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릉참봉(휘 정택)행장


종사랑 제릉참봉 수암 휘 정택 묘소
소재지:곡성 입면 대장리 월등 구예동


二十二世祖 從士郞 齊陵參奉 睡庵 諱 晶澤 行狀
公諱晶澤字舜瑞睡庵號也 沈氏其先靑松人高麗文林郎諱洪孚其肇祖 靑城伯諱德符始入國朝左揆諡定安享良溪祠 忘世亭諱璿大提學莊陵末棄官自靖後贈領敦寧享龜巖祠都正諱淳家雪山霽湖諱光亨 有隱德 涵虛有亭以終其老亦享龜巖龜巖諱民覺縣監 仁祖甲子扈聖錄勳龜巖立祠盖公俎豆所也浩然亭諱世益取同産霽月世日子柱 子之高祖諱鼎鎭曾祖諱浩永祖諱樂侑考諱魯憲妣金海金氏父諱在遠公生 憲宗辛丑閏三月己卯日聰潁 背負一經過輒識其路幼不好弄又未見與羣兒關 才相學自知劬書 父母或威怒起孝敬以悅之莊重簡默諸同塾不敢慢易而爾汝 旣孤奉慈養兼志體嘗侍疾二十日不人見其翔矧迎醫合藥之外無餘事 親老幹家未克大肆力於學自言爲恨而記性過人 述作無窘能詩有聲 弟繼澤使之專業懇懇以先訓勸戒 或至涕沾襟雅言曰安身立命無別方言忠信行篤敬行於蠻貊夫子豈欺余 人有言人不善輒曰善言不可勝言不善之言寧睡不願聞吾睡爲庵勿復於我詩然後言 言必 依附經訓 義理昭著人自敬畏而倚重焉臨事必默運胸中審其可否而處之自無遺筭亦不自多於人 嘗大同撤院屢欷而歎曰斯文九六自此履霜遂板揭鄕先進朝夕瞻悵曰庶使後輩知所高景 鄕有柳月坡三綱門年久頹圮倡衆葺理聖廟墻 瓦爲奸豪撤取公忿歎通告竟致之法東徒初竊發入見地主歷陳不道之罪爲早絶根株之策 及其搶攘始服公先見 歲丙申宇萬妄意 討復通告列邑答檄之來議氣崢嶸問知爲公手草覰見其慷慨忠忿矣 嘗荒年族戚里閈傾儲而無所吝 有病飢不能興饋之米藿 肥雞得已其疾其家愈久感佩 又有賴公全活者至死不能忘遺囑其子以身報德厚澤之及人多如類 東西宗契以修敦睦范公義庄其揆一也 嘗修縣誌公以鄕望受委採摭增損條緖井井克協輿論 凡有宗事竪碑闡先皆以族望全委於公盖其信在言前綜理曲當故得人望有如此者 於是南來郡牧多造廬而致敬在朝紟紳有渴見而願交致書譴綣 欽尙其行已謹愼 擇地而蹈淸介冷淡爲南中高士盖實際也 皐唳聞天授齊陵參奉位非稱德而以仕非其日不自屑焉 享年六十八 卒於去戊申四月二十九日遠近知不知 樵牧婦孺皆歎惜其不享大耋逾月而葬縣之龜曳洞午坐 夫人迎日鄭氏 浣女先公五年而歿 葬同原丙坐 無男子子同産子相東後 四女適鄭在翰鄭尙源李起湖朴海然側出男相玉二女適梁在攝 吳巡燮公生先我五年幷世同省若將可接而匏繫 一方未及一造而取端晩與其季方遊得詳其志行 公生詩禮家擩染先訓德器宜早取而天稟秀郞 不見塵埃氣白面美鬚望之可愛言談擧止端重有威近之可敬 不曾謀居人上而人自趨於下風季方其知德者歟 儉於自奉奉祭潔敬賓朋之來如有文行則樂留而曷飮見人當戹雖非親信而苟吾可爲則 救解之靡遺力亦不使當人知之 口不道己之長 耳不聽人之短己有德忘之人有惠償之 和厚易直之氣 達於面貌每日晨興灑掃室堂門庭常潔淨淨此爲行已之大方大方如此細行可略 季方草事行屬筆於狀德老且病無堪 爲役而萍寓隣壤旣稔其世且感季方之不鄙 謹潤刪之如右以竢表隧者採焉
崇禎後五周 壬子
幸州 奇宇萬 撰 

22세조 종사랑 제릉참봉공 수암 휘 정택(晶澤) 행장
公의 휘는 晶澤이요 字는 순서(舜瑞)이며 수암(睡庵)은 號다.
沈氏는 그 先祖 靑松人인 고려 文林郞 휘 洪孚가 그 始祖이시다. 靑城伯 諱 德符는 처음으로 朝鮮朝에 들어 左政丞이 되셨으며 시호는 定安인데 양계사에 奉安되셨다.
