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영의정공(휘 설)묘갈명

증영의정공 휘 설 묘소(만사공의 고위)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묘 표 석


贈議政府領議政監役沈公諱偰墓碣銘
日今右相沈公狀其先府君 贈議政公世系歷官壽年子姓於浥而授不侫絅曰不肖終天之痛異夫人也未釋褐貧不具伏臘以致吾父母一日歡旣通籍勞於 王事使吾父母惟門誾之望是勤終也回車之日不及執手之托天乎不肖之罪也夫不肖之罪也夫願貣子一言銘諸玄石以紓吾哀而寫吾慕焉於是不佞亦於邑而言曰不佞固孤露之最者間公之言肝腑鑿而涕涔霪下其何忍狀子之志於言顧吾聞詩曰永言孝思孝思維則吾子其感於是詩者乎一世之爲人子者其勸爾已沈出靑松自高麗府院君龍顯三世而至德符侍中侍中之後入 國朝冠冕相續爲東方世族之冠諱光彦左叅贊是生錦司憲府監察生諱宗忱肅川府使娶丹陽禹氏判官仁秀之女其上世玄寶封丹陽伯卽議政公考若妣也議政公諱偰字子卿晩以蔭仕爲四山監役後用相公貴累 贈議政府領議政配貞夫人全州李氏加贈貞敬夫人夫人父靑原都正 成宗大王四代孫閨訓斬如也沈氏族盛且貴而惟議政公位不肖貌壽僅一甲子天之報施何其歟然吾觀於古宜達而窒則其歸成後之人也必大盍於相公徵之哉相公雖自以三牲之養不得逮親之存意慊慊平生者而玉堂金馬之榮其不在高堂無恙之日乎矧其后立 朝三十餘年外而觀風內而秉銓莫不官稱以至公宰世之論者咸曰父母之敎然也云爾則顯親若相公者可矣議政公卒於庚午距其生隆慶庚午得年六十一以其十二月十七日葬于坡州分水院癸坐之原從先兆也夫人卒於辛巳距其生壬申得年七十其年十一月祔于議政公墓東生二子三女長之源卽右相次之泓女生員尹忠得叅奉姜恰生員元綸之源初聘佐郞權得己女無子後娶縣監尹宗之女生三男二女益相益顯益顯尙淑明公封靑平尉養子益善生二男一女餘幼姜恰生三男一女男鄗郈邰鄗生三男郈生一男邰生一男女洪允亨生二男一女之泓娶幼學李明善女生三女柳楘元振洙一未笄銘曰何以稱世屢卿屢公何以稱配天潢族際位細何慊夫夫媍媍不食其贏成在孝子煌煌天渥幽隧幷美我銘匪誣慶方未已

