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의랑공(휘 지윤)묘표

승의랑공 휘 지윤 묘소
소재지: 입면 약천 후록

묘 비 문


公姓沈氏諱之潤字德中貫靑松家全羅道玉果縣以高麗文林郞衛尉寺丞洪孚爲鼻祖入我朝有靑城伯諱德符德懿勳烈俱載 國乘也世襲冠冕號稱巨族至諱璿官判書當 端廟遜位棄官遯跡號忘世亭世所稱生六臣判書公居其一焉士林尙其德義建院而俎豆之寔公七世祖也而其裔霽湖杜菴龜巖克趾先美 四世並享于一院時人艶之高祖諱光亨以孝聞邃於經學 朝廷特除中學訓導不就卽霽湖公也曾祖諱錡軍資監直長祖諱彦謙同知中樞府事考諱民覺卽龜巖公也官至永柔縣令甲子适變嘗募兵勤 王丙子又倡義爲湖西保障事在倡義錄 妣淑夫人南原梁氏參奉淨女也幼習庭訓卓然有得長而自力於學問蔚然爲望士旣而不屑進取矢志林樊惟以經籍自娛公固無意於世而世亦無知公名者嗚呼惜哉公以 萬曆三十七年己酉三月二十三日生卒于 崇禎紀元後乙未六月二十九日享年四十七葬梁內艮坐原與配宜人安東金氏同窆宜人監役諱 女也生四男三女男長世元主簿次世益次世寅次世日生員女長適梁胤後次適金溢初次適李時煌世元早卒世益亦無嗣取世日子柱磶 爲後世寅男柱天世日有二男一女男長卽柱 次柱厦女適丁厚基嗚呼積趾而不食其報飽學而不究其用于其後庶可以大奮也公之六世孫樂胤謀伐石表墓來懇余謹按狀而敍其槪如右云
辛亥三月下澣綏祿大夫永明尉
豊山後人 洪顯周 提

14세조 승의랑공 휘 지윤(之潤) 묘표
公의 姓은 沈이요 諱는 之潤이고 字는 德中이며 본관은 靑松이다. 전라도 玉果에서 代代로 사는 집안으로 고려때 문림랑위위시승 벼슬을 지내신 홍부(洪孚)가 始祖이다. 이조건국 당시 청성백(靑城伯)이신 덕부(德符)의 공덕은 모두 국사에 記載되어 있으며 그후 대대로 벼슬을 하여 名門巨族으로 알려졌다. 선(璿)은 벼슬이 判書인데 端宗께서 왕위를 내놓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셨으며 自號를 망세정(忘世亭)이라 부르셨다. 그 당시 충성이 지극한 生6臣을 세는데 判書公이 그 가운데 한 분이므로 선비들은 그의 얼굴 높이는 뜻에서 書院을 세워 祭祀를 모신다. 이 분이 公의 7世祖이며 그분의 후손으로 제호(霽湖) 두암(杜菴) 구암(龜巖) 세분이 先祖의 美德을 잘 繼承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분을 祠堂에 함께 모시니 當時에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公의 高祖父의 諱는 光亨이니 孝行과 學問이 높아 朝廷에서 特別히 中學訓導에 除授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으셨다. 이 분이 바로 霽湖公이며 曾祖父의 諱는 기(錡)이고 벼슬은 軍資監直長이다. 祖父의 諱는 언겸(彦謙)이고 벼슬은 同知中樞府事이며 父親의 諱는 민각(民覺)이니 바로 龜巖公이시다. 永柔縣令으로 西紀1624年 甲子 이괄(李适)의 난에 의병을 모아 王을 호위하였는가하면 西紀1636年 병자호란에 또다시 의병을 모아 湖西를 지켰다는 사적은 창의록(倡義錄)에 기재되어 있다. 淑人 南原梁氏는 參奉 정(淨)의 따님이시다. 公은 어려서부터 가정 교훈을 通하여 얻은 바 있었고 成長하여 自力으로 향상된 그의 學問은 늠름한 망사(望仕)가 되었다. 公은 眞實로 出世하는데는 전혀 뜻이 없었으므로 世上에서 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아!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公은 西紀1609년 光海1年 己酉 3月 23日에 出生하여 西紀1655年 孝宗6年 乙未 6月 29日 享年 47歲로 終命하시니 藥川艮坐에 配位 宜人 安東金氏와 함께 안장하였다. 宜人은 金의 따님으로 4男3女를 두셨다. 長男 世元은 主簿이고 이남은 世益 삼남은 世寅 사남 世日은 生員이며 長女는 梁胤後에게 出嫁하였고 2女는 金溢初에게 出嫁하였으며 3女는 李時煌에게 출가하였다. 아! 公의 자손이 번창(繁昌)한 것은 公께서 生前에 누리지 못한 福을 死後에 받은 것이니라. 公의 6世孫 樂胤이 墓앞에 表石을 세우고자 하여 나를 찾아와 碑文을 간청하기에 이에 삼가 서술한다.
西紀1911年 辛亥 3月 하순에
綏祿大夫 永明尉 豊山後人 洪顯周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