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상공 (휘 열)신도비명

남파상공 휘 열 묘소
소재지: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묘 표 석


신 도 비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忠靖公諱悅墓誌銘竝書神道碑舊無立石
粤自 穆陵之季國家多事中經昏否荐罹訌難而壽考尊榮績施澤及完歸而不自名者盖鮮覯焉若吾元輔南坡沈公殆庶幾哉公沒十餘年而幽隧之銘闕焉公之諸孫諏以爲事公久而知公深者亡踰於不佞最强委重焉惟公之績施於國公之澤及於人公之名將不待銘而不朽況最之文曷足以傳信於後然不佞以彌親之故得拜於床下服事公者久何敢以不文辭謹按公諱悅字學而自號南坡靑松人其先有諱德符當麗末都將相封靑城伯入 本朝爵位彌隆疇庸裕后世爲褒紀諡恭靖寔生諱溫領議政 國舅靑川府院君諡安孝寔生諱澮翊戴佐理功臣領議政靑松府院君諡恭肅寔生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寔生諱順門議政府舍人遇害於燕山卽公高祖也曾祖諱連源領議政諡忠惠以碩望厚德相 明廟配享 廟庭祖諱鋼領敦寧府事 國舅靑陵府院君諡翼孝考諱忠謙魁文科官至兵曹判書事 穆陵壬辰之難預大計追賜扈 聖功臣之號封靑林君諡忠翼妣曰貞敬夫人李氏 王子鳳城君岏之女以隆慶己巳十一月十三日生公公於序爲次以忠翼公命出後仲父成川府使諱禮謙夫人鄭氏僉知潚之女亦延日望閥也俱以公貴 贈議政及貞敬爵李夫人夢珠雨亂滴窹而生公公生而骨相異凡兒忠翼公大奇之及授書聰睿絶人屢捷場屋華聞大播己丑中司馬癸巳釋褐甲午隸授承文院薦拜藝文館檢閱冬忠翼公捐館舍哀毁幾殆丁酉制除復入史局陞至奉敎遷禮曹佐郞移兵曹冬又遭成川公憂守制視前庚子選錄玉堂拜修撰累轉兵曹正郞司憲府持平首劾亂政者時議韙之遂入銓曹爲佐郞兼知製 敎司書文學陞本曹正郞以事遞大臣請抄選東宮僚屬以專輔導之任復拜文學辛丑移校理仍帶春坊俄陞應敎遞授司成司宰監正復拜應敎兼弼善秋預修四傳春秋書成加通政階拜兵曹叅知及同副承旨爲養乞郡出爲海州牧使治行茂著報最 特賜表裡奬之癸卯遞付護軍甲辰以禮曹叅議出爲江華府使御史啓褒之又賜表裡及歸民勒石頌之乙巳復爲黃海道觀察使威惠幷行幽隱畢抉除民瘼釐兵籍宿弊盡祛黃人大喜碑爲之通達丙午遞拜兵曹叅議丁未出爲忠淸道觀察使 特命增秩嘉善冬以親癠辭遞戊申拜禮曹叅判兼副摠管尋拜京圻觀察使時 穆陵昇遐復土董工徵調如毛而衷裁合宜事以辨治秋書 穆陵哀冊加嘉義階俄而病遞尋拜左尹兼同知義禁府事己酉以大臣薦拜黃海道節度使庚戌李夫人卒壬子又遭鄭夫人憂事禮逾篤不以年衰少懈甲寅服闋拜同知中樞兼副摠管遞授安東府使未赴任慶尙監司缺 朝廷難其人僉擧公授其道觀察使領南地鉅人衆俗喜訟號難治公始莅境狀報牒訴雲委丘積盈溢几案棼不可理執筆吏手盡腫而公剖判如流無留時諸老吏咸쾙舌稱神明乙卯辭遞丙辰拜刑曹叅判尋移禮曹丁巳書玉冊文加資憲戊午拜刑曹判書時虜犯 上國執頗熾盛 皇上勅命我國幷勦討光海方大興土木無應授意公上疏請停管建之役選兵峙糧專意戰守又因獻議申言 天朝是我父母之國況有再造之恩不可不預練士卒以待徵發仍陳西北二邊備禦之策己未出按咸鏡道公悉心規畫大者驛聞小者立變停甲州山城之築革四鎭判官罷五管殘堡出牧馬試材給賞發藏布販米盖儲設武擧添防守選用武力隨才塡關北邊頼以安堵辛酉遞歸壬戌又出爲靑松府使命移坼邑改驪州公見奸凶得志時事日變雖徊徨藩臬乍內乍外而非其志也未數月投紱歸通津先壠下爲終焉之計癸亥 仁祖反正促召公赴任所未幾再爲京圻觀察使尋擢爲戶曹判書新經昏政帑藏枯渴而公能斟酌時宜省浮杜私米鹽之事大小皆關其出沒而吏不敢欺民蒙其惠蓄積充物邦計以裕至今數中興後善度支者推公爲首甲子賊适擧兵叛從上南狩還都以扈從勞加崇政階冬書玉冊文加崇祿階乙丑拜度支移京兆遷右叅贊刑曹判書皆以疾辭丙寅丏閒歸通津丁卯回虜變赴難以知樞陪 東宮南下全州爲撫軍司堂上虜退奉 東宮會上于江華 上還都陞江華爲陪京留公爲守兼經理以公曾牧是府有惠政且才公爲刱設保障地也公葺治有緖不緩不亟留民頼之戊辰復入地部兼判義禁府事己巳累授叅贊及諸曹判書皆不拜壬申追崇 元宗號禮成充奏請使公遞患脚腫不任就道大臣特請命之丙子復拜工曹判書兼判義禁累辭不獲俄坐事罷施叙判京兆冬十二月虜兵猝至三日薄都城上倉卒幸南漢公隨駕入城翌年春圍觧從 上出城以扈從勞加輔國階復兼戶判板蕩之餘府庫如洗倚辨度支視舊倍簁公殫竭誠心夙宵籌度貿遷有無通變如神期月之間枵藏羡溢彼使之來其索無底我人之徃齋送不訾能未加賦而經用不匱者公之力也戊寅淸人要我助兵勒脅萬端中外洶惧 上特命左議政崔公鳴吉入潘探其情實公上箚以爲彼之所大欲只在助兵助兵大事旣已聽從則餘皆虛喝大臣徃來徒貽其弊且助兵雖出於不得已戴履天地何以爲心觀其事機通諭都督則天下之人曉然知我國之情勢時都督沈世魁方鎭椵島故也遂停崔公之行而彼亦不能有加於我公痛國勢日阽於危而人皆苟免避事知無不言有獻輒益朝野顒望而眷遇漸隆矣秋自度支晋陟右議政公五上章懇辭 上溫批不許再遣近侍敦諭他大臣言今度支任重非公莫可請令兼管本曹事公固辭曰三公兼領六卿祖宗朝或有其例而大臣只摠察而已非實職也不可刱前無之規恐傷國體 