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휘 대)행장

충장공 휘 대 묘소(경기지방문화재 제3호)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완장리


충장공 휘 대 재실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완장리


신 도 비


贈領議政行京畿觀察使諱岱行狀
公姓沈氏諱岱字公望號西墩考諱義儉儀賓府經歷妣高靈申氏文簡公諱光漢女以嘉靖丙午七月十日生幼聰悟十歲能屬文及壯慷慨好大節有邁徃之氣篤志於學不爲訓 通而已與寒岡鄭先生兄弟交志相愛慕準裁同異常所講究諷誦皆程朱性理之書爲文詞理沛然不爲骫骳語求工隆慶壬申中庭試乙科時議以公取世戚里子降補成均館病不仕十年陞典籍癸未出爲黃海都事乙酉除禮曹正郞後歷司憲府持平海運判官成均館直講承文院判校掌樂院僉正戊子選錄弘文館爲修撰陞校理應敎與諸儒臣校刊經書諺解今中外諸本皆本此尋拜議政府檢詳陞舍人移司僕寺正時公兄巖爲全羅道水軍節度使會倭寇湖南節度使失律 命誅之已而 上知枉狀 命赦勿誅追止之不及公慟兄死非辜貶瘁成疾不樂爲官每 除命下輒辭不就如是者凡六年强而居位者纔數月壬辰倭來寇中外大亂 上出幸關西公以侍講院輔德從中都官近侍臺閣從 上西者至碧蹄驛多留落欲歸者公衆叱之曰而曹享 君之榮祿今 國危急迺欲棄 君父而逃其亂耶有敢後者難已族矣於是諸臣之欲逃亡者頗復從至松京公白 上曰賊專軍幷銳直趣漢京湖西南則時不犯寇兩湖觀察使亦純臣宜急遣使徵兵衛行宮且以持兩湖心 上曰此吾志也誰當使者公曰主辱臣死臣不敢愛死臣請行 上卽命公爲督運御使遣之公受 命卽行至江都從海路入湖中所過大義諭軍民發於至誠聞者莫不感涕氣意俱起旣 成命復由陸海路凡二十五日歸報時 上在平壤卽召公問兩湖事歎曰板蕩誠臣眞謂若也 特陞拜承政院承旨於是二路勤王兵皆至雖不能渡漢而西如公特畵而使朝命達於湖而湖中士氣不遂燥者皆公功也賊陷兩都益西至大同江 上出平壤幸義州聞京畿觀察使權徵避寇山峽中民不知其處誰差宜者欲更之朝議以公爲國忘身可屬大事 特拜京畿觀察使進嘉善階時七月也公受 命慨然有淸寇難之志卽日辭行過安州見柳相國成龍謂曰昔程嬰杵臼特晉卿之客耳猶能以死存趙今國危如此吾與公當受難獨不得如嬰臼爲哉柳相國大義之分與其帳下士二人與俱時賊窋據三京勢益熾關畿數千里間道路擁隔公間道從海西入朔寧郡視畿政畿郡縣被寇甚民死散公私倉庾見焚掠殆盡公立營於朔募遺民收兵食無日不屬吏士而厲之于家國之關剪敗亡之無日調繕之不可以少怠及成軍無日不討軍實而申儆之于義之不可悖倭奴之毒亂而終必蕩定訓之以時有反事有間孤軍致死可殲强寇又爲文通諭畿左右曰 國家休養生靈二百年今 主上失守在草奔爾等知國恩知死君難之義乎爾等齊致死京城指期可復對士民言輒痛哭 咽人皆感憤曰孰是公也而可無死乎奮願從者數千人又潛遣人入京城召募京城人始知有王官伯在邇爭出赴公者日益衆義聲聞一道時義兵將禹性傳屯江都欲與公共守江都數遣使邀公人亦有勸公入江都者公曰吾受 命京畿今入江都是棄畿於賊也籍第幷兵一島守固而軍完非 上之所以命臣者也吾當軍於此與江都義兵結爲聲援協謀而邀天之衷不濟則唯有死耳飭柵簡士規置軍事晝夜不解衣每按行輒先記告郡縣建旌麾簫角前道如舊儀不爲畏避計時公軍去賊屯僅一舍賊懼日司間以心公公乃進軍漣州之澄波渡具狀奏 行在獻枾數百枚 上分賜諸從臣曰見此如見沈岱嘉歎久之公旣處交地兵孤賊數出兵以勢攻伏兵擊敗之斬獲頗多賊又悉兵薄諸江公親督士拒擊却之復與楊州牧使高彦伯謀大擧兵討京城賊使人約都中人剌候爲內應都中人之應之者皆勸或謂公大寇不可輕且徐圖之公曰人心乃天意也人心欲開官軍此殆天意欲滅賊耶計未決京城賊從淺灘潛渡軍襲敗公軍公徼兵復聚退屯朔寧治軍械謀再擧兵進時都人成汝諧嫁其女弟于賊將欲爲賊貿公出詣公軍求居幕府許之已而引賊衆乘不儆夜襲之公有孼子名賤出常從掌養馬柳相國所分與壯士姓張者爲裨將常在左右張裨將覺有賊疾趨入臥內告事急請與跳出呼賤出持馬來賤出已乘而走公步出次所坐館後樹下曰此吾死所也賊疾呼曰觀察使安在張裨將出曰我觀察使也誰呼我者賊斷其首而去公與陽城縣監尹敬元亦同時遇害時壬辰十月十八日也壽四十七公之兄子大觀歛公屍殯于郡後使從奴守之賊旣殺張裨將後覺其非是求公屍處不得賂遣人持饌醪詭守奴曰公嘗有德於我願一奠哭公死何在奴疑其詐始微之見其哀泣以爲誠而告其處其夜賊復出取公之首懸之鍾街數月面如生高彦伯貨守倭得出之歸其元于家敗書聞 