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판공(휘 돈영)묘비문


참판공 휘 돈영 묘소
소재지: 파주시 광탄면 창만리(도마산)

묘 비 석


沈氏出自靑松이니 公의 諱는 敦永이시고 字는 敬叙이시며 純祖九年 一八○九年 己巳 十二月 十日 丑時에 生于 漢城北部 嘉會坊하시고 憲宗二年 丙申에 廷試文科하셔서 戊戌에 政註陞六이시며 己亥에 司諫院 正言이시고 庚子 奉命海西(黃海平安) 暗行御史로 辛丑年에 選瀛館 校理로 文兼宣傳官文備郞을 지내시고 甲辰에 校理에 司憲府 持平 掌令이시고 司僕寺正 乙巳 修撰으로 司憲府 執義이시고 丁未 掌令 執義 校理를 兼하시고 戊申에 削職 己酉에 憲宗大王告訃請諡 兼 哲宗大王承襲奏請書狀官 拜司僕正 復命後蒙恩陞通政階 奴婢四口와 畓十結亦蒙賞賜 哲宗元年 庚子에 兵曹參議除授降參知同副承旨 同年除拜慶州府尹 追贈 兩代하시고 辛亥遞任 同年特除左副承旨 壬子除左承旨 逆賊字禎榮瑾鞫獄以刑房承旨로 進參 臘月特恩禮曹參議 甲寅四月移拜 成均館 大司成으로 同月 十五日 十六日에 本館以月食再次救食跡列排旨重推施因 領相金左根筵奏命罷職 五月除左承旨命敍用 乙卯 十二月 都正通吏曹參議 同月除安邊府使止吏曹參判하시다. 公平常時에도 弄談을 잘하지 않으셨으며 剛直淸廉詼諧하셔서 承旨때 入闕을 하시면 憲宗大王께서 他臣과 私談을 하시다가도 깜짝 놀라시며 저기 社沈이 들어오니 只今한 私談을 口外不出하라고 하셨음(社沈이란 말씀은 社稷洞 沈承旨란 말씀) 하루는 闕內가 어수선하므로 其事由를 下人輩에게 물으니 殿下께서 今日 後苑에서 놀이를 하신다고 대답하니 公께서 途中에 俯伏하시고 놀이를 挽留하시니 憲宗께서 大怒하시어 宴會를 中止하시고 沈承旨를 定配하라 下命하셨으므로 當時 入直承旨 李時愚가 殿下께 終日토록 諫하여 怒하심을 푸시고 定配令을 解制하시었음. 公의 考는 世子翊衛司 翊衛로 贈吏曹參判 諱는 毅鎭이시고 字는 致弘이시며 祖考는 靖陵直長으로 贈吏曹參議 諱는 師民이시며 曾祖는 崇政大夫 知中樞府事 諱는 廷最이시고 高祖는 泰仁縣監으로 贈吏曹判書 諱는 益成이시며 五代祖는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이시고 諱는 之源이시며 字는 源之이시고 號는 晩沙이시며 六代祖는 監役으로 贈領議政이시고 諱는 偰이시며 七代祖는 肅川府使로 贈左贊成이시고 諱는 宗忱이시며 八代祖는 果川縣監으로 贈吏曹判書 諱는 錦이시고 九代祖는 議政府 左贊成으로 諡는 胡安公이시며 號는 鈍庵公이시며 諱는 光彦이시고 十代祖는 安城郡守로 贈吏曹判書 諱는 濱이시며 十一代祖는 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贈兵曹參判 諱는 安仁이시고 十二代祖는 京畿觀察使로 贈輔國崇祿大夫 號忘世亭이시니 卽世祖朝時也니 諱는 璿이시고 十三代祖는 判官으로 贈戶曹判書 諡는 良惠公이시며 諱는 石雋이시고 十四代祖는 嘉靖大夫 仁壽府尹 諱는 澄이시고 十五代祖는 特進大匡輔國崇祿大夫 門下侍中 靑城伯 諡는 定安公이시고 號는 淸虛亭이시며 諱는 德符이시고 十六代祖는 靑華府院君 諱는 龍이시고 十七代祖는 承議郞 閤門祗侯이시니 諱는 淵이시고 十八代祖는 麗朝에서 文林郞 衛尉寺丞 諱는 洪孚이시니 惟我沈氏之始祖이시다. 