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휘 우승)신도비명

감사공 휘 우승 묘
소재지: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행양방


신 도 비

嘉善大夫戶曹參判諱友勝墓碑銘竝序
越歲執島島寇內躙逼京邑 宣廟卒起幸龍灣達官咸奔迸四竄時則靑松沈公方在戶曹正郞未及具梁糗從衛艱難卒效其勤力號才能臣萬曆壬寅卒官京畿觀察使後三年追錄從駕勳及宣武勞再贈公忠勤貞亮效節恊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靑溪府院君兼官如眞拜嗚呼遭時板蕩雲蒸龍變昭其功載榮名盟府庶幾趙襄申胥其人而國家錫報之典亦可謂盛矣按公諱友勝字士進號晩沙上距靑城伯德符爲七代是生溫與其嗣澮仍三世都上相判官諱湲舍人諱順門通禮諱達源京畿觀察使諱銓俱贈崇秩卽公之祀也沈氏再儷震極門戶高華異於它族獨公服禮敦儒行蹟學居業擧癸酉進士庚辰文科初隸成均館丙戌轉監察後歷禮曹戶曹佐郞慶尙京畿都事刑曹正郞及從衛西遷道拜正言持平時兵氛益熾邦域益駴所仰頼惟中朝極援公膺使介疾馳赴燕都血誠號龥中朝爲發李如松提大軍東出殲西京賊 上卽擢公承政院承旨而已乞養得春川府丙申拜戶曹叅議國家新羅鋒公私赤立至事難調集輙委公辨釐西厓相重之唯 上亦以公爲材特晋公本曹叅判天兵塞都下作氣勢公肆剽刧里閭無敢出聲適經理楊公詢公兵士陵藉狀公於座手疏其實累百言楊公大加奬詡而門下嗛意發惡言 上爲罷公職益歎公敏而有文庚子以右尹兼官備邊司明年按邦畿積久勞浸以成病至壬寅大夫人棄諸孤公執禮自盡疾遂革以其年六月捐館葬廣州退村負癸之原公天資闊達明而不튧辨而不煩淸明介立而不忤於物事親孝友於昆弟仁於宗黨與朋友交終始一於誠始釋褐被當路沮閼陸沉下僚初無滔滔色逮其遭契竭節以奉公用之盤錯弛無不可尤長於剔劇遇事精觧剖決游刃畿輔孔道也大而督府將佐下至輿隸結轍日千百率以敲朴濟欲儲胥供億蹄穿踵踣交殞斃道路散亡繹騷公以爲邑有大小役有偏重而長每臆調而意意發故蒙吏占其便而小邑受其病乃算一道田賦總計劑爲分數視其多寡而均其科役民始息肩其後遂踵爲故事朝廷方倚公更革獘條而公遽歿矣公立朝以十三年聞國政未滿九載其猷爲己犖犖彰著如此使天假以齡究行其志業功施所及詎但只此而已惜哉夫人順興安氏縣監其考也御家有法晨起岸坐莅事婢使俯首聽職閫以內肅而治也後公十年卒而祔焉無子取兄子詻爲後位輔國崇祿大夫吏曹判書庶子譜武科縣監判書二男五女男掌令光洙縣監光泗女適許賓監司吳端安千健柳蓂李嚴光泗七男樟栢相栢進士掌令子之餘幼監司五男挺一叅判挺垣修撰挺徫佐郞挺璧挺昌進士四女長奉事李象昇次麟坪大君夫人次進士李壽蕃柳以泰千健生光郁縣監蓂生承培引儀巖生天漢自公歿五十四年事日以闇昧不佞外王母實爲公娣不佞쨻嘗以童子事公略記一二以爲銘曰
惟靑有沈有濬其源二后承乾三相贊元繩繩不替乃有我公爰發邁迹自躬潛于潛于卽署處屯乃亨游從牧園契我天朝掌貳邦賦遂殿畿服由玆世職奏功允若旣忠旣孝勤顇毁終崇封寵贈豈釋震恫惟名與閥載列于永刻詩于堅以代銘鼎