上慟傷之爲之泣下百姓聞之知與不知莫不流涕曰賊未平而失此忠義人嗟奈民國何癸巳春家人葬于南陽之樣洞 上命道臣厚賜葬좳所當得是年十月 上還漢都 下敎中書曰沈某死國予悼念之不能忘其妻子月給米布使得共祀事旣三年又 敎曰沈某之子當已除喪其與一縣無使孤寡飢寒公子大復甫勝冠 特拜構城縣監公敗死之年十一月初 贈吏曹判書甲辰錄扈 聖功二等又 贈議政府左贊成靑原君又以宣武原從功一等加 贈領議政府院君所以恤其後顯其魂者於是至矣公性高亮剛方內行飭備事親孝單志單物居喪盡喪禮塚廬三年不見齒門庭之內稱娖有紀與夫人敬相待如賓下至僕隸男女亦不相授受敎子弟嚴而有序常以小學書爲敎之本而諄諄誘道之遇人溫恭然惡惡甚不能容人之過諸與從遊者皆嚴憚之有失輒相謂曰公望知不及在朝毅然自守不以禍福利害易於位而爲自覆之術憤世人之好惡與己戾也嘗作雪竹少人知之歌至今樂人猶傳之善篆隸世多臧去以爲寶及寇難從出至關一隅迮而受畿節於敗亂之後形格勢單無適而步其志而猶以定傾存宗社爲己任極身營軍備義誠激士心使畿民易視而爭湊公垂得以奮難有成雖天命不合一瞑而無二意其忠烈足以不負平生之學顧不偉哉論者或言公狎敵而脫不爲前後慮而備於其反也使校焉者得以入其訃又曰未能兵而身自將坐不能集事此二說者皆失論也方倭之肆侵軼也嶺漢南北城邑瓦解人恤所底顧望於逆順之地當此之時猶將旌公以徇於國而先自秘閉吾身回疑吾民逆虞之爲故則又惡能形吾之義而致民之志哉公之心公所自信也時所指爲可使將者又非素嘗試者也公所將卒又非得素拊循者也使不素試者將新集之兵雖戰陣之間變忽悠闇之爲勝而一或陷敗則無它聲烈可以綴民情扶士氣而賊安受吾燼寧吾杖義而效吾心廣集兵而親矢石不幸而敗而死猶足立義使民感發有奮心而棍志力於 君上承之者庶幾且爲後圖盖傳所謂善死者不亡此公之心也夫謂公漏於是耶其後 聖業中興實賴 皇明之力而凝民於義不終撓於賊氛使 皇明諸將得以爲兵要誰之力也使識者第功當時扈 聖宣武諸勳臣右於公者能幾人哉後之君子獨恨不親報其心耳張裨將爲公死亦烈士也傳者失其名惜也公配完山崔氏叅判弘僴女以公之志行高於世而夫人事之無違德其婦德可知旣 贈公進封貞敬夫人乙丑五月十三日卒壽七十八合葬公墓 宣文大王七年丙申公子司諫公改卜兆得龍仁儀鳳山九成洞亥坐原移墓合葬如禮公之歷官文牒旣蕩失於寇難家庭所傳僅一二耳又恐志節之磊落動人者滋久而不盡傳於後也謹就而撰次爲狀以俟立言者禮曹判書兼大提學權愈撰

증영의정행경기관찰사휘대행장(번역문)
공의 성은 심씨(沈氏) 휘는 대(岱),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이다. 아버지의 휘는 의검(義儉)이니 의빈부(儀賓府)의 경력(經歷)이요,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니 문간공 광한(文簡公 光漢)의 딸이다. 가정병오(嘉靖丙午:1546)년 7월10일 출생했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다. 10세에 능히 글을 짓고 다 자라서는 의욕에 넘쳐서 큰일하기를 좋아했다. 힘차게 나아갈 기질을 갖고 학문에 독실한 뜻을 두었으며 알뜰히 깨우쳐 주지 않아도 글 뜻을 통하고 말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형제들과 의지로써 사귀어 서로 애모하며 어떤 일이라도 기준에 따라 결정하고 항상 강독하고 연구하였으니 읊고 외우는 것이 모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으로써 글의 문리가 소낙비 쏟아지듯 하되 비뚤어진 말로 꾸며 대지는 않았다. 