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판서공(휘 풍지)묘표


예조판서공 휘 풍지 묘소
소재지:료당면 수촌

묘 비 석


十九世祖 贈左贊成 諡 貞簡 副提學 禮曹判書公 諱 豐之 墓表
先府君諱豐之字士常沈氏系出靑松高麗衛尉丞諱洪孚之後入我 朝自靑城伯諱德符至靑陵府院君諱鋼凡七代四世台輔兩世 國舅八代祖諱義謙大司憲靑陽君仕 明宣間持名義爲士林領袖七代祖諱 玉果縣監 贈領議政出繼溫陽郡守 贈左承旨諱仁謙六代祖諱光世弘文館應敎 贈吏曹參判曾祖諱涑 贈領議政祖諱宅賢吏曹判書諡淸獻 英宗初年不主蕩平論淸議推重考諱銶永川郡守 贈吏曹判書妣貞夫人安東權氏判官諱擢女府君以 英宗戊午七月一日生辛卯中庭試文科隸槐院自說書歷三司春坊掌試湖南 正宗御極爲北評事丁酉按廉關東兼慰諭御史拜吏曹佐郞正郞檢詳東學漢學敎授遷應敎乞養爲醴泉郡守庚子陞授同副承旨轉至左歷吏禮曹參議丁內憂服闋連除敦寧府都正兵曹參議大司成大司諫都承旨癸卯陞嘉善爲戶兵刑曹參判右尹同知中樞春秋舘義禁府事副摠管承文院備邊提調轉吏曹參判副提學大司憲同  經筵同成均屢無寺院署監提調而爲知申亞銓最多且又出爲洪忠道觀察使入拜禮工曹參判丁未由知申進秩授內醫提調知中樞兼都承旨戊申冬拜禮曹判書都摠管改知敦寧  經筵春秋퉓義禁府事己酉春以風痺示憊癸丑五月二十九日卒以病未造  朝正廟常記念不置  賜珍劑而問訊頻繁屢除宗伯工判判尹皆不拜至辛亥特授都摠管諭以扶腋入對感激 恩數力疾癸 筵積違戀結涕淚先迸 聖心憫憫及訃 
聞輟朝致賻弔祭 朝野嗟惜位不克德府君性根忠孝事母夫人雖年位己高而侍側服勤等於婢使洞洞屬屬不替人以勞柔聲婉容先意承順誠意藹然恒若不及此誠養志之孝居憂而哀毁踰節一如前喪立 朝而受 正廟殊遇公而忘私身不自有自丁未秋至戊申冬直宿藥院以 邦慶之遲憂勞成疾雖甚危篤而戀 闕憂 國之語發於夢寢  正廟嘗書賜頎頎而長休休之風八字俾篇室凡賜標紙輒書頎頎齋而不以名也在三司銀臺論 啓奉對明白剴切至於義理關頭秉執堅確雖 天威赫然反覆爭難終始不撓天姿純粹操重持論公平而務爲調停律己謹嚴而不受于謁雅尙恬簡不喜芬華榮塗進取心如水淡室宇僅蔽風雨几案絶無玩好巷無車馬門絶苞苴蕪居莊穆未可以狎進內外官廉潔公明謹守法度不踰繩尺 正廟每褒以如玉其人卒後愈復思之曰粹白如其人者固未易其風儀亦不可復見於今金忠文公祖淳撰諡狀曰公愛君憂國之誠有炳然不可泯者貞而自守簡而不染不以所處隨移世以爲知言嗚呼府君言行著顯於世上有 聖諭褒美下爲國人誦慕則小子何敢私爲之說只撮錄立 朝大畧而不盡叙葬于公州水村負寅之原先妣貞夫人杞溪兪氏考諱彦銖郡守祖諱拓基領議政諡文翼以庚申六月六日生癸酉歸于先府君甲子九月十六日卒哲範懿行宗黨咸頌葬祔先君墓左不肖男能岳忝從一品職  贈先府君左贊成先妣貞敬夫人男長能直成均生員次不肖能岳前吏曹判書次能達女適判書李魯益牧使徐任輔能直以能達子郡守宜晩爲後女適參判金興根能岳子宜臣今忠淸監司出爲從兄能述後次宜隣成均生員女適承旨金東健能達繼子宜冕今參奉女適生員趙恩植宜晩子起澤宜臣子英澤宜隣四子一女長勳澤次舜澤餘幷幼李魯益繼子說書福信徐任輔繼子經淳金東健子進士敎性餘幷不錄
崇禎紀元後二百十年丁酉七月 日
不肖男 能岳 泣血 謹記
前面集石峯韓濩字陰記集塘顔魯公眞卿字
獻官禮曹正郞吳錫齡大祝校書判校李顯采祝史禮賓直長尹枰齋郞繕工副奉事柳之司儀引儀鄭煥恭
搢笏于朝有頎其儀淸獻爲祖謹畏自持奧在春坊實垂予眷歷佐銓衡遂長瀛選七條陳章懋乃嘉言恒居近密若飮以醇寒更守閤所秉者義旋爲宗伯欲汝大試在卿遭逢於古亦罕櫪騏摧眉長途未半何處得來型範莫覿禮官酹觴庶其歆格

19세조 증좌찬성 시 정간 부제학 예조판서공 휘 풍지(豐之) 묘표
