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선생(휘 계택)묘갈

석전공 휘 계택 묘소
소재지: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산 29(송정산)

묘 비 석


公의 姓은 沈이요 諱는 계택(繼澤)이며 字는 여광(汝光)이요 號는 石田이며 本貫은 靑松이다.
始祖는 高麗 文林郞 諱 홍부(洪孚)이시며 그 後孫이 번성(蕃盛)하여 朝鮮朝에 3王后 13 政丞과 여러 忠孝名賢을 배출(輩出)하여 國利民福과 家門의 隆盛에 힘쓰셨기에 東方의 著姓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公은 그 始祖의 21代孫이시다.
公의 18代祖 諱 德符는 朝鮮朝 勳業으로 좌정승(左政丞) 靑城伯에 이르셨고 17代祖 諱 징(澄)은 仁壽府尹이시며 16代祖 諱 석준(石雋)은 軍資監判官이신데 戶曹判書에 贈職되셨고 시호(諡號)는 양혜공(良惠公)이며 15代祖 諱 선(璿)은 黃海 경기관찰사겸 영집현전대제학(京畿觀察使兼領集賢殿大提學)이신데 단종조(端宗朝) 장절명신(仗節名臣)으로 號를 망세정(忘世亭)이라 부르셨고 朝廷에서 數次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셨는데 後에 나라에서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領敦寧을 贈職하였으며 莊陵(端宗陵) 화소내(火巢內)에 公의 壇과 碑를 設置하였고 士林에서는 그 忠節을 追慕코자 군촌(涒村)에 구암사(龜巖祠)를 세우고 제사(祭祀)를 모셔왔다. 이 분의 後孫으로 霽湖亭 諱 광형(光亨) 杜菴公 諱 민겸(敏謙) 龜巖公 諱 민각(民覺) 세분이 先祖의 德義를 계승(繼承)하셨기에 同祠에 함께 모시니 世人들이 매우 부러워 하였다.
14代祖 諱 안지(安智)는 海州牧使이신데 兵曹叅判에 贈職되셨고 13代祖 諱 순(淳)은 어모장군(禦侮將軍) 通政大夫 敦寧府 都正이신데 처음으로 玉果에서 살기 始作하셨다. 12代祖 諱 광형(光亨) 號 霽湖亭은 孝行과 學問이 높아 중학훈도(中學訓導)에 특제(特除)되셨고 11代祖 諱 기(錡)는 軍資監直長이시며 10代祖 언겸(彦謙)은 同知中樞府事이시고 9代祖 諱 민각(民覺) 號 龜巖公은 영유현령(永柔縣令)이신데 仁祖甲子 괄란(适亂)때 호성공신(扈聖功臣)이시며 考諱는 노헌(魯憲)이신데 은덕불사(隱德不仕)하셨으며 妣는 金海金氏이신데 父는 재달(在達)이시다.
公은 辛亥(1851 哲宗)年 11月 28日生이신데 天性의 개결(介潔)이 家庭에 젖어 들도록 독실(篤實)하게 실천(實踐)하셨는데 더욱 효제(孝悌)에 根本을 두시고 친환(親患)에는 오래도록 해태(懈怠)함이 없이 정성을 다하셨다. 伯氏 수암공(睡菴公) 齊陵叅奉 諱 정택(晶澤)께서 往往 公을 불러 學業이 先府君의 平日 권학(勸學)의 뜻에 부응(副應)하지 못하니 더욱 힘쓰도록 권장(勸奬)하셨는데 이는 그 대기(大器)를 成就토록 하고자 함이시었다. 이에 公은 스스로 더욱 분발(奮發)하시어 크게 힘쓰시면서 혹 해득(或 解得)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니 學問이 날로 넓혀지고 德 또한 더욱 높아지셨다.