융경임신(隆慶壬申:1572)년에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로 합격하였는데 당시의 여론이 공에게 세척(世戚)의 자제라고 웅성거려서 성균관으로 낮추어 보직을 주었으나 병으로 인해 벼슬하지 아니하고 十년만에 전적(典籍)에 올랐다. 계미(癸未:1583)년에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어 나갔다가 2년 뒤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고 뒤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해운판관(海運判官), 성균관 직강(直講), 승문원 판교(判校), 장악원 첨정(掌樂院 僉正)을 거쳤다. 무자(戊子:1588)년에 홍문관(弘文館)으로 선발되어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교리(校理) 응교(應敎)로 올랐는데 여러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경서(經書)의 언해(諺解)를 간행하고 교열하였는데 지금 여러 곳에 있는 책들이 모두 이를 본받은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고 사인(舍人)으로 오른 다음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는데 이 때 공의 형인 암(巖)이 전라도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으나 마침 이 때 왜구(倭寇)가 침범하고 호남절도사가 군율을 실추한 죄로 왕명에 의해 사형되었는데 곧바로 상감께서 보고서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죄를 사하고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나 때가 이미 늦고 말았다. 공이 형의 무고한 죽음이 원통하여 몸이 쇠약하여 병이 되었고 벼슬살이가 즐겁지 않아 매양 벼슬이 내렸으나 이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적이 무릇 여섯 차례였으니 한창 나이에 직위에 있은 지가 겨우 두어달 뿐이었다. 임진(壬辰:1592)년에 왜병이 쳐들어와서 안팎이 큰 난리를 겪을 때 상감께서 평안도로 출행함에 공이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으로서 요인들과 함께 대전에 가까이 뫼셨는데 상감을 따라 평안도로 가던 자들이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서 뒤로 쳐지고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많으므로 공이 여럿을 꾸짖어 말하였다.
『너희들이 국록으로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나라가 위태해지자 임금님을 버리고 난중에서 도망치고자 하느냐? 그렇게 되면 후일 동류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도망하고자 하다가 다시 따라 부쳤다. 개성에 도착하여 공이 상감께 아뢰어 말하였다.