先府君의 휘는 풍지(豐之)요, 字는 사상(士常)이다. 沈氏는 계통이 靑松에서 나왔고 고려 때 위위승 휘 홍부(洪孚)의 후손이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청성백 휘 덕부(德符)로부터 청릉부원군 휘 강(鋼)에 이르기까지 7대 동안에 네 분이 정승이요, 두 분이 국구(國舅)였다. 8대조의 휘 의겸(義謙)은 벼슬이 대사헌이요, 靑陽君에 봉하여졌으며 명종과 선조 시대에 명분을 지켜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7대조의 휘 엄()은 玉果현감을 지냈으며 영의정을 증직받았고 溫陽군수요 좌승지에 증직된 휘 인겸(仁謙)에게 출계하였다. 6대조의 휘 光世는 홍문관 응교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의 휘 속(涑)은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할아버지의 휘 택현(宅賢)은 이조판서요 시호가 청헌(淸獻)이며 영조 초년에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지 아니하여 청의(淸議)로 추중(推重)받았고, 아버지의 휘 구(銶)는 永川군수요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 權氏니 판관 휘 탁(擢)의 따님이다. 부군이 영조 戊午(1738)年 7月 1日에 출생하여 辛卯年(177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고 설서(說書)로부터 三司와 세자시강원을 거쳐 호남의 장시관(掌試官)이 되었다. 正祖가 즉위하자 북평사(北評事)가 되었고, 丁酉年(1777)에 관동(關東)지방의 안렴사(按廉使)겸 위유어사(慰諭御史)가 되었으며 이조좌랑, 정랑, 검상(檢詳) 동학(東學) 한학(漢學) 교수가 되었다가 應敎에 옮겼고 父母 봉양을 위하여 예천(醴泉)군수에 나갔으며 庚子年(1780)에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어 좌승지에 전임(轉任)하였다가 예조참의를 지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복을 마치자 연이어 돈녕부도정, 병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癸卯년에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호조, 병조, 형조참판, 右尹, 동지중추, 춘추관. 의금부사, 부총관, 승문원, 비변 제조(備邊 提調)를 거쳐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동 경연(同 經筵), 동 성균(同 成均)이 되었다. 여러번에 걸쳐 시(寺)·원(院)과 서(署)의 감(監)과 제조(提調)와 도승지가 되었는데 이조참판으로 재직한 것이 가장 많았다.
또한 홍충도(洪忠道: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고 들어와서 예조·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丁未年(1787)에 지신사(知申事)에서 승진하여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와 지중추겸 도승지가 되었다가 戊申年 겨울에 예조판서, 도총관이 되고 지돈녕, 경연춘추관, 의금부사가 되었다.