李敏求 撰


가선대부호조참판휘우승묘비명(번역문)
지난 임진(壬辰:1592)년에 섬을 지키던 도구(島寇)①가 서울을 침범하고 들어오니 갑작스러운 일이라 선조께서 의주로 피난하고 조정관리들이 다 달아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니 이 때 청송 심공(靑松 沈公)이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있었는데 미처 비상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으나 끝내 어려운 고비를 감당하였으므로 훌륭한 신하라는 이름을 얻었고 임인(壬寅:1602)년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서 사망했는데 3년 뒤에 왕을 잘 모셨다는 공훈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기록이 추가되고 다시 공에게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이 추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을 겸하니 관작이 사실과 같았더라. 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당해 구름이 올라 용으로 변하여 그 공이 소명하며 영화스러운 이름이 맹부(盟府)②에 실렸으니 거의 조양(趙襄)과 신서(申胥)같이 국가에서 보훈을 내림이 가위 융성하였다.
공의 이름은 우승(友勝)이요, 자는 사진(士進)이요, 호는 만사(晩沙)이다.
멀리 윗대의 청성백(靑城伯)인 덕부(德符)는 7대조이고 이분이 온(溫)을 낳으니 그의 아들 회(澮)와 더불어 3대가 모두 재상(宰相)이다. 이름 원(湲)은 판관(判官)이고, 이름 순문(順門)은 사인(舍人)이고, 이름 달원(達源)은 통례(通禮)이고, 이름 전(銓)은 경기관찰사로 다들 높은 벼슬을 증직으로 받았는데 공이 제사를 받드는 4대이다. 심씨가 다시 크게 떨쳐서 가문을 높이 빛냈으니 타족들보다 특이했고 유독 공은 예법을 지키고 유가 선비집안의 품행을 독실히 하여 학문을 이수하고 가업을 이었다.
계유(癸酉:1573)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7년 뒤인 경진(庚辰: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성균관에 예속되었다.
병술(丙戌:1586)년에 감찰(監察)이 된 뒤 예조와 호조의 좌랑(佐郞)을 거쳐서 경상도와 경기도의 도사(都事)를 지낸 다음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어가를 모시고 평안도로 파천(播遷)③갈 때 도중에서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을 배수(拜受)했다. 이 때 전세가 더욱 불리하여 국토전역이 유린당하니 의뢰할 곳은 오직 중국 조정의 극진한 원조뿐이었다. 공이 사신이 되어 부지런히 연경(燕京)④에 가서 피나는 정성으로 호소하니 명나라 조정에서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우리 나라로 출전하게 하여 평양 부근의 외적을 섬멸시켰다. 선조께서 곧바로 공을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승진 발령하였으나 공이 사양하고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
병신(丙申:1596)년에 호조참의(戶曹叅議)가 되었는데 병란 뒤에 국가가 모든 것을 새로 정비할 때 텅빈 실정에 지극히 어려운 일들을 다시 수집하고 조달해야 되는데 공에게 위임하여 분변처리하도록 하니 재상 서애(西厓)가 소중하게 여겼으며 더욱 임금께서는 공을 인재로 삼아서 호조참판(戶曹叅判)으로 특진시켰다. 명나라 병사가 서울지방에 가득하여 기세를 부리니 공공질서가 길거리에서 협박을 당해도 감히 말한마디 못할 지경이었다. 마침 명진(明陣)의 경리 양공(楊公)을 붙잡고 병사들의 거만한 상황을 의론할 때 공이 앉은 자리에서 타일렀으나 실상 수백 가지였다. 양공(楊公)이 그럴 것이라고 수긍하였으나 아랫사람들이 유감을 품고 발악하여 왕이 공의 직책을 그만두게 했으나 그러나 공이 민첩하고 문장력이 있음을 더욱 감탄하였다.
임인(壬寅:1602)년에 우윤(右尹)으로서 비변사(備邊司)를 겸하고 다음해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는데 피로가 오래 쌓여 병이 되었으니 어머니상을 입고 집례를 다하자 병이 더해져서 그 해 6월에 관사에서 죽으니 광주(廣州) 퇴촌(退村)의 계좌의 묘지에 장사지냈다.
