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도위공(휘 익현)묘지명

청평도위공 휘 익현 묘소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묘 표 석


청평위(靑平尉) 심공이 세상을 떠났을 적에. 나는 임무를 받아 江都에 있었으므로 빈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열흘도 넘어서 일 때문에 서울을 지나다가 서둘러 청평위 沈公 댁에 가서 곡(哭)을 하고 물러 나와 여러 상제들을 만나보니. 상제들이 하염없이 곡을 하다가 지팡이를 놓고는 나에게 청할 것이 있는 듯하였으나 슬픔 때문에 능히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公의 아우 익창(益昌)이 나에게 여러 상제들의 뜻을 말해주고는 울면서 또 말하기를 『우리 형이 불행하여 이렇게 되었는데 장차 아무 날 장사지내려고 합니다. 우리 형과 교유(交遊)한 이들 중에 당신이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까웠으니 이제 장사지낼 적에 당신이 묘지명을 쓰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굳이 나에게 청하였다. 公이 교유하며 호협스럽게 놀던 이가 마땅히 많을 것이나 나를 특별히 후대한 것은 돌아보건대 그 의취(意趣)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公의 알아줌에 보답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제 변변치 못한 말로 공의 아름다운 德을 서술하기를 비록 감히 맡겠다고 나설 수는 없으나 또 어찌 차마 사양하리오.
公의 휘는 익현(益顯)이고 자는 가회(可晦)이며 호는 죽오(竹塢)이다. 靑松沈氏는 고려 위위승 홍부(洪孚)로부터 비롯하니 3世를 지나 本朝에 들어와서는 청성백 덕부(靑城伯 德符)와 府尹 징(澄)과 判官 석준(石雋)과 觀察使 선(璿)과 節度使 안인(安仁)과 贈 吏曹判書 빈(濱)과 左參贊 광언(光彦)이 있어서 그 집안을 이어 내려왔다. 公의 고조 감찰 휘 금(錦)은 나중에 吏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증조 肅川부사 휘 종침(宗忱)은 나중에 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四山監役 휘 설(偰)은 나중에 領議政에 증직되었다. 부친 영의정 휘 지원(之源)은 훌륭한 덕망으로 孝宗大王을 도왔으며 海平尹씨에게 장가들었는데 해평윤씨는 부원군 근수(根壽)의 증손이요 府使 종지(宗之)의 딸이다.
숭정 辛巳年(1641년:仁祖19년)8月 19日 壬戌에 公을 낳았으니 公이 처음 태어났을 적에 신이로운 징조가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준수(俊秀)하고 총명하여 암송을 잘하였으니 여섯 살 때 처음 〈歸去來辭〉를 배우고 나서 저녁 구름과 잘 새들을 보고는 이것들을 가리키며 〈귀거래사〉에 나오는 「출수(出峀)」와 「권비(倦飛)」라는 말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때때로 하는 말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父親 議政公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庚寅年〔1650년:孝宗1년〕에 公의 나이가 열 살이었는데 이때 孝宗大王께서 여러 尉들을 간택하시었다. 公이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가 뵈올 적에 公의 풍채가 뛰어나고 應對가 어그러짐이 없었으므로 상감께서 감탄하며 우대하시었다. 상감의 둘째 딸 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品階가 明德大夫에 올랐으며 靑平尉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궁궐에 드나들며 언제나 총애를 받았으니 여러번 오위도총관을 겸직하였고 만년에 또 내섬시에 제배(除拜)되었다. 辛丑年〔1661년:顯宗2년〕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었으므로 光德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그 뒤 여러번 승진하여 유록대부(綏錄大夫)에 이르렀다.