己酉(1789)年 봄에 풍비(風)①로 피곤함을 보이다가 癸丑(1793)年 5月 29日에 卒하였다. 일찍이 병으로 인하여 조회에 나가지 못하니 정조(正祖)께서 항상 생각을 놓지 아니하시고 진기한 약제를 보내고 병세를 묻기 여러번 하였다. 종백(宗伯)과 공조판서 판윤 등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못했다. 辛亥(1791)年에 와서 특별히 도총관에 제수됨에 부액(扶腋)②으로 입대(入對)할 것을 명하시고 은혜가 자주 내리는 것을 감격하여 병을 무릅쓰고 경연에 나아가 여러번 왕명을 어긴 것과 사모하는 충성이 맺혀 눈물이 먼저 흘러내리니 성심(聖心) 또한 민망하게 여겼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조회를 폐하고 부조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조야(朝野)가 슬퍼하고 벼슬이 덕을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부군은 성품이 충효에 뿌리를 두어서 어머니를 섬기되 비록 나이와 벼슬이 이미 높았으나 곁에서 부지런히 모시는 일들을 깊은 사랑속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목소리와 온화한 얼굴로 먼저 뜻을 받들고 성의가 많았으나 항상 모자란 것처럼 여겼으니 이는 진실로 부모를 봉양하는 효도라 할 것이다.
상을 당하여서는 지나치게 슬픔으로 몸이 상하는 것이 예절에 지나쳤으며 한결같이 아버지의 상고 때와 같이했다. 조정에 있을 때는 정조대왕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公을 위하여 사사로움을 잊었고 몸도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丁未년 가을부터 戊申년 겨울까지 내의원(內醫院)에서 잠자가면서 방경(邦慶)③이 늦은 것으로 근심하다가 병이 되어 비록 매우 위독했으나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꿈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정조대왕께서 일찍이 「호걸 차게 자라서 아름다운 풍채가 있다. 기기이장 휴휴지풍(頎頎而長 休休之風)」는 여덟 자를 써서 하사한 일이 있는데 이것을 방에 걸어 두고 하사 받은 표지에 문득 기기재(頎頎齋)라 쓰고 이름을 쓰지 아니하였다.
三司와 승정원에 있을 적에는 논계(論啓)와 봉대(奉對)④에는 명백하고 개절(凱切)⑤하였고 의리에 관계되는 일에는 바른길을 잡아서 견고하고 확실하여 비록 천위(天威)⑥가 성내더라도 반복하여 간(諫)하였고, 처음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아니했다. 천자(天姿)가 순수하고 조중(操重)하며 지론(持論)은 공평하며 조정하는데 노력하였고 자기를 근엄하게 다스려서 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맑고 고상하고 편안하고 간략하여 분화(芬華)를 즐기지 아니했고 영화로 나가는 길을 취함에 있어서는 마음이 물같이 담담(淡淡)했다. 집은 겨우 바람과 비를 피할 정도였고 책상에는 가지고 놀며 좋아 할만한 것이 없었다. 골짜기에는 수레와 말이 없고 문전에는 포저(苞苴)⑦가 끊어졌다. 한가하게 있을 때는 장엄(莊嚴)하여 접근할 수 없고 내외직의 관에 있어서는 청렴하고 결백하며 공명하고 삼가 법도를 잘 지켰으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正祖大王께서도 항상 「옥과 같은 사람이다.」하고 포상했으며, 돌아가신 뒤에도 더욱 더 생각하며 말하기를
『수백(粹白)함이 그 사람 같은 이는 참으로 쉽지 아니하니 그 풍의(風儀) 또한 지금에도 다시 볼 수 없구나.』
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이 시장(諡狀)을 짓기를
『公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은 병연(炳然)하여 가히 없어질 수가 없구나. 곧으면서도 스스로 지키고 간결하여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며 거처하는 곳에 따라 뜻을 옮기지 아니한다.』 했으니
『세상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이다.』
아! 부군의 言行이 세상에 드러나서 위로는 임금의 말씀으로 아름답다고 칭찬한 말이 있고 아래로는 나라의 사람들이 칭송하고 추모하는데 小子가 어찌 감히 사사로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에서 벼슬할 때의 일을 기록 가운데서 뽑았을 뿐이고 서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公州의 水村 인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 기계 유씨(杞溪兪氏)로 아버지의 휘 언수(彦銖)는 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의 휘 척기(拓基)는 영의정이요 시호가 문익(文翼)이다. 庚申年(1740) 6月 6日에 출생하여 癸酉年(1753)에 선부군에게 시집와 甲子年(1804) 9月 16日 졸하였다. 착하고 밝은 법도와 아름다운 행실을 일가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선부군의 墓 왼쪽에 부장(쯊葬)했다. 불초남(不肖男) 능악(能岳)이 종일품직을 받았기에 선부군에게는 좌찬성 선비(先쯼)에게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장남 능직(能直)은 성균생원이요, 다음은 불초 능악(能岳)인데 전 이조판서이며, 다음은 능달(能達)이다. 딸은 판서 이노익(李魯益)과 목사 서임보(徐任輔)에게 출가하였다. 능직(能直)은 아들이 없어 능달(能達)의 아들 군수 의만(宜晩)을 양자로 삼고 딸은 참판 김흥근(金興根)에게 출가하였다. 능악(能岳)의 아들 의신(宜臣)은 지금 충청감사로 있는데 출계(出系)하여 종형 능술(能述)의 뒤를 이었다. 다음은 의린(宜隣)이니 성균생원이며 딸은 승지 김동건(金東健)에게 출가하였다.