忘世亭 휘 선(璿)은 대제학인데 端宗 末에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편히 지내셨다. 뒤에 영돈녕(領敦寧)에 증직되셨으며 귀암사(龜巖祠)에 奉安되셨다. 都正公 諱 淳은 雪山(玉果縣)에서 사셨고 제호정(霽湖亭) 휘 光亨은 隱德이 있으셨으며 涵虛亭을 지으시고 그 老年을 마치셨는데 귀암사에 또한 配享되셨다. 龜巖公 諱 民覺은 縣令이신데 仁祖 甲子 이괄(李适)의 亂때 王을 호종한 공훈이 기록되었으며 귀암사를 세워 공의 제사 모시는 곳으로 하였다. 호연정(浩然亭) 휘 世益은 동생 제월당(霽月堂) 世日의 아들 주석(柱磶)을 아들로 삼으셨고 高祖 휘는 정진(鼎鎭)이며 曾祖 휘는 浩永이고 考 휘는 魯憲이며 妣는 金海金氏인데 父는 在遠이시다.
公은 憲宗辛丑(1841年) 윤3월 己卯日에 낳으셨는데 총명함이 빼어나 등에 업혀 한번 지난 곳은 문득 그 길을 아셨으며 어려서도 농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한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관계함을 보지 못하였으며 재주가 上等이어서 배움에 힘든 글을 스스로 알고 부모가 혹 威怒(크게 화내심) 하시면 일어나 孝敬으로써 즐겁게 해드리시고 莊重하고 簡默하여 모든 同塾(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감히 만이(慢易:깔봄) 하지 아니하고 『자네』라고 호칭하면서 친근하게 지냈다. 이미 고자(孤子: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아들)가 되신 후 자당님을 받듬에 있어서 뜻과 몸을 겸하여 봉양하시면서 일찍이 병환을 모실 때 20일동안 그 잇몸을 내놓고 웃으신 것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였으며 의원을 맞이하여 약 쓰는 일 외는 다른 일을 함이 없으셨다. 어버이가 늙으셔서 家事를 맞게되자 능히 크게 학문에 힘쓰지 못하여 스스로 한이 된다고 말씀하시지만 기억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셨고 記述과 作詩 作文에 군색함이 없어 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으시다.
아우 繼澤으로 하여금 학업에 전념토록 하시고 간절히 선조의 가르침으로써 타이르며 훈계하시면서 더러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었다.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몸을 편안히 하고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보전하여 해치지 아니함에 다른 방법이 없고 말이 忠信하고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하면 미개한 오랑캐에서도 行世할 수 있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어찌 나를 속이리오 라고 하셨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善치 아니함을 말함이 있을 때에는 문득 말씀하시기를 착한(善)말도 가히 훌륭한 말이 아니거늘 不善의 말은 차라리 자우르며 듣고 싶지 않으므로 내 호를 수암(睡庵)이라 하였으니 다시는 나에게 말하지 말라하시고 때로 그러한 뒷 말씀을 하셨다. 말씀은 반드시 經書와 훈고(訓詁:古文 등 해석)에 의거하여 의리를 소상히 나타내시니 사람들이 스스로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묵묵히 가슴속에서 궁리하여 그 가부를 살피시고 처리하셨다. 스스로 유산이 없으니 또한 자연히 다른 사람보다 많치 않다고 하셨다. 일찍이 차별을 두지 아니하고 書院이 철폐되자 여러 차례 한심 쉬고 탄식하시면서 斯文의 96(9=양, 6=음)이 이로부터 서리를 밟게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드디어 鄕里에 揭示하고 조석으로 먼저 나아가 보고 한탄하시면서 후배로 하여금 높이 우러러 볼바 알기를 바래셨다. 향리에 柳月坡 三綱門이 있는데 年久하여 퇴비(頹圮)한 것을 여러 사람을 불러 수리하셨고 聖廟 담장 기와가 간악한 사람의 철거 절취(窃取)함이 되자 公은 분연히 탄식하시고 이를 관에 통고하여 마침내 법으로 다스렸다. 東學亂초에 도둑이 발생하여 地主에게 침입하여 나타나 不道의 죄를 늘어놓음을 겪으시면서 일찍 뿌리를 절단하는 책략을 만드셨는데 그 어수선함에 미치니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丙申年에 宇萬이 망녕된 마음으로 다시 토벌할 것을 列邑에 통고하니 격문에 대한 회답에 義氣가 쟁영(崢嶸:높고 높음)한데 公의 手草(손수 초안 한 것)임을 물어 알게 되었는바 그 강개하고 충분(忠忿)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일찍이 荒年에 일가 친척과 이한(마을)에 쌓아놓은 것을 기우름(救恤-빈민구호)에 인색함이 없었고 병들고 배고파 일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쌀과 미역과 살찐 닭을 먹이여 그 질병이 나음을 얻게 하시니 그 집에서는 오래도록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며 또 公에게 의뢰하여 살려서 목숨을 온전히 한 사람들이 죽도록 잊지 아니하고 그 자식에게 몸으로써 은덕을 갚으라고 유언으로 당부하니 그 두터운 혜택이 사람에게 미침이 이와 같음이 많았다.