『적군의 정예부대가 오로지 서울로 향해 곧바로 진격하였으므로 호서와 호남지역은 적이 범하지 않았을 터이니 양도의 관찰사 또한 무사할 것입니다. 신은 마땅히 급히 사신을 파견하여 징병을 모집하여 행궁(行宮)을 보위케 하고 또한 양도의 민심을 수습하고자 합니다.』
상감께서 이는 나의 뜻이라고 하시며 누구에게 사자를 맡길까 하신데 공이 나아가 말하였다.
『주상께서 욕되시면 신하는 죽어야 되나니 신이 감히 신하로서 죽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가기를 청하나이다.』
이에 상감께서 즉시 공에게 독운어사(督運御使)를 삼아서 파견토록 명하였다. 공이 명령을 받들어서 즉시 강화도에 도착하여 해로를 따라 호중(湖中)으로 들어가며 지나는 곳마다 큰 의리로써 군과 민에게 효유하며 지성껏 발호하니 듣는 이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 없고 의기가 함께 솟아 올랐다. 이리하여 명령을 완수하고 다시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무릇 25일만에 돌아와 보고하였다. 이 때 상감께서 평양에 계셨는데 즉시 공을 불러 양도의 사정을 물으시고 탄식해 가로되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정성스러운 신하는 진정 너로구나!』
하시고 특별히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로 올려 주었다. 이에 두 갈래의 근왕병(勤王兵)이 모두들 도착하였다. 비록 한강을 건너 평안도로 오기 어려웠으나 공이 특별한 계획을 세워 조정의 명령을 충청, 전라 양도에 도달케 하고 양도의 사기가 살아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공적이다. 적이 두 도읍을 함락하고 더욱 평안도로 진격하여 대동강에 이르니 상감께서 평양을 출발하여 의주(義州)로 행차할세 소문에 경기도 관찰사인 권징(權徵)이 왜병에 밀려 산중으로 피했는데 백성들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기에 누구나 알맞은 자를 차출하여 경질하고자 하는데 조정의 의론이 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으니 가히 대사를 맡길만 하다고 하여 특별히 경기도 관찰사로 삼고 가선(嘉善)계위에 진급시켰으니 이 때가 7월이었다. 공이 명을 받자 결연히 병난을 맑게 할 뜻을 갖고 당일로 출발하여 안주(安州)를 지날 때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을 뵈었는데 류상공(柳相公)이 말하기를,
『옛날 정영(程쵥)과 저구(杵臼)는 특별히 진경의 손님이 되어 능히 죽음으로 조(趙)나라를 보존하였는데 지금 나라의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내가 그대와 더불어 마땅히 병란을 감수하게 되면 어찌 정영과 저구만큼 못하겠는가!』
이 때 류정승의 대의명분으로 그의 막하관 2인을 공에게 나눠주어 함께 있게 하였다. 적들이 삼도(三都) 진을 치고 그 기세가 더욱 치열하여 관서와 경기 수천리 사이의 도로가 막혀 공이 사이길을 따라 황해도 삭녕군(朔寧郡)으로 들어가며 경기도의 군현을 보살폈는데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 백성들이 죽고 흩어져 있었으며 공사간의 창고들은 불에 타서 거의 소진되고 말았다. 공이 삭녕에 영채를 세우고 나머지 백성들을 모집하여 군병과 식량을 수습하고 하루라도 관리들을 모아 독려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국가의 비고 허물어져 폐망한 곳을 권면하게 고루 다듬어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드디어 군진을 편성하여 매일 군영의 실정을 토의하고 의롭게 신칙하여 적군의 독란에 어그러짐이 없게 하여 마침내 필연적으로 탕평하게 되어 갔다. 시기를 보아 일을 바로 잡고 그 사이 외로운 군사로서 죽음을 각오하면 가히 강적을 섬멸하게 된다고 훈계하였다. 또한 격문을 지어서 경기 좌우로 효유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백성들을 2백여 년 간 휴양시켜 오다가 이제와서 주상께서 수비하지 못하시고 풀밭에 계시게 되니 너희들은 국은을 깨닫고 임금님이 어려울 때 의리로써 죽음을 알아야할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죽음으로써 항거하게 되면 서울의 수복이 멀지 않을 것이다.』
군사와 백성에게 대하여 호소하며 문득 통곡하고 목이 메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고 분통해 하며 「이분이 누구이신고 정말 죽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분발하여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또한 몰래 사람을 경성으로 파견하여 성중 사람들을 불러 모집하니 비로소 왕과 관원들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다투어 공에게 붙쫓아오니 날로 그 무리가 더해지고 의로운 소리가 왼 도내에 들렸다. 이 때 의병장 우성전(禹性傳)이 강화도에 둔진하고 있다가 공과 함께 강화도를 지키고자 자주 사람을 보내와서 공을 맞이하였으며 도민들도 공으로 하여금 강화도로 들어오도록 권하는지라 공이 말하였다.