널리 家學의 源流를 記述하여 賢人들을 詳考하는데에 편하게 하셨으니 사현실기(四賢實記)와 수심재유고(收心齋遺稿) 두암공유사(杜岩公遺事) 심씨잠영록(沈氏簪纓錄) 삼강록(三綱錄) 각성세계록(各姓世系錄) 적선세가록(積善世家錄)등이 이것인데 이는 진실(眞實)로 우리 家門의 진보(珍寶)며 또한 수세(酬世)의 보감(寶監)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쪽 고을 人士들이 보기를 갈망(渴望)하고 사귀기를 원(願)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경서(經書)를 가지고 와 묻는 이에게는 지성(至誠)으로 가르쳐 始終 本末 上下 정조(精粗)를 남김없이 해득(解得)하고 돌아 가도록 하셨다.
當代의 名士 月城 최면암 익현(崔勉庵 益鉉) 연일 정소송 재건(延日 鄭小松 在建) 장수 황매천 현(長水 黃梅泉 玹) 행주 기송사 우만(幸州 奇松沙 宇萬)등 巨儒와도 종유(從遊)하시면서 書信往來 相面 담소(談笑) 작시음영(作詩吟詠) 등을 통하여 세태(世態)의 괴로움을 달래시면서 교의(交誼)를 더욱 돈독(敦篤)히 하셨다.
계속(繼續)해서 옥사의 변(變)이 있는지라 이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고 오직 한 두분의 知己와 對案 論書하시고 음다소일(飮茶消日) 하심으로써 울적(鬱寂)함을 해소(解消)시키셨다.
일찍이 石田號에 대한 자서(自敍)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로 쓸모가 없는 사람이어서 石田이라 號하였다고 겸손(謙遜)하셨다.
庚午年 10月 6日 享年 80에 考終하시니 立面 小紅山 午坐原에 安葬되셨다가 庚辰年에 이곳 石谷面 芳松里(松亭) 先山 寅坐原에 移葬되셨다.
配 豊川盧氏는 광연(光演)의 따님으로 才德을 겸비(兼備)하셨는데 庚戌 11月 21日 태어나셨고 辛丑 1月 5日 卒하시니 小紅山 巽坐에 安葬되셨다가 庚辰年에 考妣 合窆으로 移葬되셨다.
2男2女를 낳으시니 長子 諱 상철(相轍)은 伯父에게 出系하셨고 次子는 諱 상우(相祐)이며 따님은 金錫魯 崔東九를 맞이하셨고 諱 상우(相祐)는 長興高氏에게 장가드셔 3男을 낳으시니 諱 聖求 諱 賢求 諱 學求이다. 그밖에 內外 後孫은 數가 많아 다 收錄하지 아니한다.
公은 端正 剛直한 資質에다 學問의 工을 더하셨는데 시례 전모(詩禮 典謨)에 마음을 두시고 不正한 書는 일찍이 혹시라도 接하지 않으시니 따르는 사람은 사문(斯文)의 석학(碩學)들이었다.
효제이륜(孝悌彛倫)은 그 素行이며 가언선행(嘉言善行)은 그 붙잡음이신지라 혹 이를 붙잡지 못한 사람을 보시면 비록 부귀호권(富貴豪權)이라도 꾸짖어 바로 잡으셨고 조금이라도 이를 붙잡고 지키는 사람은 비록 검소(儉素)한 관(冠)을 쓰고 빈천(貧賤)한 衣服을 입은 사람이라도 일찍이 정성(精誠)껏 후하게 대접하시면서 칭찬(稱讚)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歲月이 흘러 公께서 서거(逝去)하신 지 벌써 70年이 지난지라 後孫들의 公의 높으신 행적(行蹟)을 추모(追慕)하는 마음 날로 더하여 이를 後世에 길이 傳하고자 합심헌성(合心獻誠)으로 이 碑를 세우다.
庚辰(2000)年 月 日
玄孫 愚慶이 咸陽 呂昌鉉氏가 지은 公의 行狀을 가지고 와 碑文을 請하기로
曾孫 前 谷城郡守 聖植 謹撰
玄孫 愚慶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