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목사공(휘 봉휘)묘갈


十六世祖 贈吏曹參判 綾州牧使公 諱 鳳輝 墓碣銘
公諱鳳輝字汝翔靑松沈氏自高麗衛尉丞洪孚始著于譜入我  朝開國元勳定安公德符國舅安孝公溫翊戴佐理功臣恭肅公澮三世繼登台輔恭肅孫舍人順門曾孫修撰達源俱以名節稱又二世有諱諿禮曹判書孝簡公生諱東龜弘文館應敎生諱攸弘文館副提學生諱漢柱高陽郡守是爲公高曾祖考妣慶州李氏郡守壽翼女公幼而粹潔聰慧長益淸脩甚爲副學公所愛重甫勝冠病胃疾沉淹床第者十餘歲遂絶意科場靜居攝養己丑始仕爲四山監役官翌年以親意黽勉成進士內則掌苑署別提內贍寺主簿工曹佐郞正郞漢城府判官戶曹正郞宣惠廳郞廳掌樂院僉正外則文化縣令高城郡守靑松府使綾州牧使卽公所踐歷也公雖局於一第未克大施于世而在所必盡職掌苑主  御供果實中人出片紙索進惟意而無敢何公言于提擧奏稟定制爲惠郞適歲稔公謂穀賤而又散之何以備水旱遂請於堂上儲米甚多無幾果大歉乃賴以濟其宰邑也一以淸淨謹愼不求赫赫聲而自多有利澤之及下者文化時値饑荒單心賙賑民無捐瘠觀察使褒聞于朝高城僻居海山間俗椎而氓疲公蠲海稅寬僧役一意撫摩綾州稅米遠輸又有宮庄俱爲民巨弊公屢牒而力言之俱得釐革二邑人俱刻石鑄銅以寓去後思公孝友甚篤事親誠敬備至母夫人晩多疾公左右服勤躬親扶護久而愈不懈壬辰甲午連丁內外艱執禮哀毁又不以病羸少弛妹家禍故漂泊公取孤寡置江墅撫視周恤十年如一日遠祖親盡當祧而長房窮鰥不自保公謀諸宗人權奉于家而祭時輒盡誠備物邀長房而俾主之及長房死而祧主將埋則公涕淚汍瀾悲不自勝靑松有始祖墓公捐俸鳩工石儀祭器皆一新之遇族婣濟窮困無間疎戚家居不問産業所莅多饒腴而田園無所增性恬雅簡靜接人刊畦畛色笑可親而又不喜闌語諧謔非公事未嘗迹慹門視世之忮求夸毗者不翅若其於聲色貨利泊如也嗚呼以公之志之行乃少嬰疾洃晩屈蔭塗不能早揚王庭盡見其蘊抱知公者莫不惜之最公平生不言人過惡曰世人不能自脩而好議人長短吾實病之長子登第則公輒諄諄擧先法爲戒曰爾其勉之毋墜家聲不義而取卿相非吾願也噫味公數語可見公所存非衆人幾及而有足以垂範後承誠亦賢矣哉公以  顯宗丙午生壽六十九而卒于甲寅十一月十九日配豊山洪氏參議柱國女至行淑德六親稱女士生先公一年沒先公十五年合窆于衿川治東屹里項坐寅之原三男長聖希參判次賢希早夭季士希奉事二女婿留守韓顯 士人洪啓億側室男德希參判長男公獻進士亦早夭次公猷爲次房後三女婿侍直宋文欽士人李善海金晉柱奉事有男女並幼內外孫曾摠若干人以參判貴推恩贈公吏曹參判洪夫人從贈如例系曰
在唐有柳直淸在宋有呂原明壹皆以急名宦點檢他人戒子弟訓後生嗟乎觀於公勉飭家庭其亦深得乎斯義之丁寧法語義方疇或改評治理循良較玆爲輕有欲知公請考是銘
領議政 兪拓基 撰  

16세조 증이조참판 능주목사공 휘 봉휘(鳳輝) 묘갈명
公의 이름은 봉휘(鳳輝)요 字는 여상(汝翔)이니 靑松沈氏는 고려 때의 위위시승공(衛尉侍丞公 諱 洪孚)이 비로소 족보에 나타났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개국원훈(開國元勳)인 定安公 諱 德符, 국구(國舅)인 安孝公 諱 溫, 익대 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인 恭肅恭 諱 澮 3代가 계속하여 정승(政丞)에 올랐다. 공숙공의 손자인 舍人公 諱 順門과 증손인 修撰公 諱 達源이 함께 절개(節介)있는 名士로 이름이 나고 또 2代를 지나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孝簡公 諱 諿이 홍문관 응교공 휘 동구(弘文館應敎公 諱 東龜)를 낳고 이 분이 홍문관 부제학공 휘 유(副提學公 諱 攸)를 낳았으며 이 분이 고양 군수공 諱 漢柱를 낳으니 이 분들은 公의 고조, 증조, 조고, 선고가 되신다.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군수공 郡守公 諱 壽翼의 따님이시다.