上久不許尋出判書掌其務而俾公領之其倚重如此公以坤位久虛而淸俗重婚媾萬一有不可言者何辭以拒請建長秋又以亂後士大夫流散未集請責以大義恪奉其職而公率百寮卯仕酉罷其憂國盡瘁又如此己卯引疾上章二十餘 上竟不允四遣近侍敦諭不獲已起親事是年六月以進賀使入瀋秋復命庚辰始免相授西樞癸未復拜左議政春旱灾甚酷公引故事乞免且曰審理冤獄欲其宣通幽鬱導迎和氣而宥赦不過輕囚罪已求言乃是反躬自責取人爲善而言涉不諱未蒙察納避殿減膳只歸應文遍禱山川徒爲瀆神人以爲名言又請發江都南漢儲穀七千餘石以賑窮民 上從之夏進領議政秋乞免甲申春左相沈器遠謀叛伏誅以叅鞠勞拜鞍馬之賜冬乞免領西樞丙戌徵感風寒竟以正月二十四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八計聞 上震悼輟朝三日遣近侍吊孤致祭賻賵有加上自公卿下至委巷賤隸莫不咨嗟太息曰賢相亡矣訓營士卒感公恩出米爲賻會哭者幾數千餘人有司庇喪用是年三月某甲永窆于楊根郡南加佐谷亥坐之原哀榮之典備矣公初聘宜寧南氏叅議彦經之女早沒無育繼聘杞溪兪氏 贈贊成涵之女判書絳之孫也佐公爲德有士行公數莅大藩久掌泉府人稱膏膄地而未嘗以纖芥汚公公喜客客至則輒具醑豆或侑以聲妓而夫人必致盤洽無忤色御媵侍字庶出莊臨恩煦各盡其道睦隣敦族慶恤周至治家理産皆可爲式公恒稱夫人善養兩姑敬奉祭祀云先公六年卒兩夫人俱祔公墓之左右公無嫡子取從兄㤿子熙世爲後登文科歷天曹郞官止校理先公卒側室有二男廷男階折衝廷達業儒校理先娶監察兪大佑之女生二女長卽不佞最妻次適生員李行逸後娶縣監朴安鼎之女生三男一女男長樞今縣監出繼仲父靑雲君命世後次子機與權女適進士申晸樞娶趙珩女生三男麟瑞鳳瑞龜瑞機娶趙胤錫女權娶李萬雄女申最生二男四女男儀華進士次範華女適權斗樞正字次適韓伯箕次適進士金興次適權頔餘幼申晸有三男一女男徵華瑞華啓華女幼內外曾玄孫凡二十餘人公長不踰中人而廣顙大耳聲如韵鍾鬚髯翩翩望之儼然若不可犯而卽之溫然和氣藹如動止語默不苟不强而自中於矩繩孝友天植推以睦婣旣稱孤而李鄭兩大夫人俱無恙左右就養皆適其意服勤不怠未嘗使僕御代勞喪哀祭敬情文俱備育亡弟之孫女撫爰出於至誠待寡妹收窮族曲有恩義戚疏無間歸之如家吉凶之費資之如國廩焉早擢巍科少登敦仕屢莅雄府七鎭巨省三判度支四入中書而小心敦愼無纖毫公私之譴以至大拜精鍊語悉投刃恢餘慮事周詳臨機捷敏算成決敗神於龜蓍同時以才諝稱者莫不退舍公備經世故無意榮祿自癸亥後告休歛避優遊江郊圖書自娛漁釣以樂而國步斯頻需才方急重責鉅任不得不歸諸公而精白勵翼老而彌篤繡縫闕漏劑量醎酸陰壽國脉而不尸其功則非人人之所可知也公爲文章務以明軆適用本之經術施諸政事而辭理俱到朗潤曲暢詩亦淸膄合度尤工八法爲時所珍旁通射藝優入能品而皆以枝視不自名焉所著散逸不收而略干詩文及疏箚合三卷刊藏于家嗚呼公立朝五十年歷敭中外聲實咸章可載而傳揭型垂範者不若是淺尠而公旣不自名不佞又事公晩不及知公少壯驥展之時謹據家狀叅以見聞卽遺佚雖多不佞之效於公者惟不 美而已是爲銘曰
逖矣華胄肇籍靑鳧 嶽降魁碩將相身都 啓慶燾後厥澤賁濡 二后三公在古亦無 胚光毓秀篤我哲模夙奮巍標步武亨衢 頗牧禁中爲時之需 于宣于藩經營西隅 周流列卿迺長金吾 迺贊黃扉迺握版圖迺登台階遂斡化樞 匪躬之謇胡際艱虞 厦支以棟川濟則垺 惟工以代其謨則訏 無聲而潤有氣者蘇疇識其懿百世于孚 瞻彼楊山式藏其褕 我銘其幽天壤與俱
孫婿 前咸鏡都事 申最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충정공휘열묘지명병서신도비구무입석(번역문)
지난 목릉(穆陵)① 말년에 국가에 일이 많았고 중간에 혼부(昏否)②를 지내면서 점점 홍난(訌難)에 걸렸는데 오래 살면서 영화로운 업적을 쌓고 혜택을 베풀다가 완전하게 죽어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한 사람을 보기 드물었다. 우리의 원보(元輔)③인 남파(南坡) 심공 같은 분은 거의 그러한 사람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공이 몰(沒)한 지 십여 년이 되었으나 무덤을 밝히는 명(銘)이 빠져 있었다. 공의 모든 후손들이 공을 위해 일을 하기로 꾀했는데 공을 섬기기를 오래도록 하고 공을 깊이 아는 사람으로 불녕(不佞)보다 나은 사람 없다고 하여 억지로 중임을 맡겼다. 다만 공의 공적이 나라에 베풀어졌고 공의 은택이 사람들에게 미쳤으니 공의 이름은 장차 명을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썩지 아니할 것이거늘 하물며 최(最)의 글이 어찌 믿음을 후세에 전하는데 족(足)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녕은 미친(彌親)④이기 때문에 상(床)아래 절함을 얻어 공을 오래 섬기었으니 어찌 감히 글을 잘 못한다는 말로 사양할 수 있을까.
