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공(휘 지현)묘갈명

十四世祖 隱德君子 參奉公 諱 之灦 墓碣銘
公諱之灦字澤之姓沈氏靑松人麗末有諱德符官至左侍中封靑城伯公其後也高祖諱光彦吏曹判書諡胡安公曾祖諱錦司憲府監察 贈吏曹參判祖諱宗忱通政府使 贈議政府左贊成考諱繕工監役妣晉州柳氏開城經歷諱楯之女公以天啓四年癸亥七月一日生幼有至性五六歲時已能端坐親側應對惟謹父兄以其淸羸善病不爲課督而自好勤學見先賢格言必悅而慕之年十四兩兄沒於癘疫一家皆避出而公獨留喪側親自殮殯呼痛哀傷鄕隣咨嗟以爲庾袞不過也弱年從趙冶谷克善學小學四書家禮趙公深加奬異二十四遭外艱二十九遭內艱前後居喪哀戚過禮公素羸病人謂必難支保而終不至於滅性莫不感歎公旣失怙恃恃又連遭諸兄之喪自結城移寓於靑陽盖爲外姑多病其繼後子乃公之姊子故爲相依之計也從子早孤者數人公皆率來育養敎誨如己子焉某年以薦除長陵叅奉初以不謝爲未安欲應命而終以老病不赴公自二十年來至親之喪無歲無之公素篤於恩愛不能自堪然自以衰境傷生亦非全歸之道節情理遣人服其定力己卯正月偶感微疾以十八日終焉以其年八月葬于洪州湧川面求音坊辰向之原公爲人潔淨恬淡無一點塵俗少時嘗入科場見雜亂之狀遂不復赴擧早歲律身峻整頗有稜峭見人非違若將焉中年以後自以氣質褊急更濟以寬緩大書弘大平粹四字于壁上以自警待人接物一出於和厚嘗自慨然曰士生斯世抱負不輕而受氣甚薄身嬰重疾旣不能用切於爲己實地又不能隨衆擧業爲門戶計惟守靜保拙細繹舊聞爲寡過之人足矣又嘗曰口談聖賢而行不揜言焉用學問爲哉居憂時取家禮擊蒙要訣喪禮備要講究而遵行之晩年涵養純深於經傳及宋儒諸書玩索彌勤不以年老而自弛也所居有泉石之勝每至春暮風和秋晩凉生之時與童冠或山僧逍遙閑適於其間以自遣嗚呼如公者眞古所謂隱德君子者歟公配咸平李氏監察諱埈之女也與公偕老五十八年相敬如賓配德無違治家勤儉具有法度先公三年卒壽七十三葬與公同塋擧二男六女男益東次益來進士女長適黃燫縣監次洪量次南宮墍次鄭齊良次主簿李延會次參奉李喜相外出頗繁而兩子俱時無嗣續人又疑於福善之理焉拯與公未曾識面而公之從子益章從拯遊見其雅飭知有濡染頃年適移寓於洪州龍溪與公居相近遂得盍簪不覺情之如舊也及歸尼山公又遠來相訪適聞姊喪悲撓不能一語而別其從更未一會便滿幽明至今思之每爲悲恨今公之二子以拯之知公也來請墓銘銘公愧只愧衰陋文不足以傳遠也銘曰
維山有芝維谷有蘭有美碩人此焉考槃人莫我知馨香自在于以明之以發其晦
尹拯 撰

14세조 은덕군자 참봉공 휘 지현(之灦) 묘갈명
공의 휘는 지현(之灦)이요 자는 택지(澤之)이다. 성은 심씨이니 靑松사람이다. 고려말에 이름이 덕부(德符)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은 좌시중으로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공이 그의 후손이다. 고조부의 이름은 광언(光彦)이니 이조판서를 지낸 뒤 호안공(胡安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증조부의 이름은 금(錦)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이름은 종침(宗忱)으로 부사(府使)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석()으로 선공감의 감역을 지냈다.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개성부 경력을 지낸 순(楯)의 딸이다. 공은 癸亥(1623)년 7월 1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하지 아니하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지극한 성질이 있어 5,6세 때 이미 부모 옆에 단정히 앉아서 대답을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다. 부형들은 그가 깨끗하고 파리해서 병을 잘 앓기 때문에 글 배울 것을 독려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학문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공부했다. 선현(先賢)들의 격언(格言)①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하여 마음속에 새겨두고 잊지 아니했다. 14세 때 두 형이 역질(疫疾)②에 죽어서 온 집안이 모두 병을 피해 나갔으나 공은 홀로 시체 옆에 남아서 직접 염(斂)을 하고 슬피 통곡하고 서러워하니 마을과 이웃사람들이 듣고 차탄(嗟嘆)③하면서 옛날 유곤(庾袞)④이도 이보다 낫지는 못했다고 했다. 20세에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을 따라 小學과 四書와 가례(家禮)⑤를 배웠는데 조공이 깊이 권장하면서 특이하다고 칭찬했다.
