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산제각상량문

南堂山齋閣重建上樑文
普岳降精生我纘緖之顯祖于嶺南之靑松 穴是屹山南堂辰坐戌向 墓而无齋無以守
福人逢吉藏斯著名之明堂而湖南之咸悅 時維洪武十年丁巳九月 齋而有主方可用 恭惟我二世祖考
文林始祖之子 進而止官於閤門祗侯公 靑城行柳下之和 緬奉先祖 若非公之德蔭 曾竪齋閣不億
靑城岳隱之祖 退而安分于山淸紫烟洞 岳隱行伯夷之淸 重裕後昆 焉有后之餘慶 間遭否運連抱
雲仍兩節齊會而不闕萬代之香火 天道不昧誘發於談笑之間 追尋改封臨陂之竹溪處士 古之永慕齋
丘木无良敢伐而久失四尺之斧封 齋閣重建繼述于滄桑之中 翼如奐焉京鄕之搢紳後孫 今之肯構堂
其規狹小 兼風雨不蔽而麗億難容 東西傍路廊廡諸具咸備 或縮地而作金 或合誠而鳩財 歲在丙
其制廣大 且丹雘維新而舊扁仍揭 前後栽植松檜四時長春 爰詢謀而僉同 爰經始而起工 時維三
辰 大樑將上于艮坐基
月 良工齊唱兮兒郞偉
兒郞偉抛樑東 寅賓出日四海明同
兒郞偉抛樑西 寅錢納日一心宿齊
兒郞偉抛樑南 平原曠漠運祚遠覃
兒郞偉抛樑北 積善餘慶孫子不億
兒郞偉抛樑上 上天三光照林无疆
兒郞偉抛樑下 下地百祥輻奏如瀉
伏願上樑之後 春露秋霜散齊致齊而祗薦藻蘋必盡誠孝 京宗鄕族鳩首促膝而講明族誼必以敦睦 豈徒吾宗之羹墻 足爲世人之觀光
公藏后五百九十九年丙辰三月
二十三代孫 應宙 謹

남당산재각중건상량문(번역문)
보광산(普光山)에 정기(精氣)가 내려 우리 시조가 영남의 청송에서 태어나시고
복인(福人)이 길지(吉地)를 얻어 유명한 명당 호남의 함열(咸悅)에 묻히었네
혈(穴)은 남당산(南堂山) 진좌술향(辰坐戌向)이요
때는 홍무(洪武)10년정사9월일세
묘소에 재실이 없으면 수호하지 못하는 것이고
재실에 신주가 있으면 효용(效用)이 있는 것일세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이세께서는
시조 문림랑공의 아드님이시고
청성백 덕부 악은공 원부의 할아버지이시니
나가서 벼슬은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이었고
물러나서는 산청(山淸) 자연동(紫烟洞)에서 분수를 지키며 사셨네
청성백은 유하혜(柳下惠)의 화(和)한 것을 행하였고
악은(岳隱)공은 백이(伯夷)의 청절(淸節)을 지켰네
선조(先祖)를 면봉(緬奉)하고
후손에게 덕을 전하였네
만약 공의 음덕(蔭德)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후손의 경사가 있었으리오.
일찍이 재각(齋閣)을 지어 많은 자손이 양 명절에 일제히 모여 만대(萬代)의 제사를 궐하지 않고
중간에 비운(否運)을 만나 아름드리 나무가 잠깐사이에 벌목(伐木)을 당하고 오래도록 넉자(四尺)의 묘소를 잃었네.
천도(天道)가 어둡지 아니하여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유발(誘發)하여
추심(追尋)하고 개봉(改封)한 이는 임피(臨陂)의 죽계처사(竹溪處士)이고
재각을 중건하여 세대가 변천하는 중에도 이어서
크고 아름답게 집을 지은 이는 경향(京鄕)의 지위높은 집의 후손일세
옛날의 영모재(永慕齋)는 그 규모가 협소(狹小)하여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여 많은 자손 수용할 수 없었는데
지금의 긍구당(肯構堂)은 그 제도가 넓고 크며 또 단청을 새롭게 하여 옛날 간판 그대로 걸었네
동서(東西)의 길옆에 곁채를 모두 갖추고
앞뒤에 소나무와 회나무를 심어 사시장춘(四時長春)일세
어떤 사람은 땅을 줄여 돈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정성을 모아 재물을 만들며
이에 상의를 하자 의견이 일치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완공하였네.
해는 병진년이요
때는 3월일세
큰 들보를 간좌(艮坐)의 터에 올리고
공인(工人)들이 아랑위(兒郞偉)를 제창(齊唱)하였네.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해가 동쪽에서 나와 사해(四海)가 밝았네.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해는 서산으로 들어가고 한 마음이 가지런하네.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평원(平原)은 넓고 아득하며 하늘에서 내린 복조는 멀고 크네.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적선(積善)한 나머지 경사로 자손이 번성해졌네.
아랑위 들보를 위로 던지니 하늘에서 해와 달과 별이 온 천하에 비치네.
아랑위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땅으로 백가지 상서가 쏟아져 나오네.
엎드려 원하옵건대 춘추로 제사지내는데 재계하고 정성들여 효성을 반드시 다하고 경향의 여러 일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족의(族誼)를 강명(講明)하여 반드시 돈목하게 되면 어찌 우리 일가들이 선조를 사모함만 되리오 족히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것입니다.
공을 장사지낸지 599년 병진3월에
23대손 응주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