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서원유허비음기

청성백 휘 덕부 유허비


定安公沈先生諱德符遺墟碑幷序
陽溪書院遺墟碑陰記
長城之南馬嶺古珍原縣也嶺下有良溪書院卽沈虛江遁齋愛菴三先生二百年妥靈之地不幸中撤紳士之過遺墟者莫不齎嗟爰謀伐石以識之石旣具後孫沈君能九徼余一言余雖不文慕賢尙德本乎彛性不敢固辭謹按虛江公諱德符靑松人官麗朝爲門下贊成事封靑城府院君洎乎我 太祖高皇帝龍興以開國勳改封靑城伯拜左相諡定安其第三子諱繼年麗季官知成州事及革命托跡浮屠變名道生避地北靑太祖自微時聞其賢訪以物色累徵不就竟拿致之命補羅州到州卽投印 挈 家隱珍原山中號遁齋有子諱涓愛菴其號幼而聰敏成童能通經且篤孝遠近咸推重年十七聞 太祖晏駕登岩上痛哭石面盡赭人號其石曰淚血巖在今靑松縣 太宗朝登第 上以長松明月稱之除監察 命曰汝詢監于殿中彰善斥惡公對曰君禮臣忠都兪之治可復 上甚善之年  纔弱冠早卒嗚呼以虛江公之宿德元勳根深源遠篤生忠孝世趾厥義定可樹風百世宜其 享無替而物之成毁有數道之興廢有時院已撤而碑又出夫安知不因斯碑而有復院之理也耶姑書此而 竢之 光武十六年六月日正憲大夫湖南道觀察使原任弘文館博士奎章閣學士侍講院日講官陸軍副將延安李道宰謹記靑城伯十八代孫前成均館博士璿澤謹書

정안공심선생휘덕부유허비병서
양계서원유허비음기
장성군남면마령(長城郡南面馬嶺)은 옛날 진원현(珍原縣)으로서 산 아래에 양계서원(良溪書院)이 있었으니 즉 심허강(沈虛江) 둔재(遁齋) 애암(愛菴) 세 선생의 신주를 이백년동안 모셨던 곳이다. 불행히 중간에 철폐(撤廢)되어 이 유허(遺墟)를 지나가는 신사(紳士)들이 탄식하지 않는 사람 없었다. 이에 비석을 세움에 후손 심군 능구(能九)가 나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하니 내가 비록 글을 할줄 모르나 어진이를 사모하고 덕을 숭상(崇尙)하는 것이 인륜(人倫)에 근본을 두는 것이므로 굳이 사양할 수만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허강공의 휘는 덕부(德符)요 청송인이고 벼슬은 고려조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였고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이었다. 우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즉위(卽位)하시자 개국(開國)한 공(功)으로 청성백(靑城伯)에 고쳐 봉하여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다. 그 제삼자(第3子)의 휘는 계년(繼年)이니 고려말에 벼슬이 지성주사(知成州事)였는데 혁명(革命)이 일어나자 절에 숨어 살며 이름을 도생(道生)이라 고치고 북청(北靑)으로 피신(避身)하였다.
태조(太祖)가 임금되기 전부터 그가 어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물색(物色)하고 찾아서 여러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니 마침내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하자 나주에 도착하여 벼슬을 버리고 식구를 거느리어 진원(珍原)의 산속으로 숨어 살았으며 호는 둔재(遁齋)이다. 아들 연(涓)이 있으니 애암(愛菴)이 그의 호이고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여 십오륙세 때 능히 경서(經書)에 통달(通達)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원근(遠近)사람들이 모두 추중(推重)하였다. 나이 열일곱에 태조가 승하(昇遐)하였다는 말을 듣고 바위 위에 올라가 통곡(痛哭)하여 돌이 피빛으로 물드니 사람들이 그 바위를 누혈암(淚血巖)이라 불렀고 지금도 청송현에 있다. 태종조 때 문과에 급제하니 임금이 장송명월(長松明月)이라 칭찬하여 감찰(監察)에 임명하고 착함을 권장하고 악함을 물리치는 방법을 묻자 임금은 예의를 지키고 신하는 충성을 다하면 요(堯) 임금의 정치가 회복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옳다고 하였다. 나이 약관(弱冠)에 졸(卒)하니 아아 슬프도다 허강공의 오래도록 쌓은 덕망(德望)과 으뜸가는 공훈(功勳)으로써 뿌리가 깊고 근원(根源)이 멀며 충효를 독실히 하여 대대로 그 의(義)를 지켜 백세(百世)까지 전하였으니 마땅히 서원(書院)에 철향(腏享)되어야 하나 사물(事物)의 성패(成敗)에 운수(運數)가 있고 도(道)의 흥폐(興廢)에 때가 있는 법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비(碑)가 나올 수도 있으니 어찌 이 비라고 하여 복원(復院)하여서는 안될 이치가 있으리오 이에 기(記)를 쓴다.

광무16년 6월
정헌대부호 남도관찰사 원임홍문관박사 규장각학사시
강원일강관육군부장 연안이도재가 삼가짓고
청성백18대손 전성균관박사 선택이 삼가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