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원승공(휘 계택)행장


비서원승공(秘書院丞公) 휘(諱) 심계택(沈啓澤) 아호(雅號) 모동(慕東) 또는 명롱(明쫿)의 충군애민(忠君愛民)과 숭조목족(崇祖睦族)을 대본(大本)으로 하시던 그 고아(高雅)하신 덕풍(德風) 추모(追慕)하는 마음 간절하여 내 이제 미흡(未洽)하나마 차서(此書)를 간행(刊行)코자 하노라.
公은 평화(平和)스럽고 단란(團欒)하며 경제적(經濟的)으로도 다소 여유(多少 餘裕)도 있는 가규(家規)와 가세(家勢)를 지켜오던 통진(通津) 금 김포군양촌면구래리(今金浦郡陽村面九來里) 향제(鄕第)에서 辛酉(1861 哲宗 12)年 11月 25日에 탄생(誕生)하시고 사세(4歲)에 부친(父親)이신 학생공(學生公) 휘 의준(諱 宜駿)이 애절(哀切)하게도 향년 이십사세(享年 24歲)에 서세(逝世)하시어서 조부(祖父)님이신 도정공(都正公) 휘 능석(諱 能晳) 슬하(膝下)에서 성장(成長)하시는 동안 십칠세(17歲)때에 도정공(都正公)의 쉬신(晬辰)을 맞이하게 된 사실(事實)이 시문(詩文)에서 보이니 그 아버님을 모시지 못한 통한(痛恨)스러운 심정(心情)을 가(可)히 추측(推測)하고도 남음이 있다.
庚辰(1880 高宗 17)年 5月, 20歲에 초시(初試)에 급제(及第) 동년팔월(同年8月)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시고 戊子(1888 高宗 25)年 2月, 이십팔세(28歲)에 초출사(初出仕)로 통사랑 행 의금부도사(通仕郞 行 義禁府都事)에 나가시고 壬辰(1892 고종 29)年 8月 32歲에 경과정시문과(慶科庭試文科)에 급제(及第)하시어 동년구월(同年9月)에 옥당(玉堂)으로 통훈대부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제시독관 춘추관기주관(通訓大夫 行弘文館校理 知製敎兼 經筵侍讀官 春秋館記注官)이라는 벼슬에 나가신 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수찬(修撰) 사간원정언 헌납(司諫院正言 獻納) 겸(兼) 문신(文臣) 선전관(宣傳官) 병조좌랑(兵曹佐郞)에서 다시 정삼품 통정대부(正3品 通政大夫)로 진계(進階)하시며 비서원승(秘書院丞) 겸(兼) 장례원장례(掌隷院掌禮) 태의원소경(太醫院少卿) 등(等)을 역임(歷任)하시고 종이품 가선대부(從2品 嘉善大夫)로 승계(陞階)되시다.
회고(懷古)하건대 우리 가문(家門)에서는 1592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勃發)한 다음해인 1593年 계사하절(癸巳夏節)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陷落)하자 십삼대조(13代祖) 증 병참공(贈 兵參公) 휘(諱) 우신(友信)께서는 최후(最後)의 1人으로서 분전(奮戰)하시다가 장렬(壯烈)하게 순절(殉節)하시었으니 그 애국충정(愛國忠貞)은 이 민족(民族)의 천추구감(千秋龜鑑)이 되시었다. 그러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조정(朝廷)에서는 한 제상(宰相)의 혐의(嫌疑)하는 바로 因하여 어이없이 진주 창렬사(晉州 彰烈祠)에 봉안(奉安)의 은전(恩典)조차 받지 못 하실 뿐 아니라 사학적창달(史學的暢達) 조차도 애매(曖昧)하게 됨으로 후손(後孫)들의 원한(怨恨)이 참증(漸增)하여 지므로 국정(國政)에 참여(參與)할 의욕(意慾)도 없이 오로지 시서(詩書)로만 자적(自適)하시며 누대청빈(累代淸貧)하게 내려오던 중 십일대조 한림공 세탁(11代祖 翰林公 世鐸)의 형제(兄弟)분의 문과 이후 구대(文科以後 9代)만에 비서원승공(秘書院丞公)이 다시 등과(登科)하시어서 옥당(玉堂)과 대간등(臺諫等)을 누차연임(累次連任)하시는 등 영작(榮爵)으로 문중(門中)을 더욱 빛내시었다. 