삼가 상고해 보니 공의 휘는 열(悅)이요, 자는 학이(學而)며 자호(自號)를 남파(南坡)라 했으니 청송 사람이다. 그 선대에 휘를 덕부(德符)라 하는 분은 고려말에 도장상(都將相)으로 청성백에 봉함을 받았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벼슬이 높고 떳떳한 일을 행해서 자손에게 남겼으므로 대대로 포상(褒賞)의 줄기가 되었는데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하다가 정안(定安)으로 개시(改諡)한 분이다. 이분이 휘 온(溫)을 낳으니 영의정을 지내고 국구가 되어 청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안효(安孝)다. 이분이 휘 회(澮)를 낳으니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 영의정을 지내고 청송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분이 휘 원(湲)을 낳으니 내자시판관을 지내고 좌천성에 추중되었다.
이분이 휘 순문(順門)을 낳으니 의정부사인으로 연산주(燕山主)에게 해를 입었는데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연원(連源)으로 영의정을 지내고 시호가 충혜(忠惠)인데 석망(碩望)과 후덕(厚德)으로 명종묘정(明宗廟庭)에 배향됐다. 할아버지의 휘는 강(鋼)이며 영돈녕부사로 국구가 됐고 청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익효(翼孝)다.
아버지의 휘는 충겸(忠謙)인데 문과에 장원급제해서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목릉(穆陵)의 임진년 난리 때 대계(大計)에 참여해서 호성공신(扈聖功臣)의 호를 추가로 하사받아서 청림군(靑林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로 왕자인 봉성군(鳳城君) 완(췀)의 따님이다. 융경(隆慶) 기사(1569) 11월 13일 공을 낳으니 공은 서열로는 두 번째이다. 충익공의 명으로 중부(仲父)인 성천부사(成川府使) 휘 예겸(禮謙)에게 출계(出系)했다.
부인 정씨는 첨지 숙(潚)의 따님인데 또한 연일(延日)의 망족(望族)이다. 모두 공이 귀히 됨으로 인하여 영의정과 정경부인의 작호(爵號)가 추증됐다. 이부인의 꿈에 구슬이 비처럼 어지럽게 쏟아졌는데 깨고 나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골상(骨相)이 범아(凡兒)들과 달랐으므로 충익공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글을 가르치는데 이르자 총명과 기예(技藝)가 절인(絶人)하여 여러 번 장옥(場屋)⑤에서 장원하였으므로 빛나는 소문이 크게 퍼졌다. 기축년(158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계사년에 석갈(釋褐)⑥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배치됐다.
이어서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어 배명됐으나 겨울 충익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으로 몸이 상해서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정유년에 복을 마치고 다시 사국(史局)에 들어가서 승진하여 봉교(奉敎)가 되고 이어서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로 옮겼다. 겨울에 또 양아버지인 성천공(成川公)의 상을 만나 예제를 지키기를 전 친부상과 같이 했다.
경자년(1600)에 선발되어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수찬에 임명됐고 여러 번 옮겨서 병조정랑과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앞장 서서 정치를 어지럽힌 사람을 탄핵하니 당시의 의론들이 옳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전조(銓曹)로 들어가서 좌랑이 됐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사서(司書)와 문학을 거쳐 본조의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나 사건으로 인해 교체되었다.