公은 어려서부터 순박하고 총명하더니 장성할수록 더욱 영민하여 할아버지 부제학공(副提學公)께서 애지중지 하셨다. 겨우 成年이 되었을 때 위병(胃病)이 침범하여 병상에 누운지 10餘年이 되니 드디어 과거장(科擧場)에 나갈 뜻을 끊었으며 조용히 집에 있으면서 건강유지에 힘썼다.
己丑(1709)年에 비로소 벼슬하여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고 다음해 아버지 뜻에 따라 힘써 進士가 되었다. 내직으로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공조좌랑 정랑(工曹佐郞正郞)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호조정랑(戶曹正郞) 선혜청 랑청(宣惠廳郞廳)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내고 외직(外職)으로는 문화현령(文化縣令) 고성군수(高城郡守) 청송부사(靑松府使) 능주목사(綾州牧使:正3品)를 역임한 것이 즉 公의 이력이다.
公은 비록 초시(初試)에만 합격하여 세상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으나 직장에서는 맡은 직책을 완수하였다. 장원(掌苑)에서는 王에게 제공하는 과실(果實)을 주관했는데 이 무렵 中人이 편지를 내놓았다. 그 뜻을 진달코자 하나 감히 어찌할 수 없이 公이 제거(提擧)에게 말하여 정식으로 상신하였다. 그리고 선혜청에 근무할 때에는 마침 흉년이 들었다. 公이 이르되 곡식을 천하게 여기고 흐트러 놓으니 어찌 수해와 한해를 예방할 것이냐 하면서 드디어 당상관(堂上官)에게 청하여 쌀을 많이 저축해 놓으니 거의 큰 흉년이 없고 이로 말미암아 그 고을을 구제할 수 있었다.
한결같이 깨끗한 가운데 삼가며 직무를 수행하되 혁혁한 명성(名聲)을 구하지 않으니 자연 이익과 혜택이 아래 사람에게 미치는 일이 많았다. 문화현령(文化縣令) 때는 흉년을 당하자 구제에 힘쓰니 백성들이 궁핍함이 없었다. 그래서 관찰사(觀察使)가 조정에 포상(褒賞)을 신청하였다.
고성(高城) 땅은 바다와 山 사이에 놓여 있어 풍속이 순박하고 백성의 살림이 고달펐는데 해세(海稅)를 감면해주고 중들의 부역을 너그러이 보아주며 한결같이 무마하였다. 능주(綾州)에서는 세미(稅米)를 멀리 수송하는 일과 또한 궁장(宮庄)이 있어 다같이 백성들의 큰 폐단이 되었다. 公이 자주 보고서를 내고 힘써 설명함으로써 두 가지 폐단을 함께 혁신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동상(銅像)을 만들어 훗날 사모(思慕)하는 근거가 되도록 하였다.
公은 孝誠과 友愛가 돈독하여 어버이를 섬기는데 정성(精誠)과 존경(尊敬)이 모두 지극하였다. 어머님이 만년에 병환이 많았는데 公이 옆에서 모시고 몸소 부양 보호하는 일을 오래도록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壬辰(1712), 甲午(1714)년에 연달아 부모상(父母喪)을 당했는데 예(禮)를 좇아 애통하게 복상하였으며 몸이 약하다 하여 조금도 늦추지 아니하였다.
