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녕상공 (휘 순택)신도비명

청녕상공 휘 순택 묘소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묘 표 석


창녕공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領議政靑寧公大勳位諡文忠靑松沈公神道碑銘竝書
光武十年丙午二月二日領敦寧司事公爵靑寧沈公卒于第訃聞 上下隱卒之詔曰此大臣風儀粹雅性度和惠臨事決疑雍容密勿紳笏中書十有餘載殫竭忠悃助朕爲理裨益實多及夫邦命維新蔚有輔弼之勳勞退老鄕第尙有蓍龜之依毗年齡彌邵精識不衰豈意逝單遽至朕心愴䀌無以爲懷卒靑寧公喪東園副器一部輸送禮葬等節照例擧行遣亞卿致祭祭文親撰以下節惠之典不待狀葬前擧行太常以勤學好問事君盡節宜諡文忠報曰可於是公之終始哀榮兼備越三月十六日葬于振威郡東麓向午之原將考令式勒文쬞首顯誦公德傳之無窮公之從父兄之子相璜狀公行請文於鶴鎭義有所不能辭謹按公諱舜澤字穉華高麗衛尉丞諱洪孚始籍靑松 本朝有諱德符侍中靑城伯諡定安策開國勳至領議政靑川府院君諡安孝諱溫領議政靑松府院君翊戴佐理功臣諡恭肅諱澮領議政諡忠惠諱連源領敦寧府事靑陵府院君諡翼孝諱鋼四世三公兼爲國舅者兩世益大以顯翼孝公長男諱仁謙郡守仲男諱義謙大司憲靑陽君持淸議領袖士林生諱㤿出后郡守公五傳而諱宅賢行吏曹判書諡淸獻不主蕩平論有大名於公爲五世祖也曾祖諱豊之禮曹判書 贈贊成文衡諡貞簡 正廟賜頎頎而長休休之風八言扁而號之祖諱能岳行吏曹判書考諱宜隣進士有篤行早世妣宜寧南公諱駿行女公以 純廟甲申七月十一日生庚戌登增廣文科壬子翰林召試被選癸丑出監扶安縣乙卯以校理召還尋陞通政丁巳又出爲安岳郡守戊午爲大司成辛酉爲副提學叅議吏曹壬戌進嘉善丁卯爲吏曹叅判甲戌觀察湖西丙子大臣筵白超擢資憲戊寅爲冬至正使己卯回還判禮曹親祭贊禮加正憲爲左賓客庚辰拜吏曹判書壬午 東宮初行 太廟展謁以提調陞崇政癸未爲藝文弘文兩館提學又加崇祿甲申拜相辛卯特拜兼兵曹判書辛丑特픊勳一等賜太極章壬寅特賜李花章入耆社 親臨咸寧殿錫宴耆堂仍賜几杖祇受日遣秘書丞宣醞仍賜二等樂進表謝恩丙午特進公爵爲靑寧公公天姿寬而重和而有守平生不爲新奇高遠之論忠信自仗夷險不貳歷試內外言行相孚以是受知 聖明終致大用公益自感激殊遇竭誠彌綸少濟艱屯而國家之失太平久矣變故層生整頓無望如嚮晦之勢浸至漫漫而已矣則公獨於時運何哉忠憤塡胸至有自經於甲申之變幸賴傍救者然公之以死報國之心於此可見矣至於乙未之禍含冤忍痛跧伏窮山益無生意特感 上眷遇不衰時或起居盖盡分之義也公雖退老憂國愛君之心根於性每國有大事輒與諸大臣盡力匡救李容翊恃恩無顧忌公伏關請罪其罪至被不픊及五條約成又與趙相公聯箚聲討趙相公卒以身殉 上召公勉諭曰元老大臣盡死誰與爲國者卿勿死勿死公對曰欲臣無死早從臣請臣已判一死上來不得請則不得不死矣相持半夜及退掖隸踵至相守不離求死亦不得而公之宿患越添舁還鄕第寢疾而卒享年八十有三公之相業其可書者多而惟此數事爲末節之大者故特書之以包其餘云公篤於內行旣孤露事伯氏庶尹公如嚴父言行動止不敢少有違拂苟非公事遠離則相就湛樂和義融洽雖年位已高而侍側服勤未嘗少懈誠意藹然及庶尹公沒與季氏判書履澤通家而居出入臥起必偕談笑歡娛不離須臾人比之春津之美子姪有過失輒諄諄誨飭使自知悔雖僕隸之賤未嘗聲色詬詈其存諸中者和順故其忠厚之著於應接者類此詩曰溫溫恭人維德之基其公之謂乎鶴鎭每進拜於公見其頒髮酡顔諧笑樂易旣老而風采猶不衰公原配 贈貞敬夫人韓山李氏郡守晉在女癸未生壬申卒育二女繼配貞敬夫人綾城具氏泰和女育一女皆有婦道配公無違德系子相璡承旨早歿子柱燮今叅奉女金炳軾今承旨李重哲李尙珪皆郡守三婿重哲系子泌鍾叅奉銘曰
我東氏族罕出沈右桓桓靑城啓基博厚承以三相兼爲國舅懿哉靑陽淸議領袖淸獻大名蕩平匡救貞簡父子德位相副司馬克肖有行無壽是生相公爲朝德首休休之風血禪氣受是其有容孰過於此古之良相豈有他技帝曰嘉乃一節不弛托以股肱惟毗惟倚公曰匪材曷稱明旨股肱之譬請有復矣不曰其喜繇元首起念玆在玆敢不盡義由是臨事惟理之視其無害矣將順其美如有否者彌縫於始人或不識將順是議銘以辨之以昭公志尙有考者我辭無媿
崇政大夫奎章閣大提學    安東 金鶴鎭 謹撰
輔國崇祿大夫侍從院卿大勳位 驪興 閔丙奭 謹書
頭篆 崇祿大夫議政府叅政  安東 金聲根 謹書

영의정청녕공대훈위시문충청송심공신도비명병서(번역문)
광무(光武)10년 병오 1906년 2월2일에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공작(公爵) 청녕(靑寧) 심공이 집에서 졸(卒)하니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애도(哀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이 대신(大臣)은 풍채가 훌륭하고 고상하며 성품이 온화하고 은혜로우며 일에 임(臨)하면 의심나는 것을 풀고 마음이 화락(和樂)하고 조용한데 힘쓰고 의정부(議政府)에서 벼슬한 지 10여년에 충성을 다하여 나를 도와 정사(政事)를 하여 유익(有益)함이 많았도다. 나라의 명(命)이 새로워짐에 울연(蔚然)히 보필(輔弼)한 공훈(功勳)이 있었고 만년(晩年)에는 고향으로 내려가서도 아주 건강(健康)하여 나이가 많았으나 정신과 식견(識見)이 쇠퇴(衰退)하지 아니하였더니 어찌하여 갑자기 홀로 가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립게 하는가 하였다. 청녕공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이조 때 동원비기(東園秘器:왕실에서 쓰는 관(棺). 