東면과 西면의 종친계로써 돈목을 도모하시니 范公의 義庄(빈한한 친척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련한 땅)과 그 법도가 동일하다고 하겠다. 일찍이 縣誌를 修撰할 때 公은 鄕望으로 위임을 받아 채척(採摭:주어모음)과 增損에 條理와 絲端(실마리)이 질서정연하여 능히 여론에 맞았고 무릇 宗中일에 비를 세워 先祖를 천양함에 있어서 다 일가의 신망으로 오로지 공에게 위임되니 대개 그 신임은 말하기 전에 빠짐없이 일일이 도맡아 종합처리 함에 있음이니 다른 사람으로부터 信望을 얻은 것은 이와 같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남쪽으로 내려온 郡·牧이 많이 집에 이르러 경의를 표하였고 조정에 있는 선비와 벼슬아치들이 만나보기를 갈망하면서 사귀기를 원하였고 편지를 보내 극진히 그 행실의 근신함을 공경하고 숭앙하였다.
좋은 땅을 골라 밟고 지조가 깨끗하며 욕심이 없고 마음이 담박하여 남쪽의 높은 선비가 되셨는데 이 어찌 사실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 명성이 세상에 드러나 齊陵參奉에 임명되셨는데 지위는 德에 맞지 않았지만 가난 때문에 벼슬을 한 것이 아니고 道를 펴기 위하여 벼슬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경시하지 않으셨다. 향년 68歲에 지난 戊申年 4월 29일 돌아가시니 원근 친지나 알지 못하는 나무꾼과 목동과 부인과 어린이들까지 모두 그 대수(大壽)를 누리지 못하셨음을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달을 넘겨 고을의 귀예동(龜曳洞) 午坐에 안장되셨고 부인 迎日 鄭氏는 浣의 따님이신데 公보다 5년 먼저 작고하시니 같은 언덕 丙坐에 안장되셨다. 아들이 없어서 동생의 아들 相轍을 아들로 삼아 뒤를 이으셨으며 네 따님은 鄭在翰 鄭尙源 李起湖 朴海然에게 시집가고 側出아들은 相玉이고 두 따님은 梁在攝 吳巡燮에게 시집갔다.
公은 나보다 5年 먼저 출생하시어 아울러 세상을 같이 하시니 살피고 좇으며 또한 交接함이 오른 일이나 한쪽에서 쓸모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이어서 한번도 나아가 端雅함을 취하지 못하고 늦게 그 弟氏와 더불어 從遊하면서 자상하게 그 지조와 德行을 알게 되었다.
公은 詩禮家에서 태어나 선조의 가르침에 물들어 德器가 일찍 나아감에 마땅하셨는데 천품(天稟)이 빼어나고 명랑하시어 진애(塵埃:티끌) 기운을 보지 않으시고 흰 얼굴에 아름다운 턱수염을 바라보면 사랑스럽고 말씀과 거지(行動)가 단정하고 무거우며 위엄이 있어 가까이 하면 존경 스러웠다. 일찍이 사람 위에 앉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이 스스로 아래로 내려가는 위엄이 있으셨다고 하는데 弟氏는 그 德을 아는 분이다. 자신을 保養함에는 검소하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는 潔敬하셨으며 빈객과 벗이 왔을 때 文行이 있는 듯 하면 즐겨 만류(挽留)하여 어느 때고 마시고 사람이 액을 당한 것을 보면 비록 친하고 믿음이 있지 않아도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구제하며 해결해 주고 남은 힘을 다하고도 또한 당한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셨다. 입으로 자기의 장점을 말하지 않으시고 귀로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듣지 않으시고 자기의 德있음은 잊으시고 다른 사람의 혜택이 있으면 보답하시며 和氣와 厚德과 簡易와 정직한 기운이 면모에 나타나셨다. 매일새벽에 일어나 室堂과 門庭을 물 뿌리고 쓸어 항상 청결하고 깨끗하게 하셨다. 이것은 公의 行身의 큰 방법인데 大方(식견이 높은 사람)이 이와 같으니 細行은 생략함이 가하다.
弟氏가 사적과 행실의 초안을 만들어 狀德(行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데 내 늙고 또 병들었고 이웃 땅에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는지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이미 그 세상이 오래되고 또 제씨의 학문과 식견에 감동하여 삼가 이와 같이 윤산(潤刪:불리거나 깎음)하여 써 비문 지을 사람의 채택을 기다린다.
崇禎後 五周 壬子(西紀1912年)
幸州 奇宇萬 지음  
辛巳年 西紀2001年 12月 25日
曾孫 前 谷城 靈光 長興郡守 聖植 謹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