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사강당중수비문

昔在 高宗戊辰因執政奏大撤國以祠院長城之良溪亦不免焉鄕人士咸咨嗟不已更置當爲講學之所繼又壇焉碑焉至丁酉復設如儀自後有頹落金黃中金源益朴夏求沈宜豊諸公極力修補而命余記其實余以鄕後生義有所難辭者盖俎豆于是祠則靑松始之若虛江沈定安公德符知成州事遁齋繼年司憲監察愛菴涓三代也虛江之宿德嵬勳載在史乘不必更贅遁齋之物色補外投印歸遯愛菴之孝學但隆立朝淸直是可爲百世之師夫祠之義安在欲學其爲人苟使堂中之人果能守創始之本意春而絃夏而誦禮義以修其躬綱常以立其本庶有以振勵頹俗則松翁所謂儒學重熙之消息可拭目而俟之矣倘不以吾言爲妄耶左列出義人表諸來後云壬子正月日黃州邊時淵撰二十一代孫翰求謹書

양계사강당중수비문(번역문)

옛날 고종 무진년에 서원일제철폐령이 내렸는데 양계사도 또한 그 때 철폐되니 고을 인사(人士)들이 슬퍼하고 한탄하여 다시 강학(講學)하는 곳을 만들고 이어서 단(壇)을 쌓고 비(碑)를 세웠으며 정유년에 이르러 옛 모양으로 복구하여 짓고 그 후 퇴락(頹落)한 것을 김황중(金黃中) 김원익(金源益) 박하구(朴夏求) 심의풍(沈宜豊) 제공(諸公)이 극력수보(極力修補)하고 나에게 그 사실을 써 달라고 하니 내가 향후생(鄕後生)으로써 의리상 사양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이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분은 청송심씨 허강(虛江) 정안(定安) 덕부(德符)와 지성주사(知成州事) 둔재(遁齋) 계년(繼年)과 사헌감찰(司憲監察) 애암(愛菴) 연(涓)의 삼대(3代)이다. 허강의 오랜 덕망과 높은 공훈은 역사에 실려 있어 다시 말할 필요가 없고 둔재는 나라에서 찾아서 외직(外職)에 임명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숨었으며 애암은 효성과 학행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의 청직(淸直)함은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될만하니 강당을 짓는 의(義)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을 배우고자 하는데 있으니 진실로 당중(堂中)의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처음에 사당지은 본 뜻을 지켜 봄 여름으로 글을 읽고 예의로 그 몸을 닦으며 강상(綱常)으로 그 근본을 세워 퇴폐한 풍속을 바로 잡으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말한 바 유학(儒學)이 다시 밝아지는 소식에 눈을 씻고 기다릴 것이다. 아무려나 나의 말이 망녕된 것이나 아닌가 의인(義人)이 후세에 나와 주기를 기다린다.

임자년정월
황주 변시연이 짓고
1대손 한구가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