능달(能達)의 계자(系子)는 의면(宜冕)이니 지금 참봉이며 딸은 생원 조은식(趙恩植)에게 출가하였다. 의만(宜晩)의 아들은 기택(起澤)이요, 의신(宜臣)의 아들은 영택(英澤)이고, 의린(宜隣)은 4男1女가 있는데 장남은 훈택(勳澤)이요, 2男은 순택(舜澤)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이노익(李魯益)의 계자는 설서 복신(福信)이요, 서임보(徐任輔)의 아들은 경순(經淳)이고 김동건(金東健)의 아들은 진사인 교성(敎性)이요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아니한다.
숭정(崇禎) 기원후 210年 丁酉 7月   日
불초남 능악(能岳)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지음
전면에는 석봉 한호(石峯韓濩)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것이고, 음기(陰記)는 노공 안진경(魯公顔眞卿)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치제문(致祭文)
헌관(獻官)은 예조정랑 오석령(吳錫齡)이요, 대축(大祝)은 교서판교(校書判校) 이현채(李顯采)며 축사(祝史)는 예빈직장 윤평이요, 재랑(齋郞)은 선공감 부봉사 유지(柳之)며 사의(司儀)는 인의(引儀) 정환공(鄭煥恭)이다.
 조정에서 홀(笏)을 꽂으니 그 위의 아름답구려.
 청헌공(淸獻公)이 할아버지 되니 삼가함과 두려워함을 스스로 가졌었고
 지난날 춘방(春坊)에서는 참으로 나를 돕는 은혜를 드리웠다.
 전형(銓衡)을 다니면서 보좌했고 드디어 영선(瀛選)의 장이 됐네.
 7조를 진술한 장소는 모두 아름다운 말로 가득 찼네.
 항상 근밀(近密)⑧에 거하면서 순주(醇酒)를 마시는 것과 같았네.
 추울 때는 다시 합문을 지켰고 잡은 것은 항상 떳떳했네.
 문득 종백(宗伯)을 시킨 것은 경을 크게 시험하고자 함이라.
 경 같은 이 만나기는 옛날에도 또한 드물었지.
 기마(騎馬)를 달리면서 눈썹을 쓸었는데 긴 길을 어찌 반도 못 갔는가.
 어느 곳에서 찾아오려는가. 형범(型範)⑨을 볼 수 없구나.
 예관이 가서 잔을 드리니 아무쪼록 흠향하시기를.

주(註)
① 풍비(風痹):중풍(中風)에 걸려서 전신에 마비(痲痺)가 옴.
② 부액(扶腋):나이 많은 사람이 행동이 불편하다 하여 젊은이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 부근을 잡아줌.
③ 방경(邦慶):나라의 경사. 즉,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혼인을 하거나 왕자가 태어나는 일.
④ 논계(論啓)와 봉대(奉對):사안을 논의하여 틀을 잡은 뒤 그 시행을 보고하거나 임금을 면대하여 하고 싶은 말을 아룀.
⑤ 개절(凱切):낫으로 물건을 자르듯 어떠한 일을 결단성 있게 처리함.
⑥ 천위(天威):하늘의 위엄. 즉 임금의 위엄.
⑦ 포저(苞苴):꾸러미.
⑧ 근밀(近密):밀은 은밀한 곳. 일반 사람들이 잘 출입할 수 없는 곳. 즉, 궁궐. 궁궐에 가까운 곳. 전하여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일.
⑨ 형범(型範):틀에 딱 짜여져서 변통할 수 없는 것을 말함. 지정된 규범(規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