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양공(휘 순경)신도비명

호양공 휘 순경 묘소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사곡리(우랑동)


신 도 비

묘 표 석


胡襄公諱順徑神道碑銘竝序
沈氏系出靑松顯於麗季入我 朝最盛有諱德符位特進輔國崇祿大夫左政丞靑城伯寔公高祖生諱溫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卽我 昭憲王后之皇考寔公曾祖生諱澮輸忠保 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靑松府院君 贈諡恭肅公寔公祖生諱湲奉列大夫內資寺判官 贈純忠積德補祚功臣嘉善大夫吏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卽公考視公秩贈也妣貞夫人李氏籍完山中軍副司正義坵之女宗室義安大君和曾孫以天順六年壬午十二月初六日生公公諱順徑字可遵少有俊資遊戱異凡兒恭肅鞠親于家特鍾愛敎以詩書及長射御絶倫擢弘治壬子武科甲寅選授宣傳官拜訓鍊院判官出補東萊縣令有治績考滿拜儀賓都事陞掌隸院司儀兼內乘轉忠勳府都事甲子拜司饔院僉正陞副正特加折衝時燕山主荒亂因打圍邊圉馬忤旨杖配延日縣乙丑大起獄事公亦被囚禁獄李相國荇授歷代吏書未嘗少懈丙寅九月我聖上反正公有叅謀推戴之功 賜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之號進階嘉善封靑城君時慶尙兵使有闕朝廷難其人特拜公爲節度使公撫卒禦邊皆得其宜時論多焉秩滿封君己巳丁外艱服闋還封君兼都摠府副摠管壬申拜全羅道兵馬節度使以養母李氏年請終養遂遞封君甲戌拜慶尙道左兵馬節度使乙亥丁李氏憂辛巳以聖節使赴京師丙戌又以正朝使再赴京師丁亥拜漢城左尹兼知訓鍊院事戊子辭遞壬寅四月以疾卒于正寢享年八十一訃聞 上悼甚遣官吊祭官庇喪事葬于坡州治東牛浪洞甲坐庚向之原公英敏多大略心平氣和物無與忤與兄弟雍雍待朋友怡怡人人皆得其歡心性又謹勅居官治事詳密周愼雖閒居未嘗夷肆廢禮恬靜自守不事干請日以圖書花竹自娛常曰我以武臣受國厚恩身參盟府致位二品年踰八十人間所願畢矣子弟欲請老職掉頭不許應其操履不變如此矣世昌少從里閈知公莫如余又與公之胤子僉正爲同榜甲友遂囑余爲銘不敢以文拙辭姑志公之世系子孫之富而歸之配貞夫人申氏高寧望族性端嚴精敏資識過人事公承順無違家事整理先公而卒於己丑生三男三女長曰希源中辛酉生員今爲內資寺判官次曰興源中癸酉進士先公亡次曰引源爲果毅副司果先公亡側室子曰長源爲羽林衛僉正娶郡守韓世俌之女生二男一女長曰泓壬辰武科捷戊戌英試爲司憲府監察次曰演宣略副司果女長適生員金世葉後娶僉使康績之女進士娶辛世卿之女生一女適進士黃耆老司果娶朴世矩女生一女適弘文館直提學閔世良齊陽生一男雲爲部將叅奉生三男一女男曰孔賓次男皆幼銘曰維嶽降神世作碩輔 恩洽蒸黎勳在王府慶種塗莘門盈圭組光前啓後纘序承祖公禀異質妙年業武擢登大科從仕寔擢出宰百里爲民召杜作鎭南紀爲國御侮盟藏金匱惠遺南土頤養晩年天助多祐圖書一室琴酒爲伍物與爲春心絶喜怒壽餘八耋身無疾疚然仙化豈嬰二竪坡山之麓松栢之數來卜公宅垂視千古
大提學 成世昌 撰