公의 本生父는 成均進士 諱는 常鎭이시고 本生祖는 文科 正言이시니 諱는 重奎이시고 本生曾祖는 縣監으로 贈資憲大夫 同中樞府事 諱는 運熙이시고 本生高祖는 成均生員으로 贈吏曹參判 諱는 材이시며 本生五代祖는 文科 舍人副提學止左承旨 號는 滄洲이시며 諱는 之漢이시고 生六代祖는 司僕寺正 諱는 倬이시며 本生七代祖는 縣監으로 贈吏曹參判 諱는 宗範이시며 本生八代祖는 參奉으로 贈左承旨 諱는 鉉이시며 養家八代祖 果川縣監 諱 錦의 伯兄主이시니 參贊公 諱 光彦의 長子는 鉉이요 次子는 鍊이오 三子는 錦이시다. 後孫은 先祖의 遺訓과 어리석은 나의 心情을 銘心하여라. 高祖 參判公은 哲宗十年 一八五九年 己未 九月 二十五日終于社稷洞第하시니 春秋五十一 初葬于直長公仝後北麓 高祖妣恩津宋氏의 父의 諱는 一斅이시고 祖의 諱는 允弼이시고 號는 屯蒙齋이시고 曾祖의 諱는 載緯이시고 高祖의 諱는 必徵이시며 五代祖의 諱는 相維이시고 六代祖의 諱는 奎濂이시며 字는 道源이시고 號는 霽月堂이시니 崇政大夫 吏曹判書 諡文僖 享懷德渼湖書院하시다. 高祖妣宋氏는 純祖七年 一八○七年 丁卯 八月 二十八日亥時生于 懷德邑內後谷 哲宗十年 一八五九年 己未 九月 二十四日終하시니 春秋五十三이시다. 公仝合封 檀紀四二九六年(一九六三年) 癸卯 三月 十一日移葬于考仝下子坐 育一男一女 男은 樂聖 孫 魯哲 曾孫 遠穆 玄孫 鍾卨 鍾益 鍾聲 女婿 李承泌韓山人原州判官 父承旨駿在 子 元稙 雲稙 元稙의 子는 完桂요 雲稙의 子는 鳳珪 李判官公의 女 安東金容圭承旨 大邱徐相兌進士 惟我沈門中五家法規가 特異하여 自始祖이하로 二十餘代에 山所圖가 備置되어 自閤門祗侯公으로 至鍾字行까지 或三娶或四娶에 壽가 僅十五歲의 配位山所도 乾位에 祔左祔右가 分明하므로 山所에 對하여 安心하는 바이다. 吾門中 後孫은 先祖의 家規를 不忘銘心하여라 他姓이나 吾宗中에도 世官職이 不絶하고 財産이 富裕해도 先代山所失傳하면 其家庭法道를 可知하게 된다. 幾百年된 白骨이 後孫에게 무슨 關係가 있으리오마는 先祖가 없으면 後生이 없을 것이니 그것이 天理也라 吾門에 先祖가 모두 有功하시지만 晩沙公은 말씀할 것도 없고 七代祖 知事公 以下 高祖 參判公까지 有功하시니 近世高祖 參判公께서 文字로 詳細히 해놓으셨고 墓山圖에다 遠近宗人대까지 全部 詳細히 記載해 놓으셔서 表石이 없어도 墳入土도 다 알게 되고 千萬事에 그와같이 하셨으니 國事나 私家에 功이 至大하셨음.
檀紀四三○四年(西紀一九七一年) 陰三月  日
不肖 玄孫 鍾益 泣百拜 謹錄
五代孫 明求 設二○○二年 十月  日 墓碑
全面集 石峯 韓濩 筆

19세조 참판공 휘 돈영(敦永) 묘비문
沈씨는 靑松으로부터 나왔으니 公의 휘는 돈영(敦永)이요 字는 경서(敬敍)이며 純祖九(1809)년 己巳 12월 10일 축시에 漢城北部 가회방(嘉會坊)에서 낳았고 憲宗2(1836)년 丙申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及第하였다. 戊戌(1838)년에 6품 벼슬에 오르고 己亥(1839)년에 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으며 庚子(1840)년에 황해도 평안도의 암행어사로 나갔다. 辛丑(1841)년에 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고 선전관(宣傳官), 문비랑(文備郞)을 겸직하였으며 甲申(184)년에 校理로 사헌부지평과 장령(司憲府持平 掌令)을 역임하고 사복시정이 되었다.
