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휘 종)

청원군 휘 종 묘소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묘 표 석

靑原君諱淙事蹟(청원군휘종사적)
공의 자(字)나 호와 생년은 전하지 않아서 불명이나 바로 위 형님이신 안효공(安孝公)께서 1375년생(고려우왕1년 을묘)이신 점을 고려하여 추정한 것임.
태조2년(1393) 10월10일 태조의 2녀인 경선궁주(慶善宮主)에게 장가를 가니 16세가 아니었나 추정됨.
태조2년(1393) 10월17일 청원군(靑原君)으로 봉군되다.
태조7년(1398) 9월1일 청원후(靑原侯)로 개봉(改封)되다.
태조7년(1398) 10월1일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다.
태종1년(1401) 1월25일 청원군(靑原君)으로 환원 봉군되다.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서 태상왕전(太上王殿:太祖宮)의 헌수연(獻壽宴)에 참알(參謁)하고 시연(侍宴)하다.
태종7년(1407) 3월12일 태종(太宗)이 인덕궁(仁德宮:定宗宮)에 나아가서 술자리를 베풀고 돌아오는 길에 청원군(靑原君:沈淙)댁에 들렀다가 환궁(還宮)하다.
태종8년(1408) 11월11일 경상도 시위군절도사(侍衛軍節度使)로 김승주(金承霔)와 공히 겸무(兼務)하게 하다.
태종12년(1412) 6월25일 정종비(定宗妃) 김씨의 승하(昇遐:사망)로 태종의 명에 의하여 전(奠)을 올리고 철조(輟朝) 7일과 정시(停市) 5일 대소제사의 정지(大小祭祀停止) 음악과 혼가(婚嫁)를 금지시켰다.
태종14년(1414) 4월19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하여 청원군을 죄주기를 청하니 이는 지난해 가을에 임금을 따라 남행(南幸)하였을 때 몰래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이 보낸 생강을 받고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종16년(1416) 11월9일 청원군 심종(沈淙)을 교하(交河)에 안치(安置)하였다. 계사년(癸巳年:太宗13年:1413)에 전라도에서 강무(講武)하는 행사에 임금이 행차하였는바 따라가게 된 청원군 심종이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과 비밀히 사람을 시켜 내통하고 청원군에 생강상자를 주었다. 임금이 알고서 물으니 청원군이 숨기고 고하지 않았다. 청원군이 반성하지 않고 또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계속하여 상소함으로서 조치를 한 것이다.
태종16년(1416) 11월22일 청원군 심종의 직첩과 공신록권(功臣錄券)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어서 외방에 자원안치(自願安置)하였다.
태종18년(1418) 3월15일 청원군 심종이 황해도 토산현(黃海道 兎山縣:現 金川郡 兎山面)에서 별세하였다. 심종은 태종의 동모제(同母弟) 경선궁주(慶善宮主)에게 장가들어 청원군에 봉해졌으나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과 사통(私通)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쫓겨나 귀양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별세하였다. 연령은 40세 아니면 41~2세일 것이고 슬하에는 무남독녀(無男獨女)이었으며 양자 입계함이 없이 따님은 덕수이씨(德水李氏)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명신(明晨)에게 출가하였으며 이부사는 시호가 강평공(諡號 康平公)이시고 청원군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坡州市 汶山邑 雲泉里)에 쌍분으로 모셔 있고 향사는 매년 음 10월10일 덕수이씨에 의하여 외손봉사(外孫奉祀)하고 있으며 강평공 이명신공은 율곡(栗谷)선생의 5대조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