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포공(휘 예택) 묘표


公諱禮澤字致賢號竹圃姓沈氏靑松人高麗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上祖也 本朝靑城伯左政丞定安公諱德符 世宗國舅領議政靑川府院君安孝公諱溫翊戴佐理功臣領議政靑松府院君恭肅公諱澮蔭內資寺判官贈左贊成諱湲議政府舍人贈領議政諱順門左議政晩翠堂諱通源皆中世顯祖也諱興龜諱晉元諱能振諱宜綰高曾祖考也南陽洪以亨女妣也憲廟甲辰生 高宗己酉卒年也公天資淳實自幼受讀不待課督自勵季父公甚期待之旣長從權上舍金蘆隱燦斗學與沈校理宜奎朴夷南圭煥爲道義交互相講磨以成才器事親以誠瀡浟不乏親癠心憂色沮每夜禱辰竭誠及丁憂葬祭遵禮無違母喪身病不能起以未克隨喪爲千古罪人有終孝吟訓子說配鐵城李氏益煥女育三男二女男相成相旭相麟朴基銓趙鏞瓚婿也 孫男永燮長房出羲燮次房出洙燮季房出永燮子載泓餘不盡 咸安郡南巨洛里狐巖負甲原其藏也 永燮以夷南朴公狀請余表之余惟公窮居草茅讀書淑身莫自章見而終湮滅無稱然有遺稿在亦可謂不朽也已遂書此俾刻諸墓上
上章執徐秀葽節
成均進士 平山 申恪均 撰   

22세조 죽포심공 휘 예택(禮澤) 묘표
公의 諱는 예택(禮澤)이요 字는 치현(致賢)이며 號는 죽포(竹圃)이고 성은 沈씨요 청송인이며 고려조 문림랑 위위시승 휘 홍부(洪孚)가 시조이고, 조선조의 청성백 좌정승 정안공 휘 덕부(德符)와 世宗국구(國舅)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휘 온(溫)과 익대좌리공신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휘 회(澮)와 음직으로 내자시판관이요 좌찬성에 증직된 휘 원(湲)과 의정부사인이요 영의정에 증직된 휘 순문(順門)과 좌의정 만취당 휘 통원(通源)은 모두 중세(中世)의 현조(顯祖)이다. 휘 흥구(興龜)와 휘 진원(晉元)과 휘 능진(能振)과 휘 의관(宜綰)은 고조와 증조와 할아버지 아버지이고 남양홍이형(南陽洪以亨)의 따님은 어머니이다. 公은 甲辰(1844)년에 낳아 高宗 己酉(1909)년에 돌아가셨다. 타고난 자질이 순실(淳實)하여 어려서부터 글을 읽는데 공부를 하라고 감독하고 격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힘써 행하니 계부(季父)의 기대가 매우 컸다. 장성하여서는 권상사(權上舍) 후()와 김노은(金蘆隱) 찬두(燦斗)의 문하에서 배웠고 심교리(沈校理) 의규(宜奎)와 박이남(朴夷南) 규환(圭煥)과는 도의로 사귀어 서로 강구하고 연마하여 재주가 있어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아버지 병환에 마음으로 근심하고 얼굴빛이 변하여 밤마다 하늘에 비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데 예에 어긋남이 없더니 어머니의 상에는 신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여 상제노릇을 못하였으니 천고의 죄인이 되었다. 배위는 鐵城李氏 익환(益煥)의 따님으로 3男2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상성(相成)과 상욱(相旭)과 상인(相麟)이요 박기전(朴基銓)과 조용찬(趙鏞璨)은 사위다. 손남(孫男) 영섭(永燮)은 장남의 소생이요 의섭(義燮)은 2男의 소생이며 수섭(洙燮)은 3男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하며 함안군남거락리호암(咸安郡南巨洛里狐巖) 甲坐原은 그의 묘이다. 영섭이 이남 박공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墓表를 지어달라고 하니 나는 오직 공께서 초야(草野)에서 궁하게 살며 글을 읽으며 착하고 아름다운 분이었으나 스스로 나타내지 아니하여 끝내 인멸(湮滅)되고 말까하였더니 유고(遺稿)가 있어 또한 썩어 없어지지 아니하리로다. 드디어 이 비석에 써 墓위에 세우오라.
庚辰(1940)年 4월   일
성균진사 평산 신각균이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