甲午月日
崇政大夫判中樞府事 趙 絅 譔


증의정부영의정감역심공휘설묘갈명(번역문)
어느 날 지금 우상(右相)으로 있는 심공(沈公)께서 그의 작고하신 아버지인 증의정공(贈議政公)의 계보와 이력과 수년(壽年)과 자손록 등을 갖고 와서 울먹이면서 시원치 못한 경(絅:글 지은이)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불초(不肖)의 평생의 통한은 남들과 다르니 갈옷①을 벗기 전에는 가난하여 유월의 복날과 섣달의 납일날에 나의 부모님에게 하루도 즐겁게 갖춰드리지 못했고, 관로에 들어간 뒤로는 국사에 매여서 나의 부모로 하여금 의려지망(依閭之望)②에 시달리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였고, 벼슬을 마친 무렵에는 손을 잡고 의탁 한 번 못했으니 하늘이 나의 허물을 삼았으며 무릇 불초의 허물이었오.
원컨대 그대는 한 말씀을 빌려주어서 비석에 명을 삼아 나의 슬픔을 풀어 주고 나의 사모하는 정을 쏟아 부어 주시오. 이에 나 역시 울먹이면서 말하기를
『불녕(不佞)③은 진실로 고독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서 공의 말씀을 듣고 나니 폐부가 찢어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니 그 어찌 차마 그대의 뜻을 글로 표현하리오. 내가 들으니 시전에 이르기를 길이 효도하고 사모함이여 효도와 사모는 법칙이 있다 하니 그대가 이 시에 느꼈음이리니 한세상의 남의 자식된 자들에게 권해본 따름이다.』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으로부터 나왔으니 고려 부원군(高麗 府院君)인 용현(龍顯)을 필두로 시작하여 3대만에 시중(侍中)인 덕부(德符)에 이르렀고, 시중의 뒤로는 본조로 들어와서 큰 벼슬이 서로 이어 동방 세족(世族)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름 광언(光彦)은 좌참찬(左叅贊)이었는데 이 분이 금(錦)을 낳으니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이고 감찰이 종침(宗忱)을 낳으니 숙천부사(肅川府使)인데 단양 우씨(丹陽禹氏)인 판관 인수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그 윗대는 현보(玄寶)인데 단양백(丹陽伯)을 봉했었다.
이분들이 곧 의정공의 아버지요, 어머니이다. 의정공의 이름은 설(偰)이고, 자는 자경(子卿)인데 늦게 음직(蔭職)④으로 벼슬하여 사산감역(四山監役)⑤이 되었으나 뒤에 아들이 정승이 됨으로서 여러 차례 귀하게 되었다가 마침내 증직으로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다.
부인은 정부인 전주 이씨(貞夫人 全州李氏)였는데 증직이 더하여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부인의 아버지는 청원도정(靑原都正)인데 성종대왕(成宗大王)의 4세손으로 내훈⑥이 참신하였다. 심씨들이 씨족이 번성하고 또한 현귀하였으나 오직 의정공만이 행직에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고 수(壽) 또한 겨우 60세를 채웠으니 하늘의 갚음이 어찌 그리 인색하였는가. 그러나 고사를 살펴보니 마땅히 현달할 것이 막히게 되면 그 귀추가 후손에게 이뤄짐이 반드시 크나니 어찌 우상에게 징험됨이 그렇지 않으리오. 상공(相公)⑦께서 비록 하루에 3마리의 희생으로 봉양할지라도 부모들의 평생토록 정성 드린 뜻에는 미치지 못하여 백옥 같은 집에서 황금 같은 영화를 누려도 양당께서 편히 지내시는 날만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그로부터 조정에서 몸을 담은지 30여 년 밖으로는 풍물을 살피고 안으로는 전형권을 잡았으니 관작이 맞지 않음이 없고 공변된 재상이 되고는 세상의 의론들이 다들 부모의 교육 덕분이라고들 하니 부모를 들어냄이 상공과 같음이 마땅하다.
의정공께서 경오(庚午:1570)년에 작고하니 그의 생년인 융경경오(隆慶庚午:1510)로부터 득년이 61세이다. 그 해 12월 17일 파주 분수원(坡州 分水院)의 계좌(癸坐)의 무덤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에 따른 것이다. 부인은 신사(辛巳:1581)년에 마쳤으니 지난 임신(壬申:1512)년에 태어났으므로 득년이 70세다. 그 해 11월에 의정공의 묘소에 합부(合祔)하였다. 2남3녀를 낳았으며 맏이가 지원(之源)이니 곧 지금의 우상이고, 다음이 지홍(之泓)이고, 딸은 생원(生員)인 윤충득(尹忠得) 참봉 강흡(叅奉 姜恰) 생원 원륜(生員 元綸)에게 각기 시집갔다. 지원이 처음에 좌랑 권득기(佐郞 權得己)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서 뒤에 현감 윤종지(縣監 尹宗之)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2녀를 낳았으니 남에 익상(益相)·익현(益顯)·익창(益昌)·익성(益成)인데, 익현은 숙명공주(淑明公主:효종의 둘째딸)에게 장가들어 청평위(靑平尉)에 봉했고, 양자(養子)인 익선(益善)은 2남1녀를 낳았으며 나머지는 다들 어리다.
강흡이 3남1녀를 낳았으니 남에 호(鄗)와 후(郈)와 태(邰)인데 호는 3남을 낳고, 후는 1남을 낳고, 태는 1남을 낳았으며 딸은 홍윤형(洪允亨)에게 시집가서 2남1녀를 낳았다. 지홍은 유학 이명선(幼學 李明善)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를 낳았으니 유목(柳楘)과 원진수(元振洙)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미혼이다. 명에 이르되
『세상에서 어떻게 칭했는가? 정승 판서 여럿이고 어떻게 짝했는가? 은하수 같은 족벌일세. 위가 낮은들 어떠한가? 부부의 도리 다했도다. 잘 먹이지 못하여도 모두들 효자이고 밝고 밝은 하늘 은택 무덤길도 아름답다. 나의 명에 거짓 없어 여경이 끝이 없네.』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조경 지음.


註① 갈옷(褐衣):굵은 베옷이니 천인들이 입는 보통 옷.
② 의려지망(依閭之望):마을 앞에 기대어 서서 밖에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음.
③ 불녕(不佞):자기의 겸칭. 즉, 못난 것.
④ 음직(蔭職):추천으로 받는 벼슬.
⑤ 사산감역(四山監役):서울 근교의 산을 분장하여 성곽과 산림을 관리하는 감독관.
⑥ 내훈(內訓):가정의 법도.
⑦ 상공(相公):상은 재상이니 곧 정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