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은부원군 (휘 호)묘표

청은부원군 휘 호 묘소
소재지: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묘 비

 

묘 표 석


靑恩府院君沈公之墓表
公諱浩字希天靑松沈氏系出高麗侍中諱洪孚三傳而靑松伯德符入我朝爲左相赫世著顯至公祖諱權以監司 贈左贊成考諱鳳瑞以禁府都事 贈領議政妣全州李氏生公繼妣延日鄭氏有旌門肅朝丙子公女爲世子嬪以嬪父特授永昭殿叅奉己卯遷議政公憂明年遭鄭夫人憂癸未陞司饔院僉正甲申二月十三日卒享年三十七禮葬于廣州校洞壬坐之原乙卯七月十三日夫人歿而祔公之墓景廟卽位冊后是端懿王后 贈公領議政靑恩府院君夫人高靈朴氏封靈原府夫人無嗣英廟壬子命立公后駿賢入嗣早歿除長陵叅奉不及繼子 官止縣監以下子孫不錄公之世旣久子姓零星懿德未著不得太史氏所採當日手書斷爛未詳據以識之公自幼潛邃簡默動止有常而孝友根於性器度之溫秉執之端惇睦之行積於內而見於外也常以早失所怙爲至痛終致於嗇其年未得雲用於世可勝昔哉斯可以죏心跡而加之一惠之典宜在太常氏也
德水後人 李敏德 謹撰

청은부원군심공지묘표
공(公)의 휘(諱)는 호(浩)요 자(字)는 희천(希天)이니 청송심씨이다. 계통(系統)은 고려시중(高麗侍中) 휘 홍부(洪孚)로 부터 나왔고 세번 전하여 청송백(靑松伯) 덕부(德符)는 조선조에 들어와 좌상(左相)이 되어 세상에 현저(顯著)하게 빛났다. 공의 할아버지 휘 권(權)은 감사(監司)로써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봉서(鳳瑞)이니 금부도사(禁府都事)로써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니 공을 낳았고 계비(繼쯼) 연일정씨는 정문(旌門)이 있다. 숙종 병자년(1696)에 공의 따님이 세자빈(世子嬪)이 되니 빈의 아버지도 특별히 영소전참봉(永昭殿叅奉)에 제수(除授)되었다. 기묘(1699)년에 의정공의 상(喪)을 당하였고 이듬해에 정부인(鄭夫人)의 상을 당하였으며 계미(1703)년에 사옹원첨정(司甕院僉正)에 승진되었고 갑신(1704)년 2월13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37이었으며 광주교동(廣州校洞) 임좌(壬坐)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고 을묘(1735)년 7월13일에 부인이 졸하여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여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니 이분이 단의왕후(端懿王后)이시다. 공에게 영의정 청은부원군이 추증되었고 부인 고령박씨는 영원부부인(靈原府夫人)에 봉하여졌으나 아들이 없어서 영조 임자(1732)년에 준현(駿賢)을 공의 후(后)로 입사(入嗣)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장릉참봉(長陵叅奉)에 제수되었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계자(繼子) 성(鋮)은 벼슬이 현감(縣監)이요 이하 자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세대(世代)가 이미 오래되었고 자손들이 몰락(沒落)하여 아름다운 덕이 나타나지 못하여 사관(史官)의 채택하는 바 못되고 그 당시 손수 쓴 글이 여러 쪼각으로 찢어져서 알아볼 수 없으나 공은 어려서부터 침착(沈着)하고 묵중(默重)하며 행동거지(行動擧止)에 법도가 있었고 효도하는 것과 우애하는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고 재능(才能)과 도량(度量)의 온후(溫厚)함과 처신(處身)의 단정함과 돈목(敦睦)하는 행실이 마음속에 쌓여서 밖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항상 일찍 아버지를 여윈것을 지극한 아픔으로 삼고 끝내 수(壽)를 못하며 세상에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哀惜)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이것이 마음의 자취가 될만하니 한번 은전이 내리는 것은 마땅히 사관에게 달려 있다.
덕수후인 이민덕이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