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사원류록서

論人之世觀元化之消息盈虛而不失其義者皆哲人君子也動而爲度言而爲法行而爲則後世秉彛之攸同者自爾景仰瞻慕以至于不忘則祭之於祠不亦宜乎此良溪祠所由作也當麗運訖虛江沈先生以濟世之才身都將相除殘殲凶居扶社之功而觀燮玩象天命有歸雖非王室至親而先生所處乃在箕微之間矣此義非孟子不能付垂名敎而先生能辦圖至今不失其令命其義甚難矣哉至第遁齋沈先生也則心儒跡佛而守義愛菴沈先生也則孝有格神忠淚染石兼之以文章皆可謂百世師表故 憲廟甲午建設祠宇戊戌賜額春秋俎豆芬苾斯馨而見撤於 高宗戊辰天也奈何然而儒林追慕之誠未챐少已故公論不息壇享繼作寔至于今不少衰也盖三先生以易地之致出處語默有不同而虛江公之不侑其功明哲保身尤非匹夫匹婦之所可量也之德之行必其出於至誠惻怛故二先生能紹述之各盡所處而令名無窮焉則今此誌良溪之擧也謂之以源流錄不亦可乎沈氏諸人皆純實無僞其於爲先殫悉誠力而無有遺憾視之於今誠非其難事歟醴源蘭根從以不誣益可驗矣則名錄源流固未爲不可也走是百不類人也焉敢冠名於此錄而沈雅壽澤謂我詳悉先生事實力請不啻一再故遂敍之如右歲己丑三月 日平陽朴魯烈撰

양계사원류록서(번역문)
사람의 세상보는 견해(見解)를 논(論)함에 천지(天地)의 큰 조화의 힘이 있던지 없던지간에 그 의(義)를 잃지 않는 사람은 모두 철인(哲人)과 군자(君子)인것이다. 움직임이 법에 맞고 말함이 법에 맞으며 행함이 법에 맞아 후세(後世)에 정도(正道)를 지키는 사람이 스스로 덕을 사모하고 우러러 보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것이 양계사(良溪祠)를 짓게 된 까닭이다. 고려가 망하자 허강(虛江) 심선생은 세상을 구제(救濟)할만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장수와 정승의 몸으로 잔흉(殘凶)을 섬멸(殲滅)하고 나라를 부호(扶護)하는 공을 세워 천명(天命)을 이태조에게 돌아가게 하였으니 비록 왕실의 지친(至親)은 아니더라도 선생의 처지(處地)는 기자(箕子:은(殷))나라의 태사(太師: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을 자주 간(諫)하다가 잡히어 종이 됨. 은나라가 망한 후 조선에 도망하여 기자조선을 창업(創業)하였다 함)와 미자(微子:은나라 주왕의 서형(庶兄). 이름은 계(啓) 주에게 여러차례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마침내 나라를 떠났음.
뒤에 주공(周公)이 주의 아들 무경(武庚)을 주벌(誅伐)하였을 때 미자를 송국(宋國)에 봉(封)하고 은나라의 여민(餘民)을 다스리게 하였음)의 사이는 될 것이다. 이 의(義)는 맹자(孟子)가 아니면 인륜(人倫)의 명분(名分)을 가르치는 것을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나 선생은 능히 사리(事理)를 명백하게 분석하여 지금까지 좋은 명예를 잃지 아니하였으니 그 의(義)를 지키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려나 둔재(遁齋) 심선생의 마음은 유교(儒敎)에 있었고 자취는 불교(佛敎)에 있었으나 의(義)를 지켰으며 애암(愛菴) 심선생은 충효사상이 투철하고 문장까지 겸하여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 일컬을만 하였으므로 헌종(憲宗) 갑오년에 사우(祠宇)를 지었고 무술년에 사액(賜額:임금이 서원(書院)등에 이름을 지어줌)되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오다가 고종 무진년에 사우가 철폐(撤廢)되었으니 하늘이여 어찌하렵니까 그러나 추모하는 정성은 조금도 그치지 않았고 공론(公論)도 쉬지 않고 일어나 단향(壇享)을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다. 대개 세 선생의 처지를 바꾸어 본다면 출처어묵(出處語默:나가 벼슬하는 일과 물러나 집에 있는 일과 의견을 발표하는 일과 침묵을 지키는 일. 곧 사람이 처세하는데 근본이 되는 일)이 같지 않으나 허강공의 공(功)은 명철보신(明哲保身: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여서 몸을 보전함)하였으니 더욱 필부필부(匹夫匹婦: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헤아릴 바가 아니며 덕행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매우 인자한데서 나왔으므로 두 선생이 능히 이어받아 각각 맡은 일을 다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무궁(無窮)하였으니 지금 이 양계사원록을 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심씨의 여러 사람들은 순실(純實)하고 거짓이 없어 그 위선(爲先)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유감이 없으니 지금 사람으로 보아 진실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물이 근원이 있고 나무가 근본이 있는 것을 거짓없이 더욱 징험할만하니 이 원류록을 짓는 것이 옳지 않음이 없으나 어찌 감히 원류록의 서문을 쓰리오마는 심수택(沈壽澤)이 상세하게 선생의 사실을 나에게 말한것이 한 두번이 아니므로 위와같이 서문을 지었다.

기축3월
평양 박노열이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