乙巳(1845)년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승진되고 丁未(1847)년 집의 교리를 겸하시고 戊申(1848)년에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己酉(1849)년에 憲宗大王이 승하(昇遐)함에 고부사(告訃使)겸 哲宗大王이 王位를 계승받기 위한 주청서장관(奏請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 복명하니 은공으로 사복시정에 임명되고 通政의 품계에 올라 노비(奴婢) 네 식구와 논 10결(結)을 하사 받았다. 哲宗元年 庚子(1850)년에 병조참의 참지(參知)를 거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同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 父祖 두 代가 증직을 받았고 같은 해에 승정원좌부승지에 특별히 임명되었다가 좌승지로 옮겼다. 역적자정영근(逆賊字禎榮謹)의 罪를 다스릴 때 형방승지(刑房承旨)로 참여하여 12월에 특별히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 甲寅(1854)년에 成均館大司成으로 옮겼으며 같은 달 15일, 16일에 월봉(月俸)이 적다고 불평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어겼다하여 추국(推鞫)을 당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奏請하여 파직(罷職)당하였다가 5월에 左承旨에 임명되었다.
乙卯(1855)년 12월에 통정대부이조참의에 임명되고 같은 달 안변(安邊)부사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吏曹參判이 되었다.
公은 평상시에 농담(弄談)을 잘하지 않고 강직청렴(剛直淸廉)하여 해학(諧謔)도 잘하며 承旨 때 입궐(入闕)하면 憲宗大王이 다른 신하들과 私談을 하다가도 사직동심승지(社稷洞沈承旨)가 들어오니 지금 私談한 말씀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하였다. 하루는 闕內가 어수선하므로 그 사유를 下人輩에게 묻자 임금이 오늘 後苑에서 놀이를 한다고 대답하니 公이 途中에서 엎드려 놀이를 만류(挽留)하니 憲宗께서 크게 怒하여 宴會를 중지하고 심승지를 귀양보내라 하였다. 당시 입직승지(入直承旨) 이시우(李時愚)가 종일토록 간(諫)하여 怒하심을 풀고 定配命令을 해제하였다. 公의 아버지는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휘 의진(毅鎭)이니 字는 치홍(致弘)이며 할아버지는 정릉직장(靖陵直長)으로 이조참의에 贈職되었으니 휘는 사민(師民)이며 曾祖는 숭정대부지중추부사(崇政大夫知中樞府事) 휘 정최(廷最)이고 高祖는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휘 익성(益成)이시다. 5代祖는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휘 지원(之源)이니 字는 源之요 號는 만사(晩沙)이며 6代祖는 감역(監役)으로 領議政에 贈職된 휘 설(偰)이고 7代祖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좌찬성에 증직된 휘 종침(宗忱)이요 8代祖는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휘 금(錦)이시며 9代祖는 議政府左贊成으로 諡號는 호안공(胡安公)이요 號는 둔암공(鈍庵公) 휘 광언(光彦)이시다. 10代祖는 安城郡守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휘 빈(濱)이시고 11代祖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병조참판에 증직된 휘 안인(安仁)이요 12代祖는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증직된 망세정(忘世亭)이니 世祖 때로 휘 선(璿)이시고, 13代祖는 判官으로 호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諡號)가 양혜공(良惠公)으로 휘 준(雋)이시며, 14代祖는 가정대부인수부윤(嘉靖大夫仁壽府尹) 휘 징(澄)이요, 15代祖는 특진대광보국숭록대부문하시중청성백(特進大匡輔國崇祿大夫門下寺中靑城伯) 諡號 定安公 號 淸虛亭 휘 德符이시고, 16代祖는 靑華府院君 휘 용(龍)이시며, 17代祖는 承議郞 閤門祗侯公 휘 연(淵)이시며, 18代祖는 高麗朝文林郞尉衛寺丞 휘 홍부(洪孚)이시니 우리 沈氏의 始祖이시다. 