매부 집안에 화가 미쳐 풍지박산 되었는데 公이 가장을 잃은 생질과 여동생을 데려다 농촌에 살게 하고 10餘年을 하루같이 돌보아 주었다. 먼 조상이 代가 다함으로서 신주(神主)를 체천(遞遷)해야 하는데 장손 집이 홀아비로서 모시지 못하니 公이 여러 종인들과 협의하여 자기 집에서 일시 받들어 모시고 제사 때에는 정성을 다해 제수(祭需)를 마련하고 장손을 맞아다가 주관토록 하였으며 장손이 죽은 뒤에는 신주를 묻으려 하니 公이 눈물이 비오듯 하며 비통(悲痛)함을 참지 못하였다.
靑松에 시조 묘소가 있는데 公이 봉급을 털어 工人을 모아 石物과 제기를 마련하여 모두 일신하였다. 일가친척을 만나 곤궁한 처지를 도와줌에는 친소를 따지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는 직업을 묻지 않았다. 관직에 나간 바는 아주 많으나 논밭을 더 사드리는 일은 없었다.
性品은 바르고 조용하였으며 사람을 접대할 적에는 차별하지 않았고 웃으면서 친절히 하였으나 함부로 말하지 않고 농담을 즐겨하지 않았다. 公事가 아니면 권세있고 아첨하는 자의 집을 밟지 않고 그뿐 아니라 女色과 재물에도 담백하였다.
오호라 公의 의지와 행실이 어려서는 질병에 걸리고 만년에는 음사(蔭仕)의 길에 오름에 조정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그 포부를 다 발휘하지 못하니 公을 아는 자는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公은 평생에 타인의 과실(過失)을 말하지 않았으며 세상 사람들이 수양하지는 못하면서 장단점을 논하는 것을 나는 실로 미워한다고 말했다.
長子가 과거에 급제하니 公이 문득 순순히 선조의 예를 들어서 경계하기를 「너는 힘써 지키어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라. 의롭지 않게 고관직위에 오름은 나의 소원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公께서 남긴 여러 말씀을 음미해 보건대 公이 간직한 바는 뭇 사람의 미칠 것이 아니고 족히 後孫들에게 모범이 될 것을 볼 수 있으니 진실로 현철(賢哲)한 일이로다.
公께서는 顯宗 丙午(1666年)生으로 69歲를 살으시다가 英祖 甲寅(1734年) 11月 19日에 별세하셨다. 배위는 豊山洪氏로서 참의공 휘 주국(參議公 諱 柱國)의 따님이다. 지극한 행실과 부덕이 있어 육친(六親)들이 女士라고 칭송했다. 公보다 1年 먼저 출생하고 公보다 15年 먼저 돌아가시니 금천(衿川) 동쪽 홀리항(현재의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寅坐의 자리에 합장(合葬)하였다.
세 아들을 두니 장자 성희(聖希)는 참판이요, 차남 현희(賢希)는 조요(早夭)하고, 삼남 사희(士希)는 봉사(奉事)이다. 두 딸이 있으니 사위는 유수 한현모 사인 홍계억이며 소실이 낳은 아들은 덕희(德希)이다. 참판공의 장남 공헌(公獻)은 進士이나 일찍 죽고 차자 공유(公猷)는 차방(次房)의 系子가 되었다.
세 딸이 있으니 사위는 시직 송문흠(侍直 宋文欽) 사인 이선해(士人 李善海) 김진주(金晉柱)이다. 奉事公은 남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내외 손자와 증손자는 모두 약간명이다. 참판공 휘 성희(參判公 諱 聖希)의 귀(貴)로 公에게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리게 되고 洪夫人의 종부직(從夫職)도 증직 내림이 전례와 같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유직청(柳直淸)과 宋나라 여원명(呂原明)은 한결같은 명관이었네.
他人을 점검하고 子弟와 後生을 훈계하였다.
아아 公의 가정에서 면칙(勉飭)을 보건대 또한 이 뜻이 친절함을 깊이 알았도다.
법어(法語) 의방(義方)을 누가 고치어 평론하리 다스림이 잘되고 경중(輕重)을 비교하였네.
公을 알고자 하거든 이 명을 참고하기 바라네.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