대신들이 동궁(東宮)의 요속(僚屬)⑦을 청할 때 초출(抄出)되어 보도의 책임만을 맡았다. 이어서 다시 문학에 제수됐다가 신축년에 교리로 옮겼으나 동궁보도의 책임은 계속해서 띠었고 응교(應敎)에 승진했다가 사성으로 체임됐다.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내고 다시 응교가 되어 필선(弼善)을 겸했다. 가을에 사전(四傳)⑧과 춘추를 예수(預修)⑨하였고 글이 완성되자 통정계로 승진시켰다.
이어서 병조참지(叅知)가 되고 동부승지를 지냈다. 노모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이 되기를 청하여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 치행(治行)이 현저하게 드러나서 보고에 으뜸으로 올랐으므로 특별이 겉옷과 속옷 한 벌씩을 하사해서 장려하였다. 계묘년에 교체되어 호군(護軍)이 되었고, 이듬해 예조참의를 거쳐 강화부사(江華府使)로 나갔다. 어사가 포상할 것을 청했으므로 다시 옷이 하사됐다.
만기가 되어 돌아올 때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했다. 을사년에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시행되니 숨겨져서 밝히지 못했던 억울함이 드러나서 분명하게 처결되었으며 흔쾌하게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고 병적(兵籍)을 잘 다스렸으며 숙폐(宿弊)⑩를 모두 제거하니 황해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비석을 네거리에 세우기도 했다.
병오년(1606)에 교체되어 병조참의가 되고 정미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특명으로 계급을 더하여 가선계로 승진시켰으나 겨울에 어머니의 병환으로 사직했다.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부총관을 겸직했다. 얼마 후 탁발되어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 때 선조께서 승하(昇遐)⑪하자 다시 공사감독이 되었는데 공인을 징발함과 적절한 처리가 털을 정리함과 같이 어려웠으나 정리하기를 적당하게 하여 일을 잘 다스렸다. 가을에 목릉의 애책(哀冊)⑫을 쓰니 가의계(嘉義階)로 승진시켰다. 얼마 뒤 병으로 교체됐으나 곧 좌윤(左尹)을 배하고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게 했다. 기유년에 대신들의 추천으로 황해도 절도사(節度使)로 나갔고, 경술년에는 생모인 이부인이 죽었고, 임자년에는 양모인 정부인이 죽었는데 모두 집상을 예에 맞도록 행하고 나이 많다고 해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갑인년(1614)에 복을 마치자 동지중추에 임명되어 부총관을 겸했다.
곧 안동부사(安東府使)로 교체됐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경상감사가 결원되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 인물을 선정하기 어려웠는데 모두 공을 추천했으므로 공이 그 도의 관찰사로 임명됐다.
영남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풍속이 소송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이름 났다. 공이 처음 지경에 들어가니 상황을 보고한 글과 소송을 청한 글이 구름처럼 많고 산처럼 쌓여서 책상이 넘쳐 났으므로 어지러워서 다스릴 수가 없었고 집필(執筆)하는 아전들의 손에 종기가 생길 정도였으나, 공은 해결하기를 물 흘러가듯 해서 때를 넘기지 아니하니 모든 늙은 관리들이 모두 칭찬하고 혀를 내어 두르면서 신명(神明)이라 칭했다.
을묘년에 사직하여 교체되고 병진년에 형조참판이 됐다가 얼마 뒤 예조로 옮겼다. 정사년에 옥책문(玉冊文)을 쓰고 자헌(資憲)계로 올랐고 무오년(1618)에 형조판서가 됐다. 그 때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침범했는데 그 형세가 자뭇 치성(熾盛)하니 명나라 황제가 칙명(勅命)으로 우리 나라와 함께 초토(剿討)⑬할 것을 명했다.
광해주(光海主)가 바야흐로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켰을 때라 응수(應授)할 뜻이 없었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영건(營建)의 역사(役事)를 정지하고 군병을 뽑고 양식을 준비하여 전쟁과 수비에 전념할 것을 청하고 또 헌의(獻議)⑭하여 거듭 말하기를
『명나라는 우리 부모의 나라인데 하물며 다시 살려준 은헤가 있으니 예비책으로 사졸을 훈련시켜서 징발(徵發)을 기다려야 한다.』
주장했고 이어서 서와 북, 두 곳 변방의 방어책을 진언하였다.
기미년에 함경도 안찰사(咸鏡道 按察使)로 나가 공이 마음을 다해 계획을 세우니 큰 것은 역을 통해 보고하고 작은 것은 그 자리에서 변경하여 갑주산성(甲州山城)의 축성을 중단시키고 사진(四鎭)의 판관을 혁파했으며 오영(五營)의 잔보(殘堡)를 모두 없애 버렸다.
먹이던 말을 몰아내서 능력을 시험하고 상으로 저장해 두었던 옷감을 지급하고 쌀 등 식량을 사서 더욱 비축하게 하며 무인의 과거를 신설하고 수비와 방어의 병력을 첨가하고 무력(武力)을 선발하여 재주에 따라 배치하니 관북이 이것을 힘입어서 안도(安堵)하였다.
