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현재기 |
갈현재 (내금위공 휘 황,
장사랑공 휘 원공 재실) |
嶠南有蔚山古稱名山大川矣人以地靈而賢士雄傑輩出五賢之首出近於此蔚然爲東方鄒魯之鄕矣山有舞龍雄盤西有文殊山聳立雲外後有含月山其下野巖而結成一局水有太和江東川江抱州流注於東海所謂蔚山二水三山之絶勝也其近有一村是靑松沈氏世居之地將仕郞叅奉公諱元恭爲吾林鄕案之首也有男諱渙號逸庵又號泉齋宣務郞公行蔚山敎授德行文章振輝一世而當玄默執徐之亂倡義討敵南民按堵讓功不受退去麗泉舊庄與鄕里諸子論禮講學上聞之除東萊梁山敎授不就又除本鄕敎授就任後孫構入鄕葛峴齋于舊庄歲人經亂燒失後再建又白虎亂追加住宅撤去後建立規模草裸後孫鳩財再建甲庚方求稀貴木材屋制則四間接大門中門垣墻造景等宏麗具備人之五福川壑盖鍾淑氣之精輪焉奐焉棟樑抛其上天之三光相應草木增籠瑞氣之彩登斯齋而望見則無衽席寸尺之前朝暮省楸之審無時不作屢世嘉謨懿範瞭然乎心目之間矣具不偉哉使見聞者孰不敢慕而誦且德哉祖其遺蔭孫能繼志是謂有其祖而有其孫也千秋祖先英靈陟降悅豫于其上百代雲仍日益煩盛則此非他門之艶羡者乎余雖才薄識淺感歎餘以蕪辭忘僭爲記云爾
甲戌 重陽 교남(지금의 영남)에 울산(蔚山)이 있으니 옛부터 명산대천(名山大川)이 있다고 일컬어왔다. 사람은 땅이 신령스러운데서 현사(賢士) 웅걸(雄傑)들이 배출(輩出)되는 것이다. 오현(五賢)의 으뜸인 분이 여기에서 가까운 慶州에서 출생하였으니 동방의 추로(鄒魯)의 향(鄕)이 된 것이다. 산으로는 무룡웅반(舞龍雄盤)이 있고 서쪽에는 문수산(文殊山)이 구름밖에까지 높이 솟아 있으며 뒤에는 함월산(含月山)이 있고 그 아래 야암(野岩)이 일국(一局)을 결성(結成)하여 물로는 태화강(太和江)과 동천강(東川江)이 있어 고을을 안고 흘러 동해로 들어가니 이른바 울산이 이수삼산(二水三山)의 절경(絶景)이다. 그 가까이 한 마을이 있으니 이곳이 청송심씨가 대대로 살아온 땅이다. 장사랑(將仕郞) 참봉공(叅奉公) 휘 원공(元恭)이 우리 유림(儒林) 향안(鄕案)의 수장(首長)이다. 아들의 휘는 환(渙)이요 호는 일암(逸庵)이며 또 하나의 호는 천재(泉齋)이다. 선무랑(宣務郞)으로 울산교수(蔚山敎授)를 지냈고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당시에 떨쳤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倡義)하여 적(敵)을 토벌하므로서 남쪽 백성을 안도시켰으나 공(功)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여천(麗泉)의 옛 집으로 퇴거(退去)하여 향리(鄕里)의 제자(諸子)와 더불어 논례강학(論禮講學)하니 위에서 듣고 동래(東萊) 양산(梁山) 교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또 본향(本鄕)의 교수에 임명되자 취임함에 후손들이 갈현재(葛峴齋)를 옛 집터에 세웠는데 난리를 겪어 소실(燒失)되었고 뒤에 재건(再建)하였더니 또 경인(庚寅)란에 소실되었으며 그 후 재건립하였으나 규모가 너무 초라하여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재중건하는데 7년동안 희귀한 목재를 구해 집을 마련하니 사칸접(四間接)이요 대문과 중문 담장 조경(造景)등을 하니 넓고 화려함을 모두 구비하였으며 인간의 오복(五福)을 갖추었고 냇물과 산골짜기가 자연의 맑은 기운을 모았고 산뜻한 집을 지어 들보를 올리니 하늘의 삼광(三光)이 서로 응하고 초목(草木)이 빛을 더하여 상서로운 빛이로다. 이 집에 을라가 바라보면 눈앞에 보이는것이 얼마 안되지만 아침 저녁으로 성묘을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여러대의 가모(嘉謨)와 의범(懿範)이 마음속에 느껴질 것이니 어찌 거륵하지 않으며 보고 듣는 사람 누구인들 사모하고 덕을 기리지 않으리오 할아버지는 그 덕을 끼쳐주고 손자는 뜻을 이어받는것이 그 할아버지가 있으므로 그 손자가 있는 것이다. 천추(千秋)에 조상의 영령(英靈)이 그 위에서 기뻐하며 오르내리고 자손이 날로 더욱 번성하면 이것이 타문(他門)의 부러워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재주가 없고 식견(識見)이 없지만 감탄한 나머지 거친 말로 외람하게 기(記)를 썼다.
갑술년 9월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