공은 자질이 활달하고 밝으며 조용하면서도 말이 여유가 있고 맑은 절개에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척간에는 화목하고 친구간에는 시종이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사귀었다. 처음 평민의 옷을 벗고 관로에 나아갔을 때 나라가 외침에 빠져 못난 관료가 되는 것을 막고서도 처음부터 조금도 도도한 빛이 없고 공부(公簿)를 잡고는 지조와 절개를 다하여 봉공하며 얽히고 설킨 일들을 풀어 나가는데 못하는 것이 없고 더욱 척결에 능하여 일끝마다 정교하게 풀어 나갔으니 그 결재하는 것이 칼을 다루듯 쉬웠다.
경기관찰사로 부임했을 때는 크게는 지방을 독려하는 장수와 보좌관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 하인배까지 날로 백천 가지를 거느려 빈틈없고 박실하게 거두고 하인배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바지할때 난중인지라 서로 밟고 쓰러지며 도로에서 엎어져 죽고 흩어져서 소란하게 이어지니 공이 크고 작은 읍과 가볍고 무거운 일들을 관장한 어른으로서 항상 고르게 베풀고자 생각하고 애쓰나 생각들이 제각기라서 못난 관리들이 편의를 독점하여 작은 읍이 그 병폐를 받는고로 이에 도내 전체의 부세를 합계산정하여 나누고 그 많고 작은 것을 보아가며 부역을 고루 부과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어깨를 펴게 되고 그런 뒤에 관례를 연계해 나가니 조정에서도 믿게 되었다.
공이 폐단되는 조항들을 개혁코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공이 조정에 들어간 것은 13년째이고 국정에 명성이 들린 것은 9년이 채 못되나 그 계획은 스스로 세운 것이다. 공명정대함이 이와 같이 밝게 나타났으니 하늘이 나이를 더 빌려줘서 그가 하고 싶은 사업을 영구히 행하도록 했으면 공을 세우고 혜택을 베풂이 어찌 다만 여기에 그치리오. 아깝도다!
부인은 순흥 안씨인데 그의 부친은 현감을 지냈다. 가사를 이끄는데 법도가 있었으니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을 정돈하니 비복들도 자연스럽게 순종하여 집안 일이 엄숙하게 다스려졌다. 공보다 10년 뒤에 죽어서 합장했으며 자식이 없어서 형 우준(友俊)의 아들인 액(詻)으로 후사를 삼았으니 벼슬이 보국숭록대부 이조 판서이다. 서자인 보(譜)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판서는 2남5녀를 길렀으니 아들들은 장령(掌令)인 광수(光洙)와 현감(縣監)인 광사(光泗)이고 딸들은 허빈(許賓)과, 감사인 오단(吳端)과, 안천건(安千健)과, 유명(柳蓂)과, 이암(李岩)에게 각기 시집갔다. 광수는 아들이 없어 광사의 차남 백(栢)을 입계하여서 문과급제 후 병조좌랑이고, 광사는 七남을 두었는데 장(樟)과 백(栢)과 상(相)과 벌(橃)과 숙(橚)과 방(枋)과 탱이고, 감사가 5남을 두었으니 정일(挺一)은 참판이다. 정원(挺垣)은 수찬이고, 정위(挺횞)는 좌랑이고, 정벽(挺璧)과 정창(挺昌)은 진사이다. 4녀 가운데 맏딸은 봉사 이상승(李象昇)과 결혼하고, 둘째 딸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이고, 셋째 딸은 진사 이수번(李壽蕃)과 유이태(柳以泰)에게 각기 시집갔고, 천건은 현감 광욱(光郁)을 낳고, 명(蓂)은 인의(引義)인 승배(承培)를 낳고 암은 천한(天漢)을 낳았다. 공이 죽은 지 54년만의 일이라서 확실하지 못하며 나의 외조모가 공의 누이인 까닭에 내가 어릴 때 공을 모신 적이 있었고 대략 한 두 가지는 기억할 수 있어서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명(銘)에 이르되,
청송 땅에 심씨가 있었으니 그 근원이 깊었도다.
두 분 왕후가 임금님을 받들었고 세 분 재상이 으뜸으로 도왔도다.
연이어 융성하니 우리 심공 여기 있고 공적에 힘썼으나 자기의 몸 낮추었네.
관작을 낮추었으니 어려움에 처해서도 이에 형통하였네.
지방관장을 맡았어도 우리의 왕조를 근심했고 호조참판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지냈으니 대를 이은 관직으로 드리운 공적을 인정받았네.
충성과 효도를 다했으나 초췌〔피로〕를 못이겨 세상을 마쳤네.
봉작도 높고 증직도 많았으니 일찍이 큰 슬픔은 가셨으리.
명성이 문벌에 더했으니 영원히 사기에 실렸고 굳은 돌에 시를 새겼으니 이로써 명정을 삼았네.

이민구 지음.


註① 도구(島寇):섬에 사는 도둑. 일본인.
  ② 맹부(盟府):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
  ③ 파천(播遷):왕이 도성을 버리고 딴 곳으로 피난을 감.
  ④ 연경(燕京):중국의 북경. 명(明)나라의 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