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관찰사공(휘 권)묘갈명

감사공 휘 권 묘소
소재지: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선영하

묘 표 석


감사공 휘 권 신도비


十四世祖 禮曹參議 全羅觀察使公 諱 權 墓碣銘
公諱權字聖可靑松沈氏冠冕舄奕世比之東京馬鄧靑城伯德符開國元臣至忠惠公連源位上相生諱鋼國舅靑陵府院君是爲公高祖公之考曰熙世弘文校理以玉果縣監 之子出後領議政忠靖公諱悅玉果以靑陽君義謙之子爲伯父後忠靖以忠翼公忠謙之子爲叔父後四曾祖皆靑陵之子也妣密陽朴氏縣監安鼎之女以癸未七月九日生公乙卯中司馬壬戌擢增廣文科分隸槐院薦入翰苑歷正言持平己巳時事嬗變謫南海甲戌放還爲弘文修撰校理獻納吏曹佐郞知製敎兼文學又自議政府舍人移應敎輔德由執義陞拜承旨兵曹參知禮曹參議丁丑拜全羅監司四月十五日暴疾卒于巡營享年五十五葬楊根郡南加助谷戌坐原夫人全義李氏觀察萬雄之女有一女無子女適判官趙泰壽以伯氏僉樞仲子鳳瑞爲後官止禁府都事有二子浩僉正次洙趙泰壽二子駿命進士龜命生員僉正一子二女子維賢女長冊爲王世子嬪次適士人宋徵啓公風度凝重氣象溫粹與人言笑款內有歧縣邑有寃獄李翔爲憲長自爲證左力主之按使委公參覈獄遂白而凡獄情之涉於翔者不事暴揚人稱其寬焉諫臣之劾李師命也公與李有故心知時論太激頗持平恕由是久處散地臺官柳成運論公救師命時當玉堂錄或有持前事嗛公者余忝長經幄語諸僚曰今日揀論思舍沈聖可誰可者遂選焉己巳一番人棣國獄事屢起公坐言語株連與趙君泰耉李君徵明趙君亨期同被逮竟有海島之行實無妄之禍也居二年量移忠州及坤宮正位舊人以次復用公始歷踐華膴出莅藩維庶幾展其聲操守不以幽隱改度性和厚有不忍傷人之意立朝言議專主於平緩喜掩匿人過雖以獲詆訛不悔顧於是非之辨關係世道者爲之伸枉紏邪不以時勢利害爲意及戚聯天家恂恂自勅畏謹愈甚搢紳以此多之乙卯以後節潛伏金公錫胄深憂之知公有識慮要與計事公以爲此非士之本分捲歸鄕庄以遠之金公必欲致公公終不起在翰苑學儒金盛大等通文八道搆詆明齋尹公公心不韙與舘僚罰盛大有李震顔者投疏救學儒公疏辨之 上優批命罰震顔俄因大臣言公及諸僚坐罷嘗爲燕業不幸中途而沒人咸惜之其爲政不屑屑於簿書凌雜而淸凈寬簡事擧而民不撓自島中移配也燕岐士民穀橐貰騎以助之其遺愛如此公早孤奉母夫人愉惋盡其誠事伯氏如嚴父伯氏常曰雖孝子之有深愛者其奚過矣事姨母朴夫人甚謹與姊弟柝箸自占其荒斥老羸者庶族疎昆弟待公而衣食婚娶者爲多公雖不以文辭自居而下筆聸敏辭理俱鬯嘗取古史論其得失叅以近世事並論黨禍所由起著書一編並詩文若干卷藏于家余少與公及申季晦游相善也先後登朝籍每相對色辭靄如未數十年公與季晦俱未老而沒傷哉公之外孫趙君駿命以李夫人之命具狀來請墓文其辭悲切謹受而銘之銘曰
觀世之人褊心容氣當淸要者刻礉其論以取聲勢鮮或和易履盛滿者呂鉅其容以生驕貴罔或謙畏如吾聖可不撓其平不厲其名不矜其盈不礩其行不耉而寧不公而卿以葆其馨以遺其嬴嗚呼觀此者可以識公之平生