『나는 경기도로 명령을 받았는데 지금 강도(江都)로 들어가게 되면 이는 경기도를 적에게 버리는 것이다. 문적을 옮기고 군병을 아울러서 한 섬을 굳게 지키면 군영이 완벽하되 이는 상감께서 신에게 명령하신 소이가 아니다. 나는 마땅히 군영을 여기에 두고 강도의 의병으로 더불어 서로 결탁하여 성원하고 협력하여 하늘의 정성을 맞이할 것이고 구제되지 못하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군영과 규율을 정비하여 군사를 설치하고 밤낮 옷을 벗지 아니했다. 늘 안찰하고 다니며 문득 사전에 기록하여 군과 현에 통고하고 깃발을 세우고 앞길에 악대를 부려 옛 위의를 갖추어서 조금도 두려워 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 공의 군대와 적의 둔진이 겨우 30리, 적이 두려워하며 날마다 살피고 심리전으로 공을 흔들었으나 공은 이에 연주(漣州:지금의 연천)의 징파나루(澄波渡)로 진군하여 보고문을 갖추어 행재소에 드리고 감 수백 개를 올렸는데 상감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르기를
『이것을 보니 심대(沈岱)를 대한 것 같다고 하시며 가상하게 여기고 오래도록 칭탄하였다. 공이 이미 교전지에 정착하였으나 군병이 나약하여 적이 자주 출병하고 세력으로써 공격하였으나 복병으로 격폐시켰으니 참살하고 노획함이 많았으며 적이 또한 모든 병사들은 강으로 몰아가니 공이 친히 군사를 독려하여 격퇴시켰다. 다시 양주목사 고언백(楊州牧使 高彦伯)으로 더불어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서울의 적을 공격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내어 부중의 사람과 내약하고 정탐하여 내응토록 하니 부중의 응종자들이 모두 권장하였으며 혹은 공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큰 도적을 가벼히 할 수 없으니 서서히 도모하소서.』
공이 말씀하였다.
『인심은 이에 하늘 뜻이라 인심이 관군을 받아들이고자 하니 이는 필연코 천의가 적을 멸하고자 함이로다.』
계획을 결행하기 전에 서울에 있던 적군이 얕은 나루를 따라 숨어 건너와서 습격함에 관군이 패하였다. 공은 변방군사를 다시 모아 삭녕으로 물러나 둔치고 군병과 기계를 정비하여 다시 거병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 때 서울에 살던 성여해(成汝諧)라는 자가 여동생을 적장에게 시집을 보낸터라 적장을 위하여 공을 몰아붙이려고 공의 군영에 나아가서 막부에 기거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해 주었더니 오래되지 않아 적의 무리를 이끌고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기습을 해왔다.
공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천출(賤出)이었다. 항상 따라다니며 말을 기르며 관장하고 있었고, 류정승이 나누어준 성이 장(張)인 자가 비장(裨將)이 되어 항상 좌우에 있었는데 적이 느닷없이 쳐들어 오는 것을 깨닫고 침실에 들어와서 일이 급하게 되었음을 보고하고 함께 뛰어나가자고 간청하며 천출을 불러 말을 몰고 오도록 했으나 천출이 이미 타고 달아났었다. 공은 할 수 없이 걸어나와서 막사 뒤에 있는 나무 아래에 앉아 이르기를 「여기가 나의 죽을 장소」라 하였다. 적이 소리를 지르며 관찰사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장비장이 앞에 나가 말하였다.
