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찰방공(휘 당)묘갈명

찰방공 휘 당 묘소
소재지: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요동)

묘 표


十三世祖 省峴察訪靑松沈公 諱 鐺 墓碣銘竝書
府君諱鐺字子警姓沈氏靑松人始祖諱洪孚高麗文林郞衛尉寺丞靑己君生諱淵閤門祗侯脫屣名利退居山淸築臺望京後人碑其址生諱龍典理正郞門下侍中靑華府院君卽昭憲王后之曾祖也生諱元符典理判書麗亡入杜門洞號岳隱享杜門洞書院生諱天潤令同正入本朝固守先訓屢徵不就 太宗以忠孝旌其閭生諱孝尙號石村生諱太山副司果自山淸還靑松月明村生諱遜集賢殿學士 莊光之際棄官歸田慷忱自終號月軒生諱弼倫護軍是爲高祖曾祖諱鶴齡宗簿寺主簿師事蘇齋盧先生諱道谷祖諱淸進士壬亂勳勞 除訓鍊奉事 賜號碧節丁酉殉于島山考諱應濂玉果訓導始居德川妣龍宮金氏士人諱恂鍊女府君生於宣祖丙午二月七日蔭將仕郞忠義衛陞通訓大夫省峴察訪與長公鑊及叔季公釳欽幷敦義讓均分田宅卒於甲子十一月三日壽七十九葬于家後堯洞先塋左麓酉坐原配淑人彦陽金氏士人諱祚胤女祖諱致璋曾祖諱鍊外祖英陽南有紀乙巳三月十九日生辛亥六月七日卒墓同封生二男長世章五男益大詩禮殆謨曰昌大曰最大戊申赴義擧見倡義錄曰處大凶年賑濟曰履大戊申赴義爲左部將人比之馬氏五常一女孫萬亨世明二男運大洙大曾玄以下世漸蕃茂布據閑黨開列門第爲鄕閗族佑燮以十一傳之世摘其典刑基業之今奉守焉苟先府君與淑人積累不食之實簡在天心還報後昆案有富庶綿遠如今日者乎但吾宗自經戊辰火災所藏箱麗盡入灰爐於府蹟尤無所徵甚可憾恨然以古人所謂仁者必有後之意推之府君之德行於此可見矣迺者仍合謀協力以圖顯刻掌其事者相台相光相魯責豫以銘者光澤氏及相恪諸人也 銘曰
我祖植德肇基無壃克篤前緖克啓後昌堯洞之原父子弟兄孝友倫思垂簡死生矧玆懿德復合筵飭靈直所籍永垂庇廕于焉顯刻石章輝燿匪敢闡幽遹追來孝
十一世孫 內部郞 相元 謹撰   
眞城 李棟欽 謹書   
檀紀四千二百八十九年丙申二月 日立

