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관찰사공(휘 중량)기적


惟我靑松沈氏胄於麗朝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子諱淵閤門祗侯子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子諱德符三重大匡左侍中靑城郡忠義伯入李朝特進左議政錄功靑城伯  贈諡定安子諱溫領議政誕生  昭憲王后靑川府院君 贈諡安孝子諱澮領議政 贈諡恭肅靑松府院君連三世秉勻子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子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子諱逢源同知敦寧府事  贈左贊成子諱鍵承文院正字  贈領議政子諱喜壽左議政  贈諡文貞子諱昶溫陽郡守  贈吏曹判書子諱儒行文科執義  贈左贊成子諱梓判中樞府事於公之考妣貞敬夫人廣州李氏父諱象乾道事祖諱如圭判決事曾祖諱德馨領議政外祖姓諱柳公亮叅判文化人也公生于  孝宗戊戌十七歲  顯宗乙卯中成均生員丁酉登謁聖文科歷春秋館翰林弘文館校理吏曹正郞司憲府執義授通政出牧忠州治政在於邑誌守黃海道觀察使治蹟亦蔚然  英宗乙巳卒享年六十八名臣事業在於史冊奉先事蹟在於譜牒豈不偉乎公娶宗室麟坪大君之孫女再娶平康全氏縣監起漢女生三男一女男長受觀娶載寧李氏監司玄紀女生三男長成衍次益衍次鼎衍長男成衍叅於  英宗戊申之禍益衍亦被其禍後其四年庚戌遠竄其後二十六年乙亥時僻之禍又起受觀與其季子鼎衍同叅禍難一門慘極掃如無遺女適權叙經亦因此禍同堂沉滯豈不寃乎自是之後惟公之墓所不知何在成益鼎仕宦及配位姓貫無所考憑後裔有無不聞焉傍裔孫語輒抱恨者至于今日矣二男又觀三男大觀兩派雲仍因其時禍難隱匿遐鄕幸於往者庚申修譜時始現入錄豈非幸歟此亦公之餘蔭也又觀十四歲夭卒以姪益衍爲後益衍宥還後因居於全羅道益山地世代相傅大觀幼以避匿于  慶尙道奉化地亦世世相傅者兩派雲仍不下於數百今此同譜入錄而公之墓所曾在於春川郡北中面栗垈里前晦今顯有數奇焉昌運復回天佑而然嗣孫成衍無後是所可恨也
公之卒後四丙子九月上幹
從後孫 雨鉉 謹識

15세조 황해도관찰사 심공 휘 중량(仲良) 기적
우리 靑松沈氏는 고려조 文林郞 위위시승 휘 洪孚가 시조요 아들 휘 연(淵)은 합문지후였으며 아들 휘 용(龍)은 이조정랑이요 문하시중에 추봉되었고 아들 휘 덕부(德符)는 삼중대광 좌시중이요 청성군 충의백이었으며 이조에 들어와 좌의정에 특진되었고 공훈으로 청성백이요 시호는 정안공(定安公)이며 아들 휘 온(溫)은 영의정이요 소헌왕후를 탄생하였고 청천부원군이요 시호는 안효공(安孝公)이며 아들 휘 회(澮)는 영의정이요 시호는 공숙공이고 청송부원군이며 3대를 이어 정승으로 정권을 잡았다. 아들 휘 원(湲)은 내자시판관이요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아들 휘 순문(順門)은 의정부사인이요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휘 봉원(逢源)은 동지돈녕부사요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아들 휘 건(鍵)은 승문원정자요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휘 희수(喜壽)는 좌의정이요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며 아들 휘 창(昶)은 온양군수요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아들 휘 유행(儒行)은 문과급제하여 집의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휘 재(梓)는 판중추부사니 공에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광주이씨니 아버지는 휘 상건(象乾)으로 도사요 할아버지의 휘는 여규(如圭)니 판결사요 증조의 휘는 덕형(德馨)이니 영의정이요 외조는 참판 문화 유공량(柳公亮)이다. 公이 孝宗 戊戌年에 낳아 17세 되던해 현종 乙卯年에 성균생원시에 합격하였고 丁酉年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한림 홍문관 교리 이조정랑 사헌부 執義를 역임하고 통정이 되어 忠州牧使로 나가서 다스린 실적은 읍지에 실려있고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서 다스린 업적이 또한 많았고 영조 乙巳年에 돌아가니 향년이 68이요 명신의 사업은 역사책에 실려있고 조상을 받든 사적은 보첩에 실려 있으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하리오 公은 종실 인평대군 요(홏)의 손녀에게 장가들었고 재취는 평강전씨(平康全氏) 현감 기한(起漢)의 따님이다. 3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수관(受觀)으로 재령이씨 감사 현기(玄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성연(成衍)이요 2남은 익연(益衍)이며 3남은 정연(鼎衍)이다. 장남 성연은 英祖 戊申年 이인좌의 난에 참여하여 화를 당하였고 익연도 또한 그 화를 입고 그후 四년 庚戌年에 멀리 귀양갔고 그후 26년 乙亥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화가 또 일어나자 수관은 그 막내 아들 정연과 더불어 같이 화난(禍難)을 당하여 한집안이 참화(慘禍)로 싹 쓸어 한사람도 남지않고 권서경(權픊經)에게 시집간 딸도 또한 이 화로 인하여 한 당내(堂內)가 침체(沉滯)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리오 이후로부터 公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성연 익연 정연의 벼슬과 배위의 성관(性貫)도 고증할 길이 없고 후손이 있고 없는 것도 알 수 없으니 방후손(傍後孫)이 한을 품고 오늘에 이르렀다 2남 우관(又觀) 3남 대관(大觀) 양파의 자손은 그때 화난으로 인하여 먼 시골에 숨었으므로 다행히 지난 庚申年 수보할 때 비로소 와서 족보에 들어왔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또한 公의 남은 음덕이다. 우관이 14세에 조졸하여 조카 익연(益衍)을 양자로 삼았고 익연은 죄에서 풀린 후에 전라도 익산에 살 때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왔고 대관은 어렸을 때 경상도 봉화에 피하여 숨어살며 또한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오고 있어 두 파의 자손 수백명이 지금 이 족보에 들어있고 公의 묘소가 일찍이 춘천군 북중면 율대리(春川郡北中面栗垈里)에 있는 것을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나타났으니 기이(奇異)한 운수요 창성한 운이 회복되고 하늘이 도와서 그런 것이며 사손(嗣孫) 성연이 무후된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공이 돌아가신후 네 번째 병자년 9월 상순에
종후손 우현(雨鉉)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