『내가 관찰사이다. 나를 부른 자가 누구냐?』
적이 그의 머리를 베어 갔고 공과 양성현감 윤경원(尹敬元) 또한 동시에 해를 당했으니 이 때가 임진(壬辰:1592二)년 10월18일이었으며 나이 47세였다. 공의 조카 대관(大觀)이 공의 시체를 거두어 군영 뒤에 빈소를 노복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적군이 장비장을 살해한 뒤 그가 관찰사가 아님을 깨닫고 공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알려고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보내서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빈소를 지키는 자에게 말하였다.
『공께서 일찍이 나에게 덕을 베푸셨으니 원하건대 한 잔 술을 올리고 한 번 울고자 한다.』
지키는 자가 그의 거짓을 의심하고 처음에는 숨겼으나 그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정성스럽다고 여겨 공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더니 그날 밤에 적이 다시 나타나서 공의 머리를 취해가서 종로 거리에 매어단 지 수개월이 되었으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뒤 고언백(高彦伯)이 수비하는 왜인에게 돈을 주고 얻어 내어 원래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패했다는 글을 상감께서 들으시고 몹시 슬퍼하시고 위해서 울었다. 아래 백성들도 이 소문을 듣고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 없었으며 적을 평정하지 못한 채 이와 같이 충의로운 분을 잃었으니 아! 백성들과 나라는 어찌될고 하였다.
계사(癸巳:1593)년 봄에 가족들이 남양의 양동(南陽樣洞)에 장사를 지냈는데 상감께서 도의 관원에게 명하여 장사비용을 후하게 주었다. 이해 十월에 상감께서 한양으로 돌아와서 교서(敎書)를 내리시며 심대(沈岱)는 나라를 위해서 죽었으니 나의 슬픈 생각을 잊을 수 없다고 하시며 그의 유족에게 매월 양식과 포백을 주어서 함께 제사토록 하였다. 이렇게 3년이 지난 뒤 다시 깨우쳐 이르셨다.
『심모의 아들이 복상을 마쳤을 것이니 그의 현령에게 일러 고아와 과부가 얼고 주리지 않도록 하라.』
공의 아들 대복(大復)을 20세 때 특별히 횡성현감(橫城縣監)에 제수하였다.
공이 전사한해 11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이 내리고 12년 뒤인 갑진(甲辰: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녹훈되고 또다시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더해지고 청원군(靑原君)에 봉했다. 그 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영의정(領議政)과 부원군(府院君)으로 증직이 더해지니 그의 후손을 구휼하고 죽은 이름을 나타내고자 한 소이가 이에 이르렀다. 공은 성품이 고상하면서 강직하여 행실이 완벽하고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 물심이 동일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상례를 다하여 3년 간 시묘함에 웃는 법이 없었다. 집안에서는 늘 기율을 지키고 삼가며 부인과는 서로 공경하여 손님같이 대접하며 아래로는 노비에게 이르기까지 남녀가 서로 직접 주고받지 않았으며 자제를 질서 있고 엄하게 가르쳤으니 항상 소학(小學)의 글로써 교육의 근본을 삼았으며 타이르고 또 타일러서 도덕으로 유도했다. 사람을 만났을 때는 공손하고 따뜻했으나 악덕을 미워했으며 능히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 모든 교유자들이 다들 엄했으며 실수를 몹시 꺼렸으니 서로들 공의 바램에 미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조정에 있을 때는 굳게 뜻을 지켜서 화복과 이해로써 직위가 바뀔가봐 스스로 덮어두지 않았으며 세인들이 악한 짓을 좋아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몸소 꺼렸다. 일찍이 설죽시(雪竹詩)를 지었는데 어린 사람들이 좋아하여 노래로 불렀으며 지금껏 노래하는 이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세상에 많이 보관되어 있어 세월이 흐를수록 보배롭다. 