신유년에 교체되어 돌아오고 임술년에 다시 청송부사로 나갔다가 명으로 기읍(圻邑)에 옮겨서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됐다. 간흉(奸凶)들이 뜻을 얻어서 시사(時事)가 날마다 변하는 것을 보고 비록 변방을 두루 다니면서 잠시는 내직에 잠시는 외직에 머무르기는 했지만 그 참뜻은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아니해서 관직을 버리고 통진(通津)에 있는 선롱(先壟)⑮ 아래로 돌아가서 평생을 마칠 계획이었다.
계해년(1622) 인조께서 반정(反正)하자 공을 재촉하여 임소(任所)에 나가게 하고 얼마 뒤 다시 경기관찰사로 임명했다가 곧 발탁해서 호조판서를 시켰다. 새로 혼정(昏政)이 지나간 뒤라 내탕(內帑)의 장재(藏財)가 고갈되었으나 공은 능히 시의(時宜)를 헤아려서 거품을 제거하고 사사로운 일에 쓰는 것을 막아 쌀과 소금 등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관여해서 그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점검하였으므로 관리들은 감히 속이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입게 되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재물이 창고에 가득차니 나라의 예산에 여유가 생겼다. 지금까지도 중흥(中興)한 뒤에 탁지(度支)를 맡은 사람 중에 가장 잘한 사람으로는 공을 밀어서 머리로 꼽고 있다. 갑자년에 역적 이괄(李适)이 군대를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상감을 따라 남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호종(扈從)한 수고로움으로 숭정(崇政)의 계에 승진시키고, 겨울에 옥책문(玉冊文)을 써서 숭록(崇祿)의 계로 올랐다. 을축년에 탁지에서 경조윤(京兆尹)으로 옮겼다가 우참찬과 형조판서에 임명됐으나 모두 병으로 사임했다.
병인년에 한가함을 빌어 통진으로 돌아갔지만 정묘년에 호란으로 인해서 난에 참여하고 지중추가 되어 동궁(東宮)을 뫼시고 남하(南下)하여 전주(全州)에 도착한 뒤 무군사당상(撫軍司堂上)이 됐다. 오랑캐가 물러나자 동궁을 받들고 강화도에 올라오니 상이 환도(還都)한 뒤 강화를 배경(陪京)으로 승격시키고 공을 머물러 유수(留守)를 삼아 경리를 겸하게 했다. 공은 일찍이 강화부사로 있었을 때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고 또한 재주를 보인 곳으로 공에게는 창설한 곳이며 보장(保障) 받은 땅이기도 했다. 공이 모으고 다스림에 조리가 있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정치를 하니 그곳에 머물러 있는 백성들이 믿고 따랐다.
무진년(1628)에 다시 지부(地部)⑯로 들어와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이듬해 여러번 참찬과 제조의 판서로 임명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아니했다. 임신년에 원종(元宗)의 호를 추숭(追崇)하였는데 예가 완성되자 주청사(奏請使)로 선발되었으나 공이 때마침 각질(脚疾)를 앓아서 취임하여 길에 오르지 못하니 대신들이 특청하여 바꾸었다.
병자년(1636)에 다시 공조판서가 되어 판의금을 겸했다. 여러 번 사양했으나 얻지 못하다가 얼마 후 연루되어 파직됐으나 문득 경조윤(京兆尹)에 서용됐다. 겨울 12월에 호병(胡兵)이 갑자기 이르러 3일만에 도성을 핍박하니 상감께서 창졸간(倉卒間)이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차하였는데 공도 어가를 따라 입성했고 이듬해 봄에 포위가 풀리자 상감을 따라 출정했다. 호종한 공으로 보국계(輔國階)에 가작(加爵)되고 다시 호조판서를 겸했다. 판탕(板蕩)한 뒤라 부고(府庫)는 씻은 듯 비어 있어 예산을 마련하여도 옛보다 배나 더 들었다. 공이 성심(誠心)을 다하여 밤낮으로 출입을 헤아리고 있고 없는 것을 잘 가려서 통변(通變)하기를 신과 같이하니 몇 달 사이에 주린 배를 채우고 창고가 넘쳐났다. 저들이 왔을 때는 그 전대에 밑이 없더니 우리가 가니까 재물 보내는 일에 병들지 아니했다는 말과 같이 능히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아니하고도 경비의 쓰임에 부족함이 없는 것은 공의 힘이었다.
무인년에 청인(淸人)들이 우리에게 출병(出兵)하여 자기들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면서 만단으로 위협하니 조정과 지방이 모두 두려워서 흉흉하였다. 상께서 좌의정 최명길(崔鳴吉) 공에게 심양(瀋陽)에 들어가서 그 실상을 탐지해 올 것을 특명하였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였다.
『저들의 큰 욕심은 다만 군대를 보내 도와 달라는 것인데 군대를 보내서 도와 주는 큰 일을 이미 들어서 따르게 된다면 나머지 부분은 무두 헛된 공갈일 것입니다. 대신이 오고 가는 것은 다만 폐단만 생길 뿐이니 또한 병력을 돕는 것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로 머리를 두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찌 마음에나 둘 수 있겠습니까? 그 사기를 보아가면서 도독(都督)을 통해 효유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이 나라의 정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도독 심세괴(沈世魁)가 바야흐로 가도(텸島)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최공의 행차를 정지시켰으나 저들도 능히 우리에게 추가 조치를 내리지는 못했다. 공은 국세가 날마다 위태한 방면으로 기울어짐을 슬퍼하여 다른 사람들은 억지로 면하고 일을 피했지만 알고도 말하지 아니했고, 말을 하면 문득 유익한 말만 하니 조야(朝野)는 옹망(顒望)⑰했고 상감의 권우(眷遇)는 점점 융성해졌다.