14세조 예조참의 전라관찰사공 휘 권(權) 묘갈명
公의 이름은 권(權), 字는 성가(聖可), 청송 심씨가 벼슬로 제일 빛났으니 세상에서 동경(東京)의 마(馬)·등(鄧) 씨에 비교하였다.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는 개국 원신(元臣)①인데 충혜공(忠惠公) 연원(連源)에 이르러서 직위가 領相이었다. 아들 강(鋼)을 낳으니 국구(國舅)로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이니 이 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공의 아버지는 희세(熙世)인데 홍문관 교리이고 옥과현감 엄()의 아들로서 영의정 충정공(忠靖公) 諱 열(悅)에게 출후(出後)②했다. 옥과(玉果)③는 청양군(靑陽君) 의겸(義謙)의 아들로서 백부의 뒤를 잇고 충정은 충익공(忠翼公) 충겸(忠謙)의 아들로서 숙부의 뒤를 이었으니 四曾祖가 다 청릉의 아들이다. 어머니 밀양 박씨는 현감 안정(安鼎)의 딸이다. 癸未(1643)년 7월 9일에 공이 태어났다.
乙卯(1675)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고 壬戌(1682)년에 증광시(增廣試)④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에 예속되었다가 추천으로 한림원에 들게 되고 정언 지평을 거쳐 己巳(1689)년 선위(禪位) 사건으로 남해로 귀양갔다가 甲戌(1694)년에 풀려나서 홍문관 수찬 교리 헌납 이조좌랑이 되고 지제교에 문학을 겸했다. 다시 의정부 사인에서 응교와 보덕으로 옮기고 집의를 거쳐 승지에 오르고 병조참지와 예조참의가 되었다.
丁丑(1697)년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는데 4月 15日 갑자기 일어난 병으로 순영(巡營)⑤에서 죽으니 향년 55歲였고, 양근군 남쪽 가조골(加助谷)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전의 이씨인데 관찰사 만웅(萬雄)의 딸이다. 무남독녀를 낳아 판관 조태수(趙泰壽)에게 출가시키고 첨추(僉樞)인 맏형의 둘째 아들 봉서(鳳瑞)를 양자로 삼았으니 벼슬이 의금부 도사였다. 봉서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맏아들 호(浩)는 첨정이고 둘째 아들은 수(洙)이다. 사위인 조태수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준명(駿命)은 진사이고 귀명(龜命)은 생원이다. 손자인 첨정이 1男2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유현(維賢)이고 맏딸은 왕세자 빈(王世子嬪)에 책봉되고 둘째 딸은 선비 송징계(宋徵啓)에게 출가했다.
공은 풍모와 도량이 바르고 침착하며 기상이 온화하고 맑아서 남과 웃고 말할 때 정성스럽고 너그러움이 있었다. 기현읍에서 억울한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이상(李翔)이 헌장(憲長)⑥으로서 자기가 증거를 마련하며 힘으로 밀어 부치는지라 안찰사(按察使)가 공에게 위임하여 사실을 조사하고 옥리(獄吏)가 자백하였으나 이상에게 포섭당한 옥졸에게 거칠게 아니하니 사람들이 공의 관대함은 칭찬하였다.
간관들의 이사명(李師命)에 대한 탄핵사건에 공이 이사명과의 연고 관계로 그 마음을 알고 있었고 당시 공론이 과격하였는데 지평(持平)이 편파적으로 용서하여서 이 때문에 오래도록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대관(臺官)인 유성운(柳成運)이 공에게 사명을 구제할 당시 玉堂에서 기록을 담당했다 하고 어떤 이는 이 일을 갖고 공을 한하는 지라 내가 경연청의 책임자로서 동료들에게 말하였었다.
『오늘 공론을 가려 심성가(沈聖可)를 용서할 생각이니 누가 옳은 지를 가려내도록 하시오.』
己巳(1689)년에 첫 번째 사람이 옥사와 관련하여 여러 번 공을 끌어들여, 죄인과 관련시켜서 공은 조태구(趙泰耉)와 이징명(李徵明)과 조형기(趙亨期)가 함께 체포되어 마침내 섬으로 가게 되니 실로 뜻하지 아니한 관재(官災)였다. 2년의 기한이 되어 충주로 옮기고 중전이 복위됨에 옛 사람이 차례대로 복직되어 공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고 크게 떨쳐 지위가 튼튼하고 명성이 퍼졌으나 지조를 지키고 처져 있을 때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성품이 화후(和厚)⑦하여 차마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 있을 때는 의논이 늘 평온하고 너그러웠으며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비록 속이고 비뜰게 말하더라도 다시 캐내지 아니하고 시비 거리가 생겨 관계 세도자(世道者)가 위해서 두둔하고 몰아 부치고자 해도 세도와 이해(利害)로써 뜻을 삼은 적은 없었다. 친척이나 조정에서도 스스로 진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척신(戚臣)이었으나 더욱 삼가하고 두려워하니 고관(高官)들이 칭찬하는 사람이 많았다.
