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정과 안분음

두산정 (2세조 휘 연 재실과 사당)
소재지: 경남 합천군 삼가면 두모리


安分祠(안분사)

옛날부터 영남지역에서 靑松 沈氏 후손(後孫)들은 합천군 삼가면 두모리에 소재(所在)한 두산정(杜山亭)에서 안분사(安分祠)사당을 마련하여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영남 각처에 거주하는 많은 문중 후손들이 참석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음덕(蔭德)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청송 심씨 두산정보존회에서 향사(享祀)를 주관하여 정성을 다해 봉행하고 있다.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의 행적(行蹟)에 시조 문림랑공(文林郞公:諱는 洪孚)께서는 두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자는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諱는 淵)이시고 차자는 봉익대부공(奉翊大夫公:휘는 晟)이시다.
지후공께서는 고려 말기에 궁중에서 조례(朝禮)와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청인 합문(閤門)에서 지후(祗侯:正7品) 벼슬을 지내셨으며 그 후 경상도 산청 현감(山淸 縣監)을 역임하셨다.
퇴임 후에는 산청 땅에 머물면서 석답촌(石畓村) 자연동(紫烟洞)에서 명예와 부귀를 버리시고 오로지 도학군자(道學君子)로서의 품위를 지키시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셨으며 그 곳에는 지금까지 망경대(望京臺)와 유허비(遺墟碑)등 여러 곳에 지후공 선조의 유적(遺蹟)이 남아 있으며 이 무렵 유명한 시(詩) 안분음(安分吟)을 남기셨다.
애석하게도 지후공의 생졸(生卒)년대와 배위(配位)의 성씨등은 실전되어 상세히 알 수 없으며 현재 후손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후공의 묘소는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全北 益山市 咸悅邑 南堂里)의 남당산(南堂山) 진좌(辰坐)에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셔 있다.

2006年 병술(丙戌) 3月 3日
成均館 典儀 東燮 謹記


杜山亭 重建記

우리 靑松沈氏는 東方의 大姓으로 수많은 宰相을 輩出하여 三韓甲族이라는 稱頌을 받아왔다. 高麗 忠肅王 때 閤門祗候를 지내신 沈淵 公은 文林郞 衛尉寺丞을 지내신 우리 靑松沈氏의 始祖 沈洪孚의 아드님이시다.
公은 後에 山陰縣監으로 出補하시어 善政으로 알려져 內職으로 陞差되셨으나 赴任치 않고 石沓村 紫烟洞에서 名利를 超脫하시어 安分吟을 읊으시고 林泉에서 悠悠自適하시던 道學君子셨다. 居處하시던 집 뒤의 山에 臺를 쌓고 가끔 올라 北쪽 開京을 向하여 나라의 安寧과 戀君之情으로 望拜하였으니, 後人이 이를 望京臺라 하였다. 公의 墓所가 山陰에 있었으나, 1377年 丁巳에 公의 손자 德符 元符 兄弟분이 益山의 咸悅 南堂山으로 遷葬하시었다.
五百餘年의 歲月이 흘러 慶南 地域 後孫들이 公의 杖屨遺蹟之地에 寓慕할 집도 하나 없다고 恨歎하다가, 드디어 慶南의 十餘 小宗中이 1916年 丙辰에 花樹契를 組織하여, 精誠을 모아 陜川 三嘉 斗毛里에 杜山亭을 建立하였다. 1934년 甲戌에 山淸 石沓村에 遺墟碑를, 1976年 丙辰에 三嘉 斗毛里에 安分祠를 세워 追遠報本의 誠意를 드러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江山이 十餘回 바뀜에 古屋이 頹落하여, 그 동안 漏水로 數次 補修하였으나 勘當치 못하고 엎어질 形便에 이르렀다. 이에 慶南 地域 宗人들이 여러 차례 모여서 論議하였으나 엄청난 補修費를 充當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중,  2002年 壬午에 後孫 義祚 丈이 陜川郡守에 當選되었고 그 뒤 再選의 榮光까지 안았다.
平素 崇祖敦族 精神이 透徹한 義祚 丈은 郡守로 在任中 盡力하여 杜山亭을 2005年 乙酉에 慶尙南道 文化財로 指定 登錄케 하였으며 總工事費 三億원을 들여 全面的으로 補修하였고, 狹小하던 祠宇 安分祠도 全面 改築 擴張하고 垣墻과 附帶施設도 堅固히 設置하였다.
아! 義祚 丈이 아니었던들 先祖들이 이룩해 놓은 追遠報本의 場이 자칫 사라질 危機에 처했던 것을 天地神明이 義祚 丈을 陜川郡守로 보내 重建케 한 것이다. 이에 힘을 얻은 後孫들은 靑松沈氏 宗報를 通해 祭需費 募金運動을 펼친 결과 大宗會를 비롯한 全國 宗人들의 뜨거운 精誠으로 조촐하게나마 祭享을 이어가게 되었고, 大宗會에서도 所定의 祭需費를 每年 支援키로 하였으니 實로 祖上을 섬기는 精誠이 하늘을 感動시켰다고 할 만하다. 이에 花樹契를 杜山亭保存會로 하고 重建事實을 記錄하여 남길 것을 不肖에게 請하니, 不肖가 不文으로 勘當할 수 없는 일이나 事實을 누구보다 昭詳히 알고 있기에 감히 辭讓치 못하고 大略을 記錄하여 後世의 考覽에 一助가 되게 하고자 한다.

2011年 辛卯 3月 3日
後孫 成均館 典儀, 晉州鄕校 典校 東燮 謹撰
金海 許洸永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