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령군수공(휘 정기)묘표


삭령군수공 휘 정기 묘소
소재지: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선영하


維我高祖考郡守公卒世之九十有餘年墓無碑玄孫樂洙記之石曰我沈氏籍靑松初顯於勝國始祖衛尉寺丞諱洪孚三世靑城伯諱德符入 我朝辭開國勳不受三世觀察使諱璿世祖朝退去號忘世亭三世左叅贊胡安公諱光彦號鈍庵三世監役 贈領議政諱偰是公曾祖也祖諱之源相 孝顯兩朝議政府領議政號晩沙考諱益善豊德府使妣淑人南陽洪氏掌令 贈領議政忠正公號花浦諱翼漢之女也公以 孝宗辛卯十月二十三日生始生異香滿室有奇夢錫名初諱廷俊改諱廷耆字台叟八歲通小學晩沙公奇愛之少爲士友所推重甲寅尤庵宋文正公時烈論禮爲黨人所搆竄公倡多士疏救之遂不赴擧庚申筮仕除 翼陵叅奉時公年三十欲不仕叔父靑平都尉責以奉檄義遂就內而掌樂院主簿通禮院引儀司導寺主簿敦寧府判官翊衛司衛率掌隸院司評司議外而懷德縣監溫陽朔寧郡守甲戌 仁顯王后復位選公敲匠郎禮成敍拜朔寧乙亥四月二十五日卒于官享年四十五公嘗以太淑人遺志裒集花浦公詩文謁尤翁爲序泣簌簌下序稱公宅相而期許之治郡縣多異蹟公妹婿趙忠翼公泰采嘗稱公長者有需世器甥侄太學士趙公觀彬銘公墓誌曰晩沙之忠花浦之節二祖之孫宜公之哲配淑人完山李氏 宣廟王子仁城君諱珙之孫海原君諱健之女豊山沈公闈之外孫也治家甚嚴生與公同年卒于戊子二月二十一日育一男諱師晩縣監娶宣敎郞李公觀朝之女育一男後娶學生洪重震女無育男諱東鎭弱冠人以公輔期早歿娶縣監崔公尙震之女育一男後娶郡守朴尙一女無育男諱亨雲早歿以孝孫 命旌閭娶左承旨金公槹之女生一男卽不肖樂洙文科壯元弘文館校理娶府使李思質女生二男一女男長魯崇進士娶都事李義述女次魯巖娶直長趙鎭寧女縣監公二女長適李錫勉繼子明源次適縣監任冕周子默樂洙女適權宜仁公無位無壽理固無徵先祖考先考兩世又早歿宗祀不絶如線樂洙孤苦不死幸有二子公之餘慶可筮祉百世也公墓議政公墓左寅原淑人쯊左立石爲表略記如右
玄孫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 敎兼 經筵侍讀官春秋館記事官中學敎授 樂洙 謹撰

