⑫ 이혼(珥渾):이는 이율곡의 이름이고 혼은 성우계의 이름임. ⑬ 세수(世讎):대를 이은 원수. ⑭ 습봉(襲封):전대에 있었던 봉작을 반복하여 봉했다는 뜻. ⑮ 염인(廉藺):중국 고사에 실린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⑯ 가구(賈寇):가의(賈誼)와 구천서(寇天픊). 중국 고사에 실린 현신. ⑰ 정간(楨榦):담을 칠 때 양쪽 모서리에 세우는 기둥나무. 즉 인재(人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