호양공휘순경신도비명병서(번역문)
심씨(沈氏)는 계보(系譜)가 청송(靑松)에서 나와 여계(麗季)에 드러났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가장 성대하였다. 휘를 덕부(德符)라 하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이 특진 보국숭록대부 좌정승 청성백이었으니 이분이 공에게는 고조(高祖)가 된다. 휘 온(溫)을 낳으니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곧 우리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며 공에게는 증조(曾祖)가 된다. 휘 회(澮)를 낳으니 수충보사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 청송부원군 증시(贈諡) 공숙공(恭肅公)이니 이분이 공의 할아버지다. 휘 원(湲)을 낳으니 봉렬대부 내자시판관(奉列大夫 內資寺判官)으로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는데, 곧 공의 아버지로 공의 벼슬 때문에 증직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로 본관 완산(完山)이고 중군부 사정(中軍副 司正) 의구(義坵)의 따님이며 종실(宗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증손이다.
천순(天順) 6년(1462) 임오 12월 초6일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순경(順徑)이요, 자는 가준(可遵)이다. 어려서부터 준자(俊資)①가 있어 놀이할 때도 범상한 아이들과는 달랐다. 공숙공(恭肅公)이 친히 집에서 길러 사랑을 쏟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쳤다. 장성(長成)하자 말 달리고 활 쏘는데 절륜(絶倫)②했으며 홍치임자(弘治壬子:149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2년 뒤 갑인년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발되었다가 훈련원 판관(訓鍊院 判官)으로 배명됐고, 이어서 동래현령(東萊縣令)을 지냈는데 치적(治績)이 있었다. 만기가 되자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로 옮기고 장례원사의(掌隸院司儀) 겸 내승(內乘)으로 승진하였다가 이어서 충훈부 도사(忠勳府 都事)로 전직됐다. 갑자년(1504)에 사옹원첨정(司甕院僉正)이 됐다가 부정(副正)으로 승진하고 절충(折衝)에 가자(加資)되었다.
이 때에 연산주(燕山主)의 황난(荒亂)③에 임금의 사냥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간하여 왕의 미움을 사서 연일현(延日縣)으로 장배(杖配)됐다. 을축년에 크게 옥사(獄事)④가 일어났는데 공 또한 잡혀와서 옥(獄)에 수금(囚禁)⑤됐는데 상국(相國) 이행(李荇)이 역대의 사서(史書)를 주어 읽게 하였으므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병인년(1506)에 우리의 성상(聖上)께서 반정(反正)⑥하자 공에게 추대(推戴)⑦하는데 참모(參謀)한 공이 있다고 해서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가선(嘉善)의 계(階)에 승진된 뒤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다. 이 때에 경상병사(慶尙兵使)에 궐원(闕員)이 생겼는데 조정에서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특히 공을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했다. 공은 병졸을 무마(撫摩)하고 변방(邊方)을 방어(防禦)하는 데 있어 모두 적절하게 처리하니 시론(時論)으로 칭찬이 많았고 만기가 되자 군(君)을 봉했다.
기사년(1509)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복(服)을 마치자 다시 군에 봉해지고 도총부 부총관(都摠府 副摠管)을 겸하게 하였다. 임신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이씨(李氏)가 연로하여 죽을 때까지 봉양할 것을 청하니 교체되어 다시 군에 봉해졌다. 갑술년(1514)에 경상도 좌(左) 병마절도사에 배명되었으나 이듬해인 을해년에 어머니 이씨의 상(喪)을 당했다. 신사년(1521)에 성절사(聖節使)⑧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고 병술년(1526)에 또 정조사(正朝使)⑨가 되어 두번째 북경에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좌윤(漢城左尹) 겸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가 되고 무자년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 임인년(1542) 4월에 병으로 정침(正寢)⑩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81세이다. 부고가 상감에게 알려지자 상께서 매우 슬퍼하시며 관원을 보내서 조문(引問)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며 관청에서 상사(喪事)를 비호(庇護)하여 파주군(坡州郡)의 동쪽 우랑동(牛浪洞)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성품은 영민(英敏)하면서 큰 책략(策略)이 많고 마음은 평온하고 기는 화합하여 남과 더불어 거스리는 일이 없었다. 형제(兄弟) 간에는 우애하고 붕우(朋友) 간에는 화합하였으며 사람마다 모두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었다. 성품이 또한 부지런하고 엄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일을 다스릴 때에도 항상 자상(仔詳)하고 치밀(緻密)하며 두루 삼가서 비록 한가로울 때라고 하더라도 옷깃을 풀어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염정(恬靜)⑪함을 스스로 지켜서 일이 없을 때는 구하거나 청하지 아니했다.
날마다 그림과 글씨와 꽃과 대나무를 스스로 즐겨서 항상 말하기를
『나는 무신(武臣)으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몸이 맹부(盟府)⑫에 참예하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며, 나이 80이 넘었으니 인간의 소원을 마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제(子弟)들이 노직(老職)을 청하고자 하면 머리를 가로 저어 허락하지 아니하니 그 조리(操履)⑬의 불변함이 이와 같았다. 세창(世昌)이 어릴 때부터 한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공을 잘 아는 것은 나만한 사람이 없다.
또한 공의 맏아들 첨정(僉正)과는 문과 동방이고 동갑이다. 이리하여 나에게 명을 위촉하므로 감히 글을 못한다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다만 공의 세계(世系)와 자손이 많음을 기록한다 하고 돌려보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신씨(申氏)로 고령(高寧)의 망족(望族)⑭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정밀하고 민첩하였고 자식(資識) 또한 과인(過人)하여 공을 섬김에 있어서 뜻을 받들어 따랐으며 어김없이 가사(家事)를 처리하였으나 공보다 먼저 기축년(己丑:1529)에 죽었다.
3남3녀를 낳으니 맏은 희원(希源)으로 신유(辛酉:1501)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지금 내자시 판관(內資寺 判官)으로 있으며 다음은 흥원(興源)으로 계유년(151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은 인원(引源)으로 과의부사과(果毅副司果)로 있었으나 역시 공보다 먼저 죽었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장원(長源)이니 우림위(羽林衛)로 있다. 첨정(僉正)은 군수 한세보(韓世俌)의 딸에게 장가 들어 2남1녀를 낳으니 맏은 홍(泓)으로 임진년(1532)의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무술년(1538)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이 됐고, 다음은 연(演)이니 선략부사과(宣略副司果)로 있다. 맏딸은 생원(生員) 김세엽(金世葉)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첨사(僉使) 강적(康績)의 딸이다.
진사(進士)는 신세경(辛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진사 황기로(黃耆老)에게 시집갔고, 사과(司果)는 박세구(朴世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민세량(閔世良)에게 시집갔다. 제양(齊陽)은 외아들 운(雲)을 낳으니 부장(部將)이 됐고, 참봉(叅奉)은 3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공빈(孔賓)이요, 다른 아들은 모두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높은 뫼에서 신기함을 내려 대대로 석보(碩輔)가 나왔네. 은혜는 백성에게 만족하게 베풀었고 공훈은 왕부에서 이루었네. 왕비가 탄생하는 경사가 있었고 문중(門中)에 규조(圭組)⑮가 가득하네. 전대(前代)를 빛나게 하고 후손의 길을 열어 주니 순서를 따라 조상의 위업을 이었네. 공은 남 다른 자질을 타고나서 젊은 나이에 무술을 익혔네.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이와 같이 키우셨네. 백리 땅에 출재(出宰)⑯하여 백성을 위하여 사직을 빛냈으며 남방(南方)에 진장(鎭將)이 되어서는 나라를 위해 도적을 막았네. 공신녹권은 금궤(金匱) 속에 보관하고 은혜는 남방에 베풀었네. 만년(晩年)을 편안하게 보양하니 하늘이 도와 복이 많았네. 도서(圖書)는 방에 가득하고 거문고와 술이 벗이 되어 타인과 더불어 하는 일을 춘화(春和) 같이 좋아하고 마음 속에는 이미 기쁨과 성냄이 모두 끊어졌네. 수가 팔십을 넘었으나 몸에는 병이라고는 없었네. 홀연(忽然)히 신선되어 가시니 어찌 병에 걸려서라고 할까. 파주(坡州)의 산기슭에 소나무와 잣나무 두어 그루 있어 와서 공의 유택(幽宅) 정하니 천고(千古)에 전해짐을 보이리라.』
대제학(大提學) 성세창(成世昌)이 지음.

