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사중건기 |
양계사 |
양계사:외삼문 |
定安公虛江沈先生巍勳碩德銘彛鼎垂汗靑後祿未艾趾美之盛稱於東方子而遁齋孫而愛菴二先生連以忠孝著聞于世允合尸祝於百世 憲宗卽祚之甲午士論齊發以遁齋杖屨之所也建祠于長城府馬嶺里上逮於定安下洎於愛菴幷享之此良溪祠所由興也 高宗戊辰有大同撤院之令而廢之鄕人士不忍於鞠茂 純宗丙午堂於其下而講會以寓存羊之義尋築壇舊墟而釋菜之旣又立碑記事後五十一年丁酉復建祠虔奉如儀於是乎三先生英靈陟降如在而籩豆有踐宛其昔時噫祠而墟墟而壇壇而復祠或間以四十三十五十之載廢短興仍至於廟貌重新生民好懿之彛不可誣也雖然盈虛相尋天之所不免况一字之木構而土曁者安可保不橐泐於無窮哉惟不變則雖毁可成雖廢可興有如今日可保於千百禩也登斯而駿奔者勿以復古爲幸樽俎爲能恒以孝弟忠信交相勉勵無負三先之風誼則豈徒爲此祠之幸也抑亦有補於風化矣敢以奉勗焉後孫壽澤氏致士之意命以記事之文不敢以陋拙辭己亥秋八月日幸州奇老章記
양계사중건기(번역문) 정안공 허강 심선생의 높은 공훈(功勳)과 큰 덕은 이정(彛鼎:종묘의 제기)에 새겨지고 역사에 전하여져서 복록(福祿)이 끊이지 않고 아름다운 덕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높았다. 아들 둔재와 손자 애암 두 선생이 연이어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지니 진실로 백세(百世)에 이르도록 제사지내는데 합당하도다. 헌종(憲宗) 갑오 1834년에 사림(士林)의 의론(議論)이 둔재공이 머물었던 곳에서 일제히 일어나 장성부마령리(長城府馬嶺里)에 삼대의 사당을 짓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으니 이것이 양계사를 짓게된 유래이다. 고종 무진년에 서원일제철폐령(書院一齊撤廢令)이 있어 폐지되니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차마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어 순종 병오년에 그 아래에 집을 짓고 모여 강(講)하며 옛 준례(準例)를 지키는 의(義)를 부쳐 옛 터를 찾아 단(壇)을 쌓고 간단하게 제사지내며 또 사적(事蹟)을 쓴 비(碑)를 세웠다. 그후 51년 정묘에 다시 사당을 지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제사지내니 세 선생의 영령(英靈)이 오르내리어 계시는것 같고 제사지내는 의식도 완연(宛然)히 옛날 같았으니 아아 사당이 빈 터가 되면 빈 터에 단을 쌓고 단을 쌓았다가 다시 사당을 지은 것이 혹 그 사이가 40년도 되고 30년도 되었으며 50년도 되었지마는 사당의 모양이 다시 새로워졌으니 백성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채우고 비우는 것은 하늘도 벗어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무로 얽고 흙으로 맥질한 집이 어떻게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보장하리오 오직 변하지 않는것은 헐어져도 고칠 수 있고 무너져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니 만약 오늘과 같다면 천백년까지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은 복구(復舊)하는 일만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을 말며 제사지내는 일만 능사(能事)라고 여기지 말고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써 항상 서로가 힘써서 세 선생의 유풍(遺風)을 저버리지 않으면 어찌 다만 이 사당만의 다행이리오 또한 세상을 교화(敎化)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니 감히 받들어 힘쓰지 않겠는가 후손 수택씨가 선비의 도리를 다하고 글을 지어달라고 하니 감히 글 못한다 사양치 못하고 위와같이 짓는다.
기해 1959년 8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