가을에 탁지에서부터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공이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려 간곡하게 사양했으나 상감께서 따뜻한 비답(批答)을 내리시고 허락하지 아니했으며 두번이나 근시(近侍)를 보내 돈유(敦諭)하니 다른 대신들이 말하였다.
『지금 탁지의 책임이 중해서 공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청하건대 그로 하여금 본조(本曹)의 일을 겸해서 관리하게 하소서.』
공이 고사(固辭)하여 말하였다.
『삼공(三公)으로 육경(六卿)을 겸령(兼領)한 사례는 조종조(祖宗朝)에도 혹 있기는 했으나 대신은 다만 총찰(摠察)할 뿐이고 실직은 아니었습니다. 전에 없던 법규를 새로 만드는 것이 옳지 못하니 혹 국체(國體)에 손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상께서 오래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얼마 후 판서로 나가 그 책무를 관장하여 공으로 처리하게 하니 그 의중(倚重)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장추전(長秋殿)을 세울 것을 청했다.
『곤위(坤位)가 오랫동안 비어 있으므로 청나라 풍속에 혼구(婚媾)⑱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할 수 없는 말을 그들이 한다면 무슨 말을 가지고 거절하겠는가?』
또한 난리가 지나간 뒤에 사대부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에 대해 대의(大義)로 나무라서 돌아와 자기의 직무에 종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고, 공이 직접 백관을 통솔하여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유시(酉時)에 퇴근하니, 그가 나라를 근심하여 몸이 야위어질 때까지 노력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기묘년(1639)에 병으로 인하여 사직상소 이십여 차례를 올렸으나 상께서 끝까지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번이나 근시(近侍)를 보내서 돈유(敦諭)⑲하므로 사직함을 얻지 못하고 일어나 가서 일을 보았다. 이 해 6월에 진하사(進賀使)로 심양(瀋陽)에 들어갔다가 가을에 돌아와서 복명했다. 경진년에 비로소 정승직에서 풀려나 서추(西樞)에 제수됐으나 계미년(1703)에 다시 좌의정이 됐다. 봄에 한재(旱灾)가 혹심(酷甚)하니 공이 그 까닭을 인용하여 사직할 것을 빌었다. 또 말하기를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함에 있어서 먼저 그 숨겨진 억울함을 선통(宣通)시키고 화한 기운을 맞이하고자 하여 사면하는 것은 가벼운 죄수에 지나지 않는다. 구언(求言)⑳을 할 때도 이에 임금이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려서 반성하고 남에게 선을 취하게 해야 한다.』
하면서 말을 하는데 숨김이 없었지만 그 말을 살펴서 받아들이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전각을 피하고 반찬을 주려서 다만 글에 대답하는데 그치며 두루 산천에 기도하는 것은 다만 신을 모독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명예로 삼는다고 했다.
또 강도(江都)와 남한산성에 쌓아 둔 곡식 칠천여석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청하니 상께서 따랐다. 여름에 영의정으로 승진했으나 가을에 사직했고, 갑신년(1704) 봄에 좌상 심기원(沈器遠)이 모반(謀叛)하여 복주(伏誅)(21)되자 국문에 참예한 공로로 안마(鞍馬)(22)를 하사받았다. 겨울에 영중추를 사임했고, 병술년(1706)에 바람과 추위로 감기에 걸려서 정월 24일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23)하니 향년이 78세이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감께서는 크게 슬퍼하여 삼일간 조시(朝市)를 거두고 근시를 보내 조상하고 치제(致祭)하며 부조(賻助)를 예보다 더하니 위의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 시골의 천민에게 이르도록 슬퍼하지 않는 이 없어 크게 탄식하기를 「어진 재상이 죽었다」라 했고 훈영(訓營)의 사졸(士卒)들도 공의 은혜에 감격하여 쌀을 거두어 부조하고 와서 회곡(會哭)한 사람이 수천명이 넘었다. 유사(有司)가 상사(喪事)를 비호하여 이 해 三월 어느날 양근군 남가좌곡(楊根郡 南佳佐谷) 해좌의 언덕에 영폄(永킋)하니 애영(哀榮)의 전례가 갖추어진 것이다.
공이 처음 의령 남씨(宜寧南氏)인 참의 언경(彦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고 기계 유씨(杞溪兪氏)인 찬성에 추증된 함(涵)의 딸을 재취하니 판서 강(絳)의 손녀다. 공을 돕는데 덕이 있었고 또 여사(女士)의 행의가 있었다.
공이 여러 번 큰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또 오랫동안 천부(泉府)(24)의 일을 관장하니 사람들은 기름진 곳이라고 했지만 일찍이 털이나 개자만큼도 공물을 더럽힌 일이 없었다. 공이 손님을 좋아해서 손님이 오면 문득 술과 고기를 준비하거나 혹은 이름있는 기생을 부르기도 했지만 부인은 항상 흡족하게 상을 마련하였고 싫어하는 빛이 없었다.
잉첩(媵妾)과 시비(侍婢)를 다스리고 서출(庶出)을 대함에 있어 씩씩하게 임하고 은혜로움을 보이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했으며 이웃과 화목하고 친족에 돈독하여 경사 때나 우환이 있을 때 두루 도와 주었으며 집을 다스리고 가산을 정리함에 모두 본받을만 하였다.