16세조 삭녕군수공 휘 정기(廷耆) 묘표
우리 고조부 郡守公이 돌아가신지 90여년이 되도록 묘소에 비문이 없어서 현손 낙수가 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 沈氏는 본관이 靑松이며 처음 고려조에 현달하여 시조는 위위시승 휘 홍부(洪孚)요 3세를 전하여 청성백이니 휘 덕부(德符)로 우리 조선조에서 개국공신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3세를 전하여 관찰사 휘 선(璿)은 세조조 때 퇴거하여 호를 망세정(忘世亭)이라 하였다. 또 3세를 전하여 좌참찬 휘 광언(光彦)은 호가 둔암(鈍庵)이요 3세를 전하여 감역이며 영의정에 증직된 휘 설()은 公의 증조이고 할아버지의 휘 지원(之源)은 효종과 현종 두 임금을 도와 의정부 영의정이었으며 호가 만사(晩沙)이며 아버지의 휘는 익선(益善)으로 풍덕부사(豊德府使)이다. 어머니는 숙인 남양홍씨이니 장령이요 영의정에 증직된 忠正公이요 호는 화포(花浦)며 휘 익한(翼漢)의 따님이다.
公은 효종신묘 10월 23일에 태어났다. 처음 낳을 때 이상한 향기가 가득하고 기이(奇異)한 꿈을 꾸었으므로 처음 휘는 정준(廷俊)이라 하였다가 휘 정기(廷耆)로 고쳤고 자는 태수(台叟)이다. 여덟살에 소학에 통달하니 만사공이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으며 士友들의 추중하는 바 되었다. 甲寅(1674 顯宗15)年에 우암 宋文正公 時烈이 예론(禮論)으로 당인(黨人)들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감에 공이 여러 선비들에게 의리를 주창(主倡)하여 상소를 올려 구제하고 드디어 과거보는 일에 나가지 않았다가 庚申(1680 肅宗8)年에 처음 벼슬하여 익릉(翼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公이 나이 30으로 벼슬을 하려하지 않으니 숙부 청평도위(靑平都尉)가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여 내직으로는 장악원 주부와 통례원 인의와 사도시 주부와 돈녕부 판관과 익위사 위솔과 장예원 사평 사의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회덕현감과 온양 삭녕군수를 지냈으며 甲戌(1694 肅宗20)年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될 때 公이 호위하는 낭관(郎官)으로 선발되어 일을 마침에 삭녕군수에 임명되었고 乙亥(1695 肅宗21)年 4월 25일에 관(官)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45세였다. 公은 일찍이 숙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화포공의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우암선생을 뵙고 서문을 부탁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우암선생이 쓴 서문에 公의 집을 정승의 집이라 일컬었다. 公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많은 공적이 있었고 공의 매서(妹婿) 조충익공(趙忠翼公) 태채(泰采)가 公을 덕망이 있고 세상에 쓰일만한 그릇이라 칭찬하였고 생질 태학사 조공관빈이 公의 묘지문에 쓰기를 만사공의 충성과 화포공의 절개 두 할아버지의 손이니 마땅히 공과 같은 어진 분이 나신 것이라 하였다. 부인은 숙인 완산이씨로 선조(宣祖) 왕자 인성군 휘 공(珙)의 손이요 海原君 휘 건(健)의 따님이며 풍산심공 위(闈)의 외손이다.
집을 다스리는데 매우 엄하였고 公과 한해에 나시어 戊子(1708 肅宗34)年 2월 21일에 돌아가셨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휘 사만(師晩)으로 현감이요 선교랑 이공 관조(觀朝)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고 뒤에 학생 홍중진(洪重震)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무육이다. 아들 휘 東鎭은 20세에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일찍 돌아갔다.
현감 최공 상진(尙震)의 따님을 맞아 아들 하나를 두었고 뒤에 군수 박상일(朴尙一)의 따님을 맞아서는 무육이다. 아들 휘 형운(亨雲)은 일찍 돌아갔으나 효도로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좌승지 김공고(金公槹)의 따님을 맞아 아들 하나를 낳으니 즉 불초 樂洙이다. 문과에 장원하여 홍문관 교리요 부사 이사질(李思質)의 딸을 맞아 2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노숭(魯崇)이니 진사요 도사 이의술(李義述)의 딸을 맞았고 2남 노암(魯巖)은 직장 조진영(趙鎭寧)의 딸을 맞았다. 현감공이 2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이석면(李錫勉)의 계자 명원(明源)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현감 임면주(任冕周)의 아들 묵(默)에게 출가하였다. 樂洙의 딸은 권의인(權宜仁)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벼슬도 없고 수도 못하였으니 진실로 증거가 될만한 것이 없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두 대가 또 일찍 돌아갔으나 종사(宗祀)는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樂洙가 외롭고 고단하였으나 죽지 않고 다행히 아들 둘을 두었으니 公의 남은 경사가 백세까지 전하여 질 것이다. 공의 묘는 의정공의 묘 왼쪽 인좌원이요 숙인도 왼쪽에 합폄하고 묘표를 세우고 그 대략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손 통훈대부 행홍문관 교리 지제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사관 중학교수 낙수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