장생전(長生殿)에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씀)를 만들고 남은 판재(板材) 일부를 보내고 예장(禮葬)등 절차를 준례(準例)대로 거행(擧行)토록 하고 참판(叅判)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되 제문(祭文)을 임금이 친히 지어 내려보내고 시호(諡號)내리는 은전(恩典)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장사(葬事)전에 거행하라 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근학호문(勤學好問:학문하는 것을 좋아하되 묻기를 좋아함)하며 사군진절(事君盡節:임금을 섬기되 충절(忠節)을 다함)하였으므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라함이 옳다고 보고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시종(始終) 애영(哀榮)이 겸비(兼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달 3월16일에 진위군(振威郡) 동록(東麓)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장차 비석(碑石)에 글을 새겨 공의 덕(德)을 영원히 전하려는 것이다. 공의 당질(堂姪) 상황(相璜)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학진(鶴鎭)에게 비문(碑文)을 지어 달라고 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순택(舜澤)이요 자는 치화(穉華)이니 고려 위위승(衛尉丞) 휘 홍부(洪孚)가 비로소 청송으로 본관을 삼고 시조가 되었다. 본조(本朝)에 휘 덕부(德符)는 시중(侍中)이요 청성백(靑城伯)이며 시호가 정안(定安)이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시호 안효(安孝) 휘 온(溫)과 영의정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시호 공숙(恭肅) 휘 회(澮)와 영의정 시호 충혜(忠惠) 휘 연원(連源)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시호 익효(翼孝) 휘 강(鋼)의 四세(世)에 이르러 삼대(3代) 정승에 이대(2代) 국구(國舅)가 되어 더욱 크게 나타났다. 익효공의 장남 휘 인겸(仁謙)은 군수였고 중남(仲男) 휘 의겸(義謙)은 대사헌(大司憲)이었고 청양군(靑陽君)이었으며 높고 깨끗한 언론(言論)을 견지(堅持)하여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분이 휘 엄()을 낳아서 군수공에게 출계(出系)시켰다. 다섯번 전하여 휘 택현(宅賢)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시호가 청헌(淸獻)이요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지 않으므로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니 공에게 五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풍지(豊之)이니 예조판서를 지냈고 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문형(文衡:대제학)이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요 정조(正祖)가 헌걸차고 키가 크며 아름답다(頎頎而長休休之風)의 팔언(八言)으로 기기재(頎頎齋)라는 호(號)를 지어주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능악(能岳)이니 이조판서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의린(宜隣)이니 진사(進士)였고 도타운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고 어머니는 의령남공(宜寧南公) 휘 준행(駿行)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갑신(甲申) 1824년 7월11일에 낳았고 경술 185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임자 1852년에 한림(翰林)으로서 임금앞에서 시문(試問)하는 일을 맡았고 계축 1853년에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갔으며 을묘 1855년에 교리(校理)로 임명 소환(召還)되었고 조금 있다가 통정(通政)에 승진되었으며 정사 1857년에 또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나갔다가 무오 1858년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신유 1861년에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이조참의(吏曹叅議)로 옮겼으며 임술 1862년에 가선(嘉善)으로 승진하여 정묘 1867년에 이조참판이 되었고 갑술 1874년에 충청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병자 1876년에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자헌(資憲)에 특진(特進)되었다. 