공은 항상 부인을 칭찬하여 말씀하였다.
『두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제사를 지성으로 받드는 사람이다.』
공보다 6년 먼저 죽었는데 두 부인 모두 공의 묘 좌우에 부장했다. 공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어서 종형(從兄)인 엄의 아들 희세(熙世)로 후사(後嗣)를 삼았다. 희세는 문과에 급제해서 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교리에 그쳤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측실(側室)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정남(廷男)은 절충계(折衝階)에 올랐고 정달(廷達)은 선비다.
교리(校理)는 먼저 감찰 유대우(兪大佑)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으니 맏은 곧 불녕(不쨻) 최(最)의 아내요, 다음은 생원 이행일 (李行逸)에게 시집갔다. 또 현감 박안정(朴安鼎)의 딸을 후취(後娶)하여 3남1녀를 낳으니 맏아들 추(樞)는 지금 현감으로 있는데 중부(仲父)인 청운군 명세(命世)의 후사로 출계했다. 다음은 기(機)와 권(權)이고, 딸은 진사 신정(申晸)에게 출가했다. 추(樞)는 조형(趙珩)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으니 인서(麟瑞)와 봉서와 귀서(龜瑞)요, 기(機)는 조윤석(趙胤錫)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권(權)은 이만웅(李萬雄)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신최(申最)는 2남4녀를 낳으니 맏아들 의화(儀華)는 진사요, 다음은 범화(範華)며 딸은 권두추(權斗樞)에게 출가하니 정자(正字)요, 다음은 한백기(韓伯箕)에게 출가했다. 다음은 진사 김흥(金興)에게 출가했으며 다음은 권적(權頔)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신정(申晸)은 3남1녀를 낳았는데 남은 징화(徵華)와 서화(瑞華)와 계화(啓華)요, 딸은 어리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이십여 명이나 된다.
공의 키는 사람의 중간을 넘지 아니하지만 넓은 이마와 큰 귀에 소리는 종이 울리는 것같고, 수염이 펄펄 날려서 바라보면 엄연(儼然)해서 범(犯)할 수 없을 것과 같았지만 나아가서 보면 따사로운 화기가 훈훈한 동작과 어묵(語默)이 구차스럽지도 아니하고 또 강하지도 아니하였다. 스스로 규구에 맞았으며 효도와 우애는 하늘이 준 것으로 그것을 이루어 친척에게 화목했으니 이미 고(孤)라 칭했지만 생가와 양가의 어머니인 이씨와 정씨의 양대부인(兩大夫人)은 모두 무양(無恙)하여 좌우로 봉양하는 것이 모두 그 뜻에 맞도록 했으며 부지런히 복종하여 게으르지 아니했다.
일찍이 종들을 시켜서 수고를 대신하게 한 일이 없었고 초상을 당하면 슬퍼하고 제사가 들면 공경하여 인정과 글이 구비하였다. 죽은 아우의 손녀를 길렀는데 사랑으로 보살핌이 지성(至誠)에서 나왔고 과부로 있는 누이동생을 도우며 궁한 친척을 거두어서 간곡한 은의(恩義)가 있었다. 먼 친척도 간격 없이 가족같이 생각하여 길흉사의 비용을 도와서 어려움이 없게 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서 젊어서 무사(膴仕)(25)에 올라 여러 번 웅부(雄府)를 다스리고 칠진(七鎭)의 큰 고을을 거친 뒤 세 번 탁지(度支)를 맡고 네 번 중서(中書)에 들어갔으나 작은 마음으로 항상 조심하여 털끝만치도 공과 사의 견책(譴責)을 받은 일이 없고 대배(大拜)에 이르러서도 정성스럽게 다듬고 살펴서 칼을 던져도 여유가 남았다. 생각하는 일이 주상(周詳)하여 기회를 맞이하면 문득 민첩하였고 계산하여 결단함이 점치는 것보다 신기했다.
당시에 재서(才諝)로 칭찬받던 사람들도 집으로 물러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공은 세상의 경륜을 갖추기 때문에 영화와 복록에는 뜻이 없었다. 계해년 뒤부터 쉴 것을 고하고 관직을 거둔 뒤 물러나서 강과 들에 우유(優遊)하면서 도서(圖書)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고기잡고 낚시질하며 즐겼는데 국가의 형세가 번잡해지면서 재주 있는 사람의 도움이 급해지자 무거운 책임과 큰 일이 돌아오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공사에는 정성과 조심으로 더욱 힘썼으며 늙어갈수록 더욱 두터워서 빠지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고 좋고 나쁜 것을 제량(制量)해서 가만이 국맥(國脈)을 연장하고 그 공을 드러내지 아니하니 사람마다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의 문장이 체(體)를 밝히는 데 힘을 쓰고 마침내 근본인 경술(經術)을 써서 정사에 시행하니 뜻과 내용이 합쳐져서 명랑하고 윤택하며 간곡하면서도 창달하였고 시(詩) 또한 청수(淸膄)(26)하면서 법도에 맞았는데 더욱 팔법(八法)에 능하니 당시의 보배가 되었다. 그 밖에도 활쏘는 재주에 통하여 넉넉하게 능품(能品)(27)에 들었으나 모두 지엽(枝葉)으로 보아 스스로 이름을 내지 아니했다. 지은 것이 흩어져서 거두지 못하고 약간의 시문과 소차(疏箚)가 남아 있어 합하니 세권인 것을 간행해서 집에 보관하였다.
