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부윤공(휘 총)묘표

광주부윤공 휘 총 묘소
소재지: 공주 마성산 검암

묘 비 석


14世祖 通政大夫 廣州府尹公 諱 棇 墓表
뿌리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샘이 깊은 물은 마르지 않고 바다에 이르듯이 사람도 적선(積善)하면 그 후손이 번영하며 뻗어나간다. 우리 종족도 조상의 큰 공덕으로 끊임없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에 추원보본(追遠報本)에 정성(精誠)을 바치고자 한다. 광주부윤공비(廣州府尹公碑)를 세우는 뜻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公의 諱는 총(棇)이요 字는 자첨(子瞻)이니 靑松沈氏이다. 시조문림낭공(始祖文林郎公)의 諱는 홍부(洪孚)이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봉군(封君)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연속(連續)되어 이른바 잠영세족(簪纓世族)의 名門을 이루었다. 4,5,6世祖가 三相이요. 9世祖는 兄弟相의 한분이다. 5世祖 안효공(安孝公) 諱 온(溫)은 世宗大王의 국구(國舅)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다. 10世祖 諱 강(鋼)은 明宗의 국구(國舅)요 仁順王后의 아버지이며, 11世祖인 명신대사헌청양군(名臣大司憲靑陽君) 諱 의겸(義謙)은 公의 曾祖이다. 祖 諱 은 옥과현감(玉果縣監)이고 아버지 휴옹(休翁) 諱 光世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학문이 뛰어나 해동낙부(海東樂府)를 저술하였다. 14世인 公은 乙巳(1605) 8月 28日에 출생하니 총명 민첩하여 학문이 뛰어나고 지조(志操)와 절의가 있어 큰 그릇으로 인정(認定)하였다. 公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신채(神采)가 뛰어나고 도량(度量)이 넓었으며 지려(智慮)가 깊고 言論이 격앙하였다 라고 하니 公의 뛰어난 資質과 人品을 말하여준 일이고 乙亥年(163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자여도찰방(自如道擦訪)으로 在任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호군(胡軍)이 대거 침입(侵入)하여 我軍이 패하여 仁祖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신하게 되자 公은 국가위기(國家危機)에 목숨 바칠 때라 하고 경기감사(京畿監司)에 간청하여 수백군졸(數百軍卒)과 의병(義兵)을 차출받아 적진(敵陣)에 추격하여 많은 敵을 섬멸(殲滅)하고 數千의 포로를 잡는 전과(戰果)를 올리며 前進하다가 강화소식(講和消息)듣고 통곡하며 해산했다. 仁祖大王은 公을 引見하고 충의와 무공을 칭송(稱頌)하니 公은 자신의 공적(功績)을 사양하였다. 신령(新寧)과 경산(慶山)현감을 지낸 후 孝宗辛卯年(1651)에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여 훈련도감병조좌랑(訓鍊都監兵曹佐郞)을 거쳐 甲午年(1654)에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니 公은 王命으로 성역(誠力)을 다하여 성곽(城廓)과 병기를 一新하고 군량을 비축하며 군사(軍士)도 증원하였다. 公의 강직성(强直性)과 추진력은 원적(怨敵)의 대상이 되어 경기감사(京畿監司) 趙모의 主動으로 무고(誣誥)한 罪를 씌워 3年 옥살이를 거쳐 6年間의 웅천현(熊川縣) 귀양살이를 하는동안 病을 얻어 丙午年(1666) 10月 26日에 운명하니 享年 62歲이다. 장지는 公州市 우성면 귀산리 沈山이다.
公의 前夫人 新坪李씨는 1男을 두었으니 諱 약하(若河)요 若河는 2男1女를 낳으니 방(滂)과 장(漳)이다. 後夫人 咸平李씨는 3男6女를 두었으니 아들 약제(若濟)는 判事公 휘 헌(諱 櫶)에게 出系하였고 다음 若沂는 2男1女를 두었으니 沖과 瀜이다. 若潢은 2男을 낳으니 주(澍)와 부(溥)이다. 公이 가신지 3百餘年에 百子千孫의 후손은 國內外에 흩어져 살면서도 沈門家統 지키기를 잊지않고 있다. 國家施策에 따라 大田 唐津간 고속도로개통(高速道路開通)으로 公의 산소를 이장(移葬)하게 되자 종의(宗議)에 의하여 금년 4月에 택일(擇日)하여 沈門과 연고(緣故)깊고 子孫이 많이 사는 善山으로 옮기게 되었다. 公이 잠드신 유택(幽宅)을 수호(守護)하는데 子孫들은 정성(精誠)을 다하여 돈목(敦睦)을 더욱 두터이 하는데 힘써 가리라.
西紀2001年 辛巳 4月   日
11代孫 文學博士 載完 삼가 글짓고 앞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