무인 1878년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갔다가 기묘 1879년에 돌아와서 예조판서로서 찬례(贊禮:제향때 임금을 전도(前導)하여 행례(行禮)하게 하는 일)를 친히 하여 정헌(正憲)을 더하여 좌빈객(左賓客)이 되었다. 경진 1880년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임오 1882년에 세자(世子)가 처음으로 태묘(太廟:종묘)에 참배(參拜)하는데 제조(提調)가 되어 숭정(崇政)에 올랐다. 계미 1883년 예문(藝文) 홍문(弘文)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이 되어 또 숭록(崇祿)에 올랐고 갑신 1884년에 정승이 되었으며 신묘 1891년에 특별히 병조판서를 겸하였다. 신축 1901년에 특별히 서훈일등(叙勳一等)으로 태극장(太極章)을 하사(下賜)받았고 임인 1902년에 이화장(李花章)을 받았으며 기사(耆社)에 들어갔는데 임금이 친히 함녕전(咸寧殿)에 임하여 기로당상(耆老堂上)의 잔치를 베풀고 궤장(几杖)을 받는 날에 비서승(秘書丞)을 보내어 임금이 술과 이등악(2等樂)을 하사(下賜)하니 글을 올려 감사(感謝)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병오 1906년에 공작(公爵)에 특진(特進)되었고 청녕공(靑寧公)이 되었다. 공은 천성(天性)이 관대(寬大)하고 중후(重厚)하며 온화(溫和)하고 정도(正道)를 지켜 평생에 신기(新奇)하고 고원(高遠)한 말을 하지 않고 충신(忠信)을 스스로 지켜 평탄(平坦)하고 험악(險惡)한데서도 어긋나지 않으며 내외직(內外職)에서 언행(言行)이 성실(誠實)하여 임금이 알아 주었고 마침내 크게 쓰이니 공은 더욱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정성을 다하여 두루 다스리고 조금 험악(險惡)한 시대를 지냈으나 국가가 태평함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 변고(變故)가 층층히 나고 정돈(整頓)할 가망(可望)은 없어 암흑(暗黑)의 세상이 점점 다가오니 공인들 홀로 시운(時運)에 어찌하리오 충의(忠義)로 일어나는 분한 마음이 가슴을 메웠더니 갑신정변(甲申政變)때에는 다행히 곁에서 구하여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공의 죽엄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도다. 을미 1855년 민비(閔妃) 시해사건(弑害事件)으로 원통함을 참고 깊은 산골에 묻히어 더욱 살뜻이 없었으나 특별히 임금의 총우(寵遇)가 쇠하지 않음에 감격하여 때로는 더러 문안(問安)을 드렸으니 대개 분수를 다 지키는 의리였다. 공이 비록 늙어서 물러났으나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천성(天性)에 뿌리밝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대신(大臣)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바로잡고 구하였다. 이용익(李容翊)이 임금의 은혜를 믿고 뒷일을 염려하고 끄리는 것이 없자 공이 대궐안에서 엎드리고 죄(罪)를 청하니 임금이 죄는 주지 않았다. 을사 1905년 오조약(五條約)이 성립(成立)되자 또한 조상공(趙相公:趙秉世)과 더불어 오조약의 폐기(廢棄)를 상소(上疏)하던 중 조상공은 마침내 순국(殉國)하였다. 임금이 공을 불러 타일러 말하기를 원로대신(元老大臣)이 다 죽었으니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경(卿)은 죽지마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臣)을 죽지 않게 하시려거든 빨리 신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신이 이미 한번 죽으려한 이상 임금께서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양보하지 않고 서로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다가 한 밤중이 되어 물러나는데 액례(掖隸:액정서(掖庭署)에 딸린 관원)가 뒤를 따라와서 서로 지키고 떠나지 않으니 죽으려 하였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공의 오랜 병이 더하여 시골집에 돌아와 앓다가 돌아가니 향년(享年)이 83이었다. 