24세에 외간상(外艱喪)⑥을 당하고 29세에 내간상(內艱喪)⑦을 당하여 전상과 후상을 지내면서 슬픔이 예에 지나쳤다. 공이 본시 몸에 파리한 병이 있어 사람들은 반드시 지탱하고 보전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끝내 멸성(滅性)⑧하는데 이르지 아니하니 감탄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공은 이미 부모를 다 여의고 또한 형들의 상고를 이어서 당한 뒤 결성(結城)에서 청양(靑陽)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이곳은 외고(外姑)⑨가 사는 곳으로 외고가 병이 많고 그 뒤를 이을 사람은 공의 생질(姉子)이므로 서로 의지하고자 함이었다. 조카들이 일찍 고아가 된 자가 여럿이 있는데 공이 모두 데리고 와서 기르면서 가르치기를 친자식 같이 했다.
어느 해 추천으로 장릉(長陵) 참봉이 되었다. 처음에 사례(謝禮)⑩하지 아니함이 미안하다고 해서 응명(應命)⑪하고자 했으나 끝내 노병(老病) 때문에 부임하지 못했다.
공이 20세 때부터 지친(至親)⑪의 상고가 없는 해가 없었다. 공이 본래 은혜와 사랑이 돈독(敦篤)해서 능히 스스로 감당할 수 가 없었지만 스스로 늘그막에 슬픔으로 몸을 해하는 것이 효자가 완전한 몸으로 죽은 길이 아니라고 해서 감정을 조절하여 순리에 맡기니 사람들은 그 결정하는 힘에 감복했다.
己卯(1699)년 정월에 우연히 미질(微疾)⑬을 얻어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해 8월에 홍주의 용천면(湧川面) 구음방(求音坊)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했다.
공의 사람됨이 깨끗하고 담박하여 한 점의 진속(塵俗)⑭이 없었다. 젊었을 때 과거장에 들어가서 잡난(雜亂)⑮한 모양을 보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했다. 어릴 때부터 몸을 다스려서 우뚝하게 섰으나 자못 뛰어난 바가 있어 사람을 보고 멀리하려고 아니하지만 그의 잘못이 나를 더럽힐까 두려워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스스로 자기의 기질이 편급(偏急)⑯하다고 해서 다시 너그럽고 느슨함으로 고치고자 『홍대평수(弘大平粹)⑰의 네 글자를 써 벽 위에 걸어두고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리고는 사람을 상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한결같이 온화하고 후중하게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개연(慨然)⑱히 말하기를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포부(抱負)⑲가 가볍지 아니하나 품기가 매우 약해 몸이 중병에 걸렸으니 이미 자기를 위하는 실학에 공을 쓰지 못했고 또 대중을 따라 과거 시험을 보아서 문호를 빛낼 계책을 세우지 못했으니 다만 고요함을 지키고 졸렬함을 보전해서 자세히 옛날 들은 것을 풀어 써서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되면 만족할 뿐이다. 또한 입으로는 성현의 일을 말하지만 행동으로 말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려는가.』
감상할 때 가례(家禮)와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상례비요(喪禮備要)⑳를 연구하여 그대로 시행했고 늙어서는 순수하고 깊게 자신을 함양해서 경전(經傳)과 송나라 선비들의 글을 탐색해서 매우 부지런하였고 나이 많다고 해서 스스로 게으르지 아니했다. 사는 곳에 물과 돌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는데 항상 늦은 봄 화창한 바람이 불때나 늦가을 서늘한 기운이 감돌 때는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혹은 산승(山僧)들과 함께 한가한 세월을 그 사이에서 즐겼으니 아아 공과 같은 사람은 참으로 옛사람들이 말한 은덕군자(隱德君子)(21)라 할 수 있다.