그 후(後) 국기(國基)가 크게 변혁(變革)함으로 공(公)께서는 벼슬을 사임(辭任)하시고 고향(故鄕)에 돌아오시어 조부모(祖父母)님과 편모(偏母)님을 모시고 극진(克盡)히 정성(精誠)껏 봉양(奉養)하시며 후생(後生)들 교육(敎育)에 주력(注力)하시었고 한편으로는 조상(祖上)님의 미덕(美德)과 빛나는 행적등(行蹟等)을 계발선양(啓發宣揚)하심과 동시(同時)에 침체(沉滯)되었던 족보발간(族譜發刊), 황폐(荒廢)되었던 선영보수 수호(先塋補修 守護) 등(等)에 열성(熱誠)을 경주(傾注)하시어서 선영(先塋)을 안보(安保), 가벌(家閥)을 선양(宣揚)하신 공적(功績)이 지대(至大)하시었고 또는 지방후진청소년(地方後進靑少年)들을 계몽(啓蒙)키 위하여 고향(故鄕)에 수천평(數千坪)의 대지(垈地)와 백여간(百餘間)의 교사(校舍)도 건축(建築)하여 분남학교(汾南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공(公)이 초대교장(初代校長)에 취임(就任)하시는 동시 교사진(同時 敎師陣)으로 교감(校監)에 이교환(李敎煥), 학감(學監)에 이기종(李驥鐘) 교사(敎師)에는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심선택(沈璿澤) 일본유학출신(日本留學出身)인 맹달호(孟達鎬) 당시 육군출신(當時 陸軍出身)인 장순원(張淳元)과 이문상(李文相) 이건성(李建星) 제씨(諸氏)를 초빙(招聘)하였으며 교육과정(敎育課程)으로는 고등과(高等科) 중등과(中等科) 초등과(初等科)의 삼과(三科)로 분(分)하여 삼년제졸업(3年制卒業)으로 정(定)하였고 학생 백여명(學生 百餘名)을 모집(募集)하여 규율(規律)있는 교육(敎育)을 시행(施行)하던 중(中) 1913年에 일정(日政)의 심(甚)한 간섭(干涉)으로 因하여 양곡보통학교(陽谷普通學校)에 통합(統合)을 전제(前提)로 폐교(廢校)케 되었다. 이제 공(公)이 편집(編輯)하시고 후손(後孫)에게 간곡(懇曲)한 유계(遺誡)를 담으신 가승서문(家乘序文)과 부제학공(副提學公) 행장문급문집중(行狀文及文集中)에서 수편(數編)의 서시문(序詩文) 또는 공(公)의 진적(眞蹟) 및 공(公)의 영결(永訣)을 애절(哀切)하게 통곡(慟哭)한 만사중(輓詞中)에서 약간편(若干編)을 번역 간행(刊行)하므로써 후생(後生)들에게 감명(感銘)깊게 하고자 하며 공(公)의 그 거룩하신 정성(精誠)을 계승(繼承)하여 봉행(奉行)치 못하는 불초손(不肖孫)은 항상(恒常) 송구(悚懼)스럽고 통탄불이(痛歎不已) 하는 바이다.
현하정부(現下政府)가 농지개발정책(農地開發政策)으로 수리관개등(水利灌漑等)을 설치(設置)함에 있어 묘소(墓所)를 침범(浸犯)하게 됨으로 차재(此際)에 선고(先考)께서 기왕(旣往)에 가족묘지설정(家族墓地設定)하신 김포군대곶면대능리장재정산사번지(金浦郡大串面大陵里長財井山四番地)에 소재(所在)한 령산(靈山)에 고조고(高祖考) 증조고형제분(曾祖考兄弟分), 조고(祖考), 숙부(叔父)님을 1978年 2月 20日에 면봉(緬奉)하고 석물(石物)도 설치(設置)하여 영령(英靈)의 안빙(安憑)하시기를 삼가 축원(祝願)하는 바이다.
본서간행(本書刊行)에 본번역문(本飜譯文) 교열(校閱)을 전(前) 서울대학교(大學校)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 김정록 교수(金正祿 敎授)께 청탁(請託)하였든바 김교수(金敎授)가 노경(老境)에 건강(健康)조차 여의(如意)치 못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쾌낙집필(快諾執筆)하신 노고(勞苦)에 충심(衷心)으로 감사(感謝)드리며 부산여자대학교(釜山女子大學校) 국어교육과(國語敎育科) 손팔주 교수(孫八洲 敎授)의 지도(指導)와 본서(本書)를 발간(發刊)하여 주신 보광문화연구원장 족숙 상필씨(普光文化硏究院長 族叔 相弼氏)께 만공(滿空)의 감사(感謝)를 드리는 바이다.
西紀1979年 己未 仲秋 日
不肖孫 章燮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