公의 生父는 成均館進士 휘 상진(常鎭)이요, 生祖父는 文科及第하여 正言인 휘 중규(重奎)이고, 生曾祖는 縣監으로 자헌대부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에 증직된 휘 운희(運熙)이며, 生高祖는 成均生員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휘 재(材)요, 生5代祖는 문과급제하여 舍人副提學에서 左承旨가 된 號 창주(滄洲) 휘 지한(之漢)이시다. 生6代祖는 司僕寺正 휘 탁(倬)이시고, 生7代祖는 현감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휘 현(鉉)으로, 養家8代祖 果川縣監 휘 금(錦)의 伯兄主이시며, 참찬공 휘 광언(光彦)의 長子는 현(鉉)이요, 次子는 련(鍊)이요, 3子는 금(錦)이다. 후손은 先祖의 유훈(遺訓)과 어리석은 나의 心情을 명심하여라 高祖考 參判公은 哲宗10年(1859) 己未 9月 25日에 사직동에서 卒하시니 春秋가 51이요, 처음에는 직장공묘북록(直長公墓北麓)에 장사지냈다. 高祖妣 恩津宋氏의 父는 일효(一斅)이고 祖는 윤필(允弼)이니 號가 둔몽재(屯蒙齋)이며 曾祖는 휘 재위(載緯)요 高祖는 필미(必微)이고 5代祖의 휘는 상유(相維)이며 6代祖는 규렴(奎濂)이니 字는 도원(道源)이요 號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숭정대부이조판서(崇政大夫吏曹判書)였고 일(溢)은 문희(文僖)로 회덕미호서원(懷德渼湖書院)에 配享되었다. 高祖妣 宋氏는 純祖7(1807)년 丁卯 8월 28일 亥時에 懷德邑內後谷에서 出生하여 哲宗10年(1859) 己未 9월 24일 卒하시니 享年이 53이요 公墓와 합폄(合窆)하였다가 癸卯(1963)년 3月 11일에 考墓下 子坐에 移葬하였다. 1男1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낙성(樂聖)이요 孫은 노철(魯哲)이며 曾孫은 원목(遠穆)이요 玄孫은 종설(鍾卨) 종익(鍾益) 종성(鍾聲)이요 女婿는 한산 이승심(韓山 李承沁)이니 原州판관이요 父는 承旨 준재(駿在)요 子는 元稙 雲稙이며 元稙의 子는 완규(完珪)요 雲稙의 子는 봉규(鳳珪)이다. 원주 判官公의 딸 둘은 승지 安東金容圭와 진사 대구 徐相兌에게 각각 出嫁하였다. 오직 우리 沈氏門中 다섯 집 法規가 特異하여 始祖로부터 20여대까지 山所圖가 備置되어 閤門祗侯公으로부터 鍾字 行列까지 或三娶 或四娶하여 壽를 하며 僅15代 歲의 配位山所도 乾位에 祔左祔右 함이 分明하므로 山所에 對하여 안심되는 바이다. 우리 門中後孫은 선조의 가규(家規)를 잊지 말고 명심할지어다. 他姓이나 우리 宗中에도 世官職이 끊이지 않고 財産이 富裕해도 선대산소를 失傳하면 그 家庭法度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몇 백년이 된 백골(白骨)이 후손에게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 마는 先祖가 없으면 後孫이 없을 것이니 그것이 天理이다. 우리 문중에 선조가 모두 有功하시지만 晩沙公은 말 할 것도 없고 7代祖 知事公 以下 高祖參判公까지 有功하시니 近世高祖參判公께서 文字로 詳細하게 記載하였고 墓山圖에 遠近宗人代까지 詳細히 밝혀서 表石이 없어도 墓所를 알게 되고 千萬事를 確實하게 해놓으셨으니 國家나 私家에나 功이 至大하였다.
辛亥(1971)年 陰3月 日
玄孫 不肖 鍾益이 울면서 百拜하고 삼가 씀
5代孫 明求 2002年에 墓碑를 세웠고
前面 大字는 石峯 韓濩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