공의 부인은 함평이씨(咸平李氏)로 감찰 준(埈)의 딸이다. 공과 더불어 58년을 해로(偕老)(22)했는데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접하듯 하여 부덕을 어기지 아니했고 집을 부지런하고 검소한 방법으로 다스려서 법도가 있었는데 공보다 3년 앞서 죽으니 향년 73세이다. 공과 같은 곳에 합장했다.
2남6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익동(益東)이요. 둘째 아들은 익래(益來)니 진사이다. 딸은 현감 황렴(黃燫)과 홍량(洪量)과 남궁기(南宮墍)와 정제량(鄭齊良)과 주부 이연회(李延會)와 참봉 이희상(李喜相)에게 각각 출가했다. 그밖에도 빈번하게 낳았지만 두 아들이 모두 뒤이을 자식이 없으니 사람들은 또한 복선(福善)(23)의 진리를 의심하였다.
나(拯)는 공과 한 번의 면식이 없었으나 공의 조카(從子) 익장(益章)이 나를 찾아와 글을 배웠는데 그의 단정한 모습을 보고 선비가의 가정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믿었다. 지난해 홍주(洪州)의 용계(龍溪)로 이사해서 우거(寓居:객지에서 부쳐사는 것)하니 이곳은 공의 집과 가까웠으므로 공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한 번 보고도 오래 사귄 사이 같은 친밀감 때문에 이산(尼山)으로 돌아와서도 공이 나를 멀리서 찾아 왔었다. 그 때 마침 누님의 상고 소식을 듣고 슬퍼서 할 말도 못하고 돌아갔는데 그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문득 유명을 달리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항상 슬퍼지고 한이 된다. 지금 공의 두 아들이 내가 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찾아와서 묘갈명을 청했다. 다만 부끄러워함은 내 늙고 병들어 오래도록 전하는 글을 만족하게 쓰지 못할까 함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다만 산에는 지초(芝草)가 있고
 그리고 골짜기에는 난초가 있다.
 아름다운 석인(碩人)이
 이 곳에서 고반(考槃)하는구나.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지만
 향기로움은 절로 생기는 것,
 그것을 밝혀서 어둠을 지운다.
윤증 지음

주(註)
① 격언(格言):사리에 적당하여 본보기가 될 만한 묘하게 된 짧은 말
② 역질(疫疾):돌림병, 전염병, 천연두, 장티부스, 콜레라 등
③ 차탄(嗟嘆):어여삐 여겨서 탄식함. 슬피 탄식함. 어여삐 여겨서 칭찬함
④ 유곤(庾袞):한나라 때 인물. 돌림병으로 죽은 가족을 매장한 사람
⑤ 가례(家禮):송나라 학자 주희(朱熹)가 쓴 가정의례의 표준서
⑥ 외간상(外艱喪):아버지의 상고
⑦ 내간상(內艱喪):어머니의 상고
⑧ 멸성(滅性):친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음. 성은 생명
⑨ 외고(外姑):아내의 친어머니. 장모
⑩ 사례(謝禮):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준 고마움에 대한 인사. 여기서는 임명에 대한 감사와 수락
⑪ 응명(應命):명에 따름
⑫ 지친(至親):지극히 가깝고 친한 사람. 부모. 형제. 자매
⑬ 미질(微疾):작은 병 또는 미묘한 병
⑭ 진속(塵俗):인간세상이 바람과 먼지같이 미세하다는 뜻으로 진세. 진속은 진세와 속세
⑮ 잡난(雜亂):질서가 없음. 난장판을 차마 볼 수 없음
 (16) 편급(偏急):외지고 급함 또는 삐뚤어지고 조급함
 (17) 홍대평수(弘大平粹):넓고 크고 평화롭고 순수하다는 뜻
 (18) 개연(慨然):뜻을 이루지 못함을 탄식함
 (19) 포부(抱負):안고 생각하고 있는 계획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식
 (20) 상례비요(喪禮備要):상례의 주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해석하여 실천이 용이하도록 한 책
 (21) 은덕군자(隱德君子):덕이 많으나 세상에 드러내지 아니하고 숨어사는 군자.
 (22) 해로(偕老):함께 늙음. 부부가 오래도록 함께 삶.
 (23) 복선(福善):선한 사람이 복을 받는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