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헌공(휘 영지)묘표

지헌공 휘 영지 묘소
소재지: 정읍시 과교동 삼군리 산 76

묘 비 석


十九世祖 芝軒沈公 諱 永之 墓表
公諱永之字如天號芝軒以孫貴贈通政大夫左承旨姓沈氏沈氏遠有代緖至諱繼年號遁齋仕於麗季爲知成州事我朝受命遂晦跡享長城良溪祠是生諱涓號愛庵文監察御史生諱珪忠義衛於公爲十二世祖曾祖汝興官同樞祖璫考得鎭妣瑞山柳氏无育妣江陵劉氏德修女以正廟丁未擧公于井邑三君里第自孩提時巳知孝親七歲奄喪所怙與母夫人了了爲命是年母氏得病幾至危濱忽思肉羹輒往市買得而歸時驟雨急下川水大漲公跼蹐放哭曰此水下濟其於吾親何適有人救渡者急歸而供進症勢漸差自是繼式而進快得奏效人皆稱歎孝童及長極其志物之養母氏而天年終執喪如禮擇吉兆而葬之家道稍舒先買山地次第安厝以成累世未遑之擧盖其誠孝篤實始終如此也純祖丁亥正月二十三日終得年五十一公沒後鄕耆薦狀于有司沈侯吉求嘉其行而褒揚焉墓在井州市科橋洞三君里山七十六番地子坐 配贈淑夫人水原崔氏士五女丁未生癸卯四月八日卒墓合窆生三男二女男能龜能文能元贈嘉善能龜生宜敬贈嘉善能文生三男嘉善宜洪通政宜豊嘉善宜廷能元生宜淳女鳳山李載烈昌原丁錫厚曾孫男爲十餘人曰充澤禧澤雨澤秉澤宗澤蔓澤倫澤錫澤憲澤基澤旻澤宣澤成澤也噫公之齡齡孝心如彼想必有衆行之焯焯而狀之所述者止此豈不惜哉然此足以傳美於後矣余與基澤雨澤素有遊從之誼聞公之行者稔矣一日抱其狀託余表阡不辭而敍之
一九一○年正月初一日
東陽 申泰庸 謹撰   

19세조 지헌심공 휘 영지(永之)) 묘표
公의 휘는 永之요 자는 如天이며 호는 지헌(芝軒)이다. 증 통정대부 좌승지요 성은 沈氏라 심씨는 원시 유명하니 휘 계년(繼年)이고 호는 遁齋이다. 고려조에서 지성주사(知成州事) 벼슬을 하였는데 조선조에 와서는 벼슬을 받지 않고 숨었기로 장성 양계사(良溪祠)에 배향되다. 아들에 휘 연(涓)이오 호는 애암(愛菴)이며 감찰어사(監察御史)하고 아들 규(珪)는 충의위(忠義衛) 부사공인데 공의 12世祖이시다. 曾祖는 휘 여흥(汝興)이며 同樞요 祖는 당(璫)이요 考는 득진(得鎭)이며 어머니 서산 류씨(瑞山柳氏)는 무육하고 후비 江陵 유(劉)씨는 德修의 女라 正祖丁未(1787)년에 공이 정읍 三君里에서 태어나시다. 어려서 슬기롭고 우애하셨는데 7歲 때 父親喪에 어머니와 혈혈단신으로 지내는 동안 어머니께서 병을 얻으셨는데 고기국을 원하시므로 정읍시장에 가서 사 갖고 집에 오던 중 급히 비가 내려 냇가에 물이 차서 건널 수가 없기로 공이 통곡하기를 『내가 이 냇물을 건너지 않으면 우리 어머니를 어찌 낫게 할 수 있느냐』 하니까 어느 장정이 나서서 내를 건너 주어 그 『고기국』을 어머니에게 드리니 잡수시고 병세가 점점 나아지자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과연 孝童이라 하드라 자라서는 孝로써 어머님을 봉양하니 어머니가 天壽를 다하시고 돌아가시니 家禮에 따라 복재하고 택일하여 장사지내다. 집안이 점차 낳아져 먼저 산지를 사서 차례로 先塋을 모시고 여러 해 동안 못 다한 집안 일을 성과 효로 독실하게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純祖 정해(1827)년 1月 23日 돌아가시니 51歲 이었다. 公이 돌아 가신지 고향 유림이 천거하니 정읍현감 심길구(沈吉求)가 그 행실을 가상히 여기어 포상하다. 묘는 現 井州市 科橋洞 三君里 山76번지 子坐요 配는 증숙부인 수원 崔씨며 휘 士五의 女라 丁未년에 낳으시고 己卯 4月 8日에 卒하니 묘는 합폄(合窆)하다. 3男2女를 낳으니 男에는 能龜 能文 能元이며 嘉善 能龜는 아들 宜敬을 낳고 贈가선 能文은 아들 셋을 낳으니 가선 宜洪과 통정 宜豊 가선 宜廷이요 能元은 宜淳을 낳았다. 女에 봉산 이재열과 창원 정석후요 증손남에 10餘人인데 충택 희택 우택 병택 종택 만택 윤택 석택 헌택 기택 민택 선택 성택이라 슬프다. 고의 음덕과 효심이 두터워 후세에 거울 되니 내가 基澤 雨澤과 더불어 배우면서 公의 행적을 들은바 있는데 어느날 公의 행장을 갖고 왔기로 사양치 못하고 이 墓文을 쓰노라.
1910年 1月 初1日
동양(평산) 신태용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