공이 나라를 다스리며 기록할만한 일이 많지만 오직 이 몇가지 일은 끝부분의 큰것이 되므로 특별히 적어서 그 나머지에 포함시킨 것이다. 공은 안에서 하는 일에 독실하였고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백씨(伯氏) 서윤공(庶尹公) 섬기기를 아버지를 섬기는 것같이 하여 말과 행동거지(行動擧止)에 감히 조금도 어기지 않고 공사(公事)로 멀리 떨어지지 않을 때면 서로 만나서 즐기고 온화(溫和)한 기색이 넘치며 비록 나이와 벼슬이 높았지만 곁에서 뫼시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며 성의를 다하더니 서윤공(庶尹公)이 돌아가시자 계씨(季氏) 판서(判書) 이택(履澤)과 같이 한 집에 살며 출입(出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을 같이하여 담소(談笑)하고 즐기며 잠깐사이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춘진(春津:중국 당나라때 형제간에 우애가 좋았던 사람의 이름)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자질(子姪)에게 과실(過失)이 있으면 순순(諄諄)하게 가르쳐 스스로 허물을 고치게 하였으며 비록 종같이 천한 사람에게도 말소리와 얼굴빛으로 다스리고 욕설(辱說)을 하고 꾸짖지 않으니 그 마음속에 있는것이 화순(和順)하기 때문에 그 충직(忠直)하고 순후(淳厚)함의 응접(應接)하는데 나타남이 이와 같았다. 시(詩)에 이르기를 온화하고 사람에게 공손하는 것이 덕의 근본이라 하였으니 그 공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학진(鶴鎭)이 공을 뵈올 때마다 반백(半白)의 머리에 홍안(紅顔)으로 환담(歡談)하였으며 늙도록 풍채(風采)가 쇠(衰)하지 아니하였다. 공의 원배(原配)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군수 진재(晉在)의 따님으로 계미년(癸未年)에 낳았고 임신년(壬申年)에 졸(卒)하니 이녀(2女)를 두었고 계배(繼配)는 정경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 태화(泰和)의 따님으로 1녀를 두었으며 모두 부덕(婦德)이 있어 공을 섬기는데 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계자(系子) 상진(相璡)은 승지(承旨)였는데 일찍 돌아갔고 그 아들 주섭(柱燮)은 지금 참봉(叅奉)이요 김병식(金炳軾)은 지금 승지(承旨)이고 이중철(李重哲)과 이상규(李尙珪)는 모두 군수이며 세사람의 사위요 중철의 계자(系子)는 필종(泌鍾)이니 참봉이고 명(銘)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심씨보다 나은 씨족(氏族)은 드믈도다. 굳세고 날랜 청성백은 터를 열어 넓고 두텁게 하였으며 세 정승과 국구(國舅)가 나왔도다. 아름다워라 청양군(靑陽君)이여 높고 깨끗한 언론(言論)으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되었도다. 청헌공(淸獻公)은 크게 이름 드날리어 탕평(蕩平)을 바로잡아 구하였도다. 정간공(貞簡公) 부자(父子)는 덕위(德位)로 서로 이어받았고 사마공(司馬公)은 능히 본받았으나 덕행(德行)만 있고 수(壽)를 못하였도다. 이 분이 상공(相公)을 낳으니 조정(朝廷)에서 덕이 으뜸이었도다. 선미(善美)한 풍채에 씩씩한 혈기(血氣)받았도다. 누가 이러한 용모(容貌)보다 나으리오. 옛날 어진 정승이라고 어찌 다른 재능(才能) 있었으리오 임금이 그대를 가상히 여기되 한 절개로 풀어지지 않았다 하고 팔 다리와 같이 여기고 오직 의탁하였도다. 공이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어찌 그리 칭찬하시느냐고 하자 팔 다리에 비유한 것을 다시 말하였으니 그 기쁜 일이 아닌가 영의정으로서 가장 적임자였으니 감히 의(義)를 다하지 않을손가 이로부터 일에 임하면 오직 의리만 보았도다. 해(害)가 없었으니 그 순순(順順)하게 아름다워지리로다. 만일 부정(否定)하는 사람 있으면 그것은 임시 변통으로 이리 저리 꾸며댄 것이로다. 사람이 혹 모르면 이 의논을 따라야 할 것이다. 여기에 새겨 분별함은 공의 뜻을 밝히는 것이니 상고할 것 있으려니와 나의 말에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숭정대부규장각대제학 안동 김학진이 삼가 짓고
보국숭록대부시종원경대훈위 여흥 민병석이 삼가 쓰고
전서는 숭록대부의정부참정 안동 김성근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