왜구가 침범하여 국토를 유린하니 전란으로 밀려난 뒤에 경기관찰사가 되었으니 형세가 막히고 고단하여 상대하기 어려웠으나 그의 의지대로 기울어진 것을 정리하며 종사의 유지는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신명을 다하여 군비를 경영하고 의리와 정성으로 사기를 격동시켜 경기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보고 다투어 모이도록 하였다. 공이 분발토록 이끌었으나 성공시키기 어려웠으니 비록 천명이 맞지 않더라도 한 번 눈을 감고 두 가지 마음을 먹지 않았고 그와 같은 충렬은 평생의 학문을 저버리지 않음이니 회고할 수록 위대하지 않을손가? 평론자들이 혹 말하기를 공께서 적세에 눌려서 앞뒤를 고려하지 아니하고 일을 반전시켜 벗어나고자 했으나 틀을 짜 놓은 자의 그 계교에 말려들었다 하고 또는 병사에 능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장수 자리에 앉아서 일을 매듭짓지 못했다고 하나 이 두설은 모두 정론이 아니다. 바야흐로 왜구가 멋대로 침범해 들어오니 영남과 한강의 남북 사이의 성읍들이 함몰되고 사람들은 구휼할 길도 없이 희망이 억망으로 된 처지라 이 때를 당하여 오히려 장수가 되었으니 공이 나라에 따라 죽어 먼저 스스로 내몸을 버려서 우리 백성들께 의심을 사게 하고 염려스럽게 연고를 삼았으니 이 어찌 능히 나의 대의를 나타내고 백성들의 뜻을 이루겠는가? 공의 마음은 공이 스스로 믿는 바이다. 당시 지목한 바가 옳다면 장수로서 본래 시험하지 아니했으니 공이 장수된 것은 마침내 본디부터 어루만지며 위로받지 못하였다. 본래부터 시험치지 않은 자로서 장차 새로이 병사를 모았으니 비록 전진중에 홀연히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 이길 수 있는 것을 혹 한차례 함몰하게 되면 변명할 소리가 없다. 충렬로써 가히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안고 사기를 부축하여 대적하게 되면 어찌 우리의 여력을 당하리오 차라리 나의 대의를 잡고 내 마음을 본받아 널리 병사를 모으고 몸소 싸우다가 불행하게 패하여 죽더라도 오히려 만족하게 의리를 세운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감정을 일으키고 의분심을 갖게 하여 군왕에게 심신을 묶어 받들게 되면 거의 또한 뒤를 도모하게 되리니 전(傳)에 이르기를 「보람 있게 죽는 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마음씨다. 무릇 공을 평하는 데 있어 이것이 빠진 것이다. 그 뒤에 왕업이 중흥하였으니 실로 명나라의 힘을 의뢰하였으되 대의가 백성에게 응집되어 마침내 적의 재앙으로부터 흔들림이 없었으니 명나라 장수들로 하여금 병사(兵事)의 요점을 얻어 익히게 됨은 누구의 힘이었는가? 식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공적을 꼽을 것 같으면 호성(扈聖)과 선무(宣武)의 훈신 중에서 공보다 앞선 자가 능히 몇 명이겠는가?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다만 그의 마음을 친히 보답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장비장(張裨將)은 공을 위해 죽었으니 또한 열사(烈士)였으며 전하는 자가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으니 애석하다. 공의 부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이니 참판 홍간의 딸이다. 공의 지조와 행실로써 세상에서 높였으며 부인이 공을 섬김에 덕성을 어기지 않았으니 그의 부덕을 알만하다. 지난날 공에게 증직할 때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진봉되었다. 을축(乙丑:1625)년 5월13일 생을 마치니 수(壽) 78세이고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선문대왕(宣文大王:효종) 7년 병신(丙申:1656)년에 공의 아들 사간공(司諫公)이 묘자리를 옮겨 잡았으니 용인(龍仁)의 의봉산(儀鳳山)에 있는 구성동(九成洞)의 해좌 언덕에 이장하고 예법대로 합장하였다. 공의 관직 및 이력과 문첩(文牒) 등을 왜란중에 모두 잃어버리고 겨우 한 두권이 전하고 또한 두드러진 지절이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후세에 다 전하지 못했다. 삼가 글을 다듬어서 행장(行狀)을 삼았으니 더 정확한 증언자를 기다린다.

예조판서 겸 대제학 권유 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