註① 준자(俊資):준재(俊才). 뛰어난 재주 또는 그 사람. 영재(英才).
② 절륜(絶倫):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남. 절류이륜의 준말.
③ 황난(荒亂):황음(荒淫)하고 문란(紊亂)함.
④ 옥사(獄事):반역(叛逆) 죄인 등 중대한 죄를 다스리는 일.
⑤ 수금(囚禁):죄수(罪囚)를 체포해서 구금(拘禁)하는 일.
⑥ 반정(反正):정도(正道)로 돌아가는 일 난세(亂世)를 바로잡아 태평(太平)한 세상으로 되게 함. 즉, 포악한 임금을 몰아내고 바른 임금을 대신 세움.
⑦ 추대(推戴):떠 받듬. 공이 있는 사람을 상당한 지위에 올려 놓음.
⑧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
⑨ 정조사(正朝使):새해가 되면 중국 황제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위해 보내지는 사신 신년하례사(新年賀禮使).
⑩ 정침(正寢):정전(正殿) 평상시 거처하던 침실(寢室).
⑪ 염정(恬靜):평온하고 조용함.
⑫ 맹부(盟府):반정을 위해 죽기를 맹서한 사람들이 일을 성취한 뒤 당시의 기록을 보관하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곳.
⑬ 조리(操履):조행(操行). 몸을 가지는 행실.
⑭ 망족(望族):명망(名望)이 있는 집안. 즉 갑족(甲族).
⑮ 규조(圭組):조정 관원들이 일상에 쓰는 홀과 갓끈. 전하여 조정 관원.
⑯ 출재(出宰):조정의 벼슬아치가 승직 또는 전보(轉補)되어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