乙卯(1675)년 이후 역절(逆節)⑧이 몰래 숨어드니 김석주(金錫胄) 공이 깊이 걱정하고 공의 식견을 알므로 함께 일을 계획하려 했으나 공은 이런 것이 선비가 할 본분이 아니라고 하며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멀리하니 김공이 힘써 공에게 매달렸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는 학유(學儒)⑨ 김성대(金盛大) 등이 팔도에 통문을 보내어 윤명재(尹明齋) 공을 얽어 묶고자 하니 공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관료들과 더불어 김성대를 벌주니 이진안(李震顔)이라는 자가 투소(投疏)를 하여 학유(學儒)들을 구출코자 함에 공이 소를 올려 변명하니 임금께서 비답을 내리시고 진안에게 벌주도록 명하셨다.
그 뒤 대신들의 말씀으로 인해 공과 관료들이 파직을 당하고 연업(燕業)⑩을 시도하다가 중도에서 사망하니 모두들 아까워하였다. 공이 조정일을 볼 때는 문서처리를 번거롭지 않게 하고 잡되지 않으며 맑고 너그럽고 간명하게 하여 일을 처리함에 백성들을 교란하지 않게 하니 섬에서 귀양 처를 연기(燕岐)에 옮기니 연기군의 사민이 전대에 쌀을 담아 말에 실어 도와주니 그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일찍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늘 즐겁게 그 정성을 다하고 맏형을 섬김에 엄한 부친같이 하니 형이 효자의 깊은 애정으로도 어찌 이보다 더 잘 하겠냐고 칭찬하였다. 이모 박씨 부인을 섬길 때 몹시 삼가며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시저를 펴고 둘러앉으니 그 거칠고 늙고 병든 자와 서족 원척까지도 공의 대우로 의식과 혼취(婚娶)⑪를 치르는 이가 많았다.
公은 문사(文辭)로써 자랑하지 않으며 붓을 잡으면 민첩하고 사리가 모두 활달하였다. 일찍부터 고사(古史)를 읽고 그 득실을 논하여 근세에는 당화(黨禍)⑫에 함께 참여하고 그 연유를 논하며 저서 한 편과 시문 몇 권을 집안에 소장하였다. 나는 소시적에 공과 신계회(申季晦)와 더불어 서로 잘 사귀고 앞뒤로 조정에 나아가게 되어 항상 서로 반기며 애연(靄然)하게 지낸 지 20年이 채 못되어 공과 계회(季晦)는 모두 늙기 전에 떠나니 슬프다.
공의 외손인 조준명군(趙駿命君)이 이부인(李夫人)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구비하여 와서 묘문(墓文)을 청함에 그 문사가 슬프고 처절하여 삼가 받아서 명하였다.
 명(銘)에 이르되,
 세상 사람들을 보니 마음은 좁고 기는 용렬하네.
 청관에 있는 요직은 그 이론만 내세워 명성만을 취하니 그 화하고 부드러움이 적고
 처지가 풍만한 자는 그 의용(儀容)⑬을 자랑하고 교만한 태도가 생기니 겸손하고 두려움이 없네.
 우리 성가(聖可)같은 이는 평소와 다르지 않고 그 명예를 거스르지 않으며 그 가득함을 싫어하고 그 행실이 넘치지 않았네.
 늙어서도 편하게 안 지내고 공직에서도 자만 아니하여
 그 향기를 가리개로 덮고서 그 나머지 세상에 끼쳤네.
 슬프다! 이 글을 보는 이는 가히 공의 평생을 알 것이다.
최석정(崔錫鼎) 지음.

주(註)
① 원신(元臣):으뜸가는 공신.
② 출후(出後):양자듦.
③ 옥과(玉果):지명이니, 여기서는 옥과현감 엄을 이름.
④ 증광시(增廣試):과거의 종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게 됨.
⑤ 순영(巡營):지방의 감영.
⑥ 헌장(憲長):책임 취조관.
⑦ 화후(和厚):온화하고 후덕함.
⑧ 역절(逆節):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김.
⑨ 학유(學儒):학문하는 선비.
⑩ 연업(燕業):벼슬하지 않고 한가하게 지내는 것.
⑪ 혼취(婚娶):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⑫ 당화(黨禍):사색 당쟁으로 인한 화근.
⑬ 의용(儀容):거동과 용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