아! 공은 조정에 벼슬한 지 50년이나 되어 중외(中外)의 벼슬자리를 두루 지내면서 명성과 실적이 모두 빛이 나니 이것을 등재하여 오래도록 전하고자 함에 형체를 드러내고 모범이 될만한 것이 이와 같이 적지는 아니할 것인데 공이 이미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하지 아니했다. 불녕(不佞) 또한 늦게 태어나서 아는 것이 공의 소장(少壯) 시절에 기력(驥力)을 전개할 때에 미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고 견문(見聞)을 참작하였으나 빠뜨린 부분이 너무 많고 불녕 또한 공을 본받고자 하였으나 오직 아를답게 장식하지 못하였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명한다.
크도다 빛나는 집안이 청송에서부터 본관이 시작됐네. 큰 산이 석학(碩學)의 괴수 내리시어 장수와 정승이 몸에 따랐네. 경사를 열어 후손을 위하니 그 혜택 크게 젖었네. 왕후 둘과 정승 셋은 예날에도 없었던 것을. 빛을 잉태하고 수기를 길러서 나의 착한 규모를 두텁게 했네. 전해 온 높고 큰 표상은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거리를 누볐네.
금중(禁中)에선 염파(廉頗)와 이목(李牧) 같아서 때에 맞은 필요한 인재였네. 조정이나 변방에서 서우(西隅)를 경영하고 여러 고을 두루 돌고 금오(金吾)의 장도 됐네. 이에 황비(黃扉)를 돕고 이에 판도(版圖)를 장악했네. 이에 태계(台階)에 올라 드디어 조화의 추를 돌렸네. 자신의 곧은 말이 아니었다면 어찌 어렵고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을까. 집을 지탱하는 동량이오, 내를 건너는 뗏목일세.
오직 공인(工人)이 대신하나 그 규모는 직접 세웠네. 소리없이 불어나니 기운이 있는 자 소생하네. 꾀하고 기록함이 떳떳하니 백세토록 믿으리라. 보라 저 양근의 언덕에 공경하여 그 의장을 묻었네. 내 그 유덕(幽德)을 명하니 하늘과 땅으로 더불어 함께 하리라.
손서(孫婿) 전함경도사(前咸鏡都事) 신최 지음.

註① 목릉(穆陵):조선 제14대왕 선조(宣祖)의 능호(陵號). 즉 선조.
② 혼부(昏否):어둡고 잘못된 것. 정도에서 벗어난 일. 여기서는 광해주(光海主) 때의 혼암한 정치를 말함.
③ 원보(元輔):영의정(領議政)의 별칭. 우리 나라의 특수용어.
④ 미친(彌親):외손쪽의 친척. 또는 손서(孫壻).
⑤ 장옥(場屋):과거를 보이는 곳. 과장(科場) 일반적으로 시험을 치루는 백일장(白日場) 또는 향시장(鄕試場)을 말함.
⑥ 석갈(釋褐):천한 사람이 입는 갈(褐)옷을 벗어 버린다는 뜻으로 처음으로 벼슬살이 함을 말함.
⑦ 요속(僚屬):요관(僚官) 낮은 벼슬아치 속관(屬官).
⑧ 사전(四傳):사서(四書). 즉 중용(中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네 가지.
⑨ 예수(豫修):미리 닦음. 또는 사서를 정리하는 데 참여함.
⑩ 숙폐(宿弊):해묵은 폐단. 국민에게 폐가 되는 줄 알면서도 이해 때문에 쉽게 고치지 못한 폐단.
⑪ 승하(昇遐):왕의 죽음.
⑫ 애책(哀冊):왕이나 왕비 등이 승하했을 때 생전의 업적을 참작하여 시호를 내리는 책문(冊文).
⑬ 초토(剿討):토벌(討伐)하여 전멸(全滅)시킴.
⑭ 헌의(獻議):의견(意見)을 드림.
⑮ 선롱(先壟):선영(先塋) 조상의 무덤. 또는 아버지의 무덤.
⑯ 지부(地部):조선조 6조 중의 하나인 토지 재산을 맡아 처리하는 호조(戶曹)의 애칭.
⑰ 옹망(顒望):대망(大望). 국민들이 크게 기대함.
⑱ 혼구(婚媾):혼인(婚姻). 혼(婚)은 처음으로 사돈 간이 되는 혼인 구(媾)는 사돈 간에 또 맺는 혼인.
⑲ 돈유(敦諭):친절하게 타이름.
⑳ 구언(求言):임금이 신하(臣下)의 직언(直言)을 구함.
  (21)복주(伏誅):형벌(刑罰)에 복종(伏從)하여 죽임을 당함.
  (22)안마(鞍馬):안장을 지운 말 또는 말과 안장.
  (23)고종(考終):고종명(考終命). 타고난 생명을 마침. 즉 죽음.
  (24)천부(泉府):황천(黃泉)·구천(九泉)·구원(九原) 등 모두 사람이 죽은 뒤 돌아간다는 저승을 말함. 일명 호조.
  (25)무사(膴仕):충분히 대우하여 사람을 씀. 또는 후한 녹봉(祿俸)을 타면서 벼슬살이 함.
  (26)청수(淸膄):파리하지만 깨끗함. 거짓과 꾸밈없이 깨끗함.
  (27)능품(能品):유능(有能)한 작품(作品) 또는 훌륭한 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