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현실기 |
4선생 유허비 |
靑松沈氏四賢實記序
夫居百年之後尙論百年之前所頼者文獻如其收拾不時或厄於兵燹斷篇爛簡在所審愼則乃傍證於輿地載錄各家叙述牽連湊合謂之實記者亦不得已之一例余於靑松氏家德見根基湥厚樹立宏偉不待言語文字而可傳於後者尙矣何也蓋忘世公之歷敭中外浩然歛退霽湖公之懷蘊道義棲遲外郡固知幾識勢君子所可能粤若 宣 仁壬丙之燹政宗社安危華夷倒置之日也雖在封彊官守之任有智謀機變者却顧遠走越視秦瘠者多矣而杜庵龜巖以眇然書生乃心王室或擧義討賊與有勞績或挺身赴難言事盡忠以至聖祖嘉奬廟堂收錄若少屑意進取高官顯職可端步致之乃一切謝去退老江湖若將終身至其臨絶遺命勿用丙子後官職者又龜巖之所獨也噫人之樂得富貴者其一時用物之多雖若可稱少焉則如飄風過耳浮雲過空惟名義二字亘古今貫上下有不與亡俱忘者若玆四公之爲則其所以激風節惇民彛無所爲而爲者一臠可以知全鼎一羽可以見全鳳又何必多乎哉祠舊在雪山縣龜巖之上中罹毁撤後孫繼澤景澤等收拾燼餘彙爲一編名曰四賢實記將以詔茫昧而飭悠久余遂表而出之以警夫世之讎視名義者 勉菴 崔益鉉 序 청송심씨사현실기서(번역문) 대저 백년의 뒤에 살면서 백년전 옛 사람의 언행(言行)과 인격(人格)을 논(論)할 때 믿을것은 문헌(文獻)이니 제때에 수습(收拾)하지 못하면 혹 병화(兵火)에서 재앙을 입어 책이 여러 조각이 되어 못쓰게 되는 것이니 그 사실을 찾으려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수록(收錄)된 자료에 의하여 방증(傍證)을 얻거나 여러 집에서 서술(敍述)한 글을 모아 쓴 것을 실기(實記)라고 말하였으니 또한 부득이한 일례(一例)이다. 내가 청송심씨를 세덕(世德)에서 보니 뿌리가 깊고 줄기가 커서 언행(言行)과 문자(文字)를 기다리지 않았어도 후세에 전하여진 것이 자랑할만 함은 무엇 때문일까 대개 망세정(忘世亭)공은 내외(內外)의 요직(要職)을 역임하였으나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정대(正大)한 뜻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고 제호정(霽湖亭)공은 도의(道義)를 지켜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서 살면서 진실로 기미(幾微)와 정세(情勢)를 알았으니 가히 군자(君子)가 될만하도다. 선조(宣祖) 때의 임진왜란과 인조(仁祖) 때의 병자호란은 정말로 나라의 안위(安危)에 우리나라와 오랑캐의 나라가 뒤바뀐 날이어서 그 당시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도 꾀를 내어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그 조짐을 보고 멀리 달아나 남의 일 보듯한 자가 많았는데 두암(杜庵)과 구암(龜巖)은 젊은 서생(書生)으로써 왕실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혹은 의병을 모아서 적을 쳐 공을 세웠고 혹은 난리에 앞장서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으로 부터 칭찬을 받아 조정에 알려졌으니 조금이라도 벼슬하려고 마음 먹었으면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도 지냈을 것인데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시골에서 늙어 장차 일생을 마치려하였고 그 임종(臨終)함에 이르러 자손들에게 유명(遺命)을 내려 병자년 이후에는 관직(官職)에 나가지 말라고 한것은 구암의 독특(獨特)한 바였다. 아아 부귀(富貴)를 얻어 즐기는 사람이 한때 일용할 물건이 많으면 비록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이 줄어들면 회오리바람과 뜬 구름처럼 없어지는 것이다. 오직 명의(名義) 두 글자는 고금상하(古今上下)를 통하여 없어지거나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사공(四公)의 행실과 같으니 그 거룩한 풍채와 절개를 떨치고 사람이 지켜야할 떳떳한 도리를 다하였으며 저민 고기 하나로 솥 전체의 맛을 낼줄 알고 날개의 깃 하나로 봉황새의 전 모양을 볼 수 있었으니 어찌 반드시 많아야만 되리오 사당이 옛날에 설산현(雪山縣) 구암(龜巖) 위에 있었으나 중간에 철거(撤去)되었더니 후손 계택(繼澤) 경택(景澤)등이 없어진 나머지에서 자료를 주어 모아 한권의 책을 만들고 사현실기(四賢實記)라 이름지어 장차 우매(愚昧)한 사람을 가르치고 깨우치려고 한지 오래였는데 내가 드디어 표출(表出)하여 세상에서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원수같이 보는 자들을 경계하노라. 면암 최익현이 서문을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