13세조 성현찰방청송심공 휘 당(鐺) 묘갈명병서
부군(府君)의 휘는 당(鐺)이요 자는 자경(子警)이며 성은 심씨이고 청송인이다. 시조의 휘는 홍부(洪孚)이니 고려조에 문림랑(文林郞)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고 청기군(靑己君)에 봉해졌고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청(山淸)으로 물러나 살며 망경대(望京臺)를 쌓으니 후인(後人)이 그 터에 비(碑)를 세웠다. 휘 용(龍)을 낳으니 전리정랑(典理正郞)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封해졌으니 즉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증조이다.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고 호는 악은(岳隱)이며 두문동 서원에 배향되었다.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영동정(令同正)이요 조선조에 들어와서 선훈(先訓)을 고수(固守)하여 나라에서 여러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니 태종이 충효정려(忠孝旌閭)를 내렸고 휘 효상(孝尙)을 낳으니 호가 석촌(石村)이요 휘 태산(太山)을 낳으니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산청(山淸)에서 청송 월명촌(月明村)으로 돌아와 살았고 휘 손(遜)을 낳으니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서 단종(端宗) 세조(世祖) 연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개탄(慨歎)하다가 생을 마쳤고 호는 월헌(月軒)이다. 휘 필륜(弼倫)을 낳으니 벼슬이 호군(護軍)이요 이 분이 고조(高祖)이다. 증조의 휘는 학령(鶴齡)이니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였고 노소재(盧蘇齋)선생을 사사(師事)하였고 호가 도곡(道谷)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청(淸)이니 진사요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임금이 벽절(碧節)이라 호를 내렸고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도산성(島山城)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응렴(應濂)이니 옥과훈도(玉果訓導)였고 처음으로 덕천(德川)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용궁김씨(龍宮金氏) 사인(士人) 휘 순련(恂鍊)의 따님으로 공을 선조(宣祖) 병오 2월7일 낳았다. 음직(蔭職)으로 장사랑(將仕郞) 충의위(忠義衛)였고 통훈대부 성현찰방(省峴察訪)에 승진되었다. 큰 형 확(鑊)과 아우 흘(釳), 흠(欽)과 더불어 우애가 두터워 전답(田畓)을 고루 분재(分財)하였고 甲子 11월3일 돌아가셨으니 수가 79요 집뒤 요동(堯洞) 선영 좌록(左麓) 유좌원(酉坐原)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언양김씨(彦陽金氏)니 아버지는 士人 조윤(祚胤)이요 할아버지는 휘 치장(致璋)이며 증조는 휘 연(鍊)이고 외조는 영양남유기(英陽南有紀)이다. 乙巳 3월19일 낳아서 辛亥 6월7일 졸하니 묘는 동봉(同封)이요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세장(世章)이요 이 분이 五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익대(益大)로 시례(詩禮)로 유명하였고 다음은 창대(昌大)요 다음은 최대(最大)이니 戊申년에 의거(義擧)하여 창의록(倡義錄)에 실렸고 다음은 처대(處大)이니 흉년에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였고 다음은 이대(履大)이니 戊申년에 창의(倡義)하여 좌부장(左部將)이 되니 중국 촉(蜀)나라의 마씨(馬氏) 5형제와 비교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위는 손만형(孫萬亨)이요 2남 세명(世明)이 2남을 두었으니 운대(運大)와 수대(洙大)요 증손 현손 이하에서도 훌륭한 자손이 많아 다른 문중보다 뛰어났다. 우섭(佑燮)이 11世 동안의 옛부터 내려온 법과 기초가 되는 사업을 따내어 지금 간직하고 있다. 진실로 부군(府君)과 숙인(淑人)의 숨은 덕의 힘이 아니면 하늘이 어찌 도와 줄 것이며 자손이 어떻게 부유하게 오늘날까지 이어 나왔으리오 다만 우리 일가는 무진년에 화재(火災)를 겪음으로부터 상자속에 들어있던 글이 잿더미속에 들어가 증거될만한 것이 다 없어졌으니 매우 유감된 일이나 옛날 사람이 말한바 어진 사람에게는 뒤 끝이 있다는 뜻으로써 미루어보면 부군의 덕을 여기에서 볼 수 있도다. 요즈음 도모하여 힘을 합하고 비석을 세우려함에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상태(相台), 상광(相光), 상로(相魯)요 나에게 비문을 부탁한 사람은 광택(光澤)씨와 상각(相恪)들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할아버지가 덕을 심고 기초를 영원히 확립하였네.
 조상의 업을 이어받아 후손이 번창 하였네.
 요동(堯洞)의 언덕은 부자형제(父子兄弟)의 무덤이요.
 효우(孝友)는 인륜도덕(仁倫道德)의 원리요.
 좋은 가르침을 일생동안 전하였는데 하물며,
 이 아름다운 덕이 임금의 훈계(訓戒)에 부합함이리오.
 빼어나게 쌓은바를 길이 전하였네.
 여기에 비석을 세우니 비문이 빛나고 빛나네.
 감히 숨은 것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는 뒤좇아 그 효도를 사모하라는 것이로다.
11세손 내부랑 상원이 삼가 짓고
진성(眞城) 이동흠(李東欽)이 삼가 씀
단기 4289년 병신 2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