公이 식견과 사려가 주도면밀하고 일 처리가 민첩하였으므로 나라에 大喪이 있게 되면 언제나 상감께서는 문득 公에게 명하시어 궁궐에서 일을 주관하게 하시었다. 효종대왕께서 승하하셨을 적에 公의 나이 겨우 약관(弱冠)이었으나 公이 궁궐에 들어가 초상의 일을 주관하자 순식간에 일이 모두 정돈되어 갖추어졌으므로 정상국(鄭相國) 太和가 몹시 칭찬하였다.
세번씩이나 使臣이 되어 연경에 들어갔으니 丙午年(1666년:顯宗七년)에는 謝恩하러 갔고 甲寅年(1674년:顯宗15년 肅宗卽位년)에는 주청(奏請)하러 갔으며 庚申年(1680년:肅宗6년)에 또 갔다. 사신으로 길을 떠나려 할 때면 언제나 상감께서 내전으로 불러 들이시어 시를 지어주시고 혹은 원자에게 명하시어 술을 권하게 하시었으며 돌아올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어 중도에서 영접하여 위로하게 하시었으니 은혜롭게 예우하심이 다른 종척(宗戚)이나 여러 尉들에게 와는 달랐다. 주청을 하러 연경에 갔을 적에 주청에 잘못이 있어서 장차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公이 매우 힘써 변호하고 기미를 보아 미봉하였으므로 일을 잘 끝낼 수 있었다. 상감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자제 가운데 한사람에게 벼슬을 주라 명하시었고 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시었다. 庚申年의 경우에는 또 더욱 난처한 일이 있었다. 그때 화심(禍心)을 품은 빈신(儐臣)이 역관의 말이라고 핑계대면서 「신하가 강성하다」는 말을 지어내서는 將相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하여 해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하여 사신으로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情狀을 조사해 오도록 하였는데 公이 아니면 아니된다 하여 전에 명을 받은 이를 취소하고 公이 가도록 명하였다. 公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라의 큰 일이니 그 사이에 한 터럭 사사로운 뜻도 개입시켜서는 아니된다.」 하고 연경에 이르러서는 「신하가 강성하다」는 말에 관계된 그 역관을 불러다 놓고 마주 대하여 그 말의 허실을 캐묻고 돌아와 한결같이 공정하게 보고하니 당시 사람들의 議論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연경에 사신 갔을 적에 거기서 하사받은 금백(金帛)은 모두 從者들에게 나누어주고 한가지 물건도 차지하지 아니하였다. 癸亥年(1683년:肅宗9년) 6월에 여러날 가벼운 병을 앓더니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公이 일찍이 五行書를 보고 그 술수(術數)를 잘 풀이하였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계해년에 죽을 것이다.』 하였었다. 병이 그리 심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이미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줄을 알고 태연하게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면서 낯빛이나 말씨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상감께서 의원을 보내시니 公이 그 의원더러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병이 났을적에 先王께서 너에게 명하여 오게 하시더니 이제 네가 또 상감의 명으로 왔구나. 전후로 특별하신 대우가 한결같았으나 나는 보답할 길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한이로다.』 하였다.
아우 益昌에게 구술하여 유언을 쓰게 하여 여러 자제들을 훈계하고 신칙(申飭)한 다음 7월 6일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가 마흔 셋이었다. 상감께서 몹시 슬퍼하시어 朝會를 철폐하시었고 재궁(梓宮)과 부재(副材)와 부의(賻儀)를 넉넉히 하사하시었으며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케 하시었고 관원에게 명하여 禮葬케 하시었으니 9월 27일에 고양 石川谷 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公은 정세(精細)하고 민첩하며 온화하고 순수하여 자품(資稟)이 이미 아름다웠는데 게다가 詩文으로 스스로 신칙하여 글 읽고 글씨 쓰기를 힘써 배우는 정성이 마치 유학(儒學)을 닦는 선비와 같았다. 이미 큰 집에 살면서 부귀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집에 들어갈 적에는 언제나 겸손한 낯빛을 하였으며 집안에 거처할 때에는 內行을 조심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니 生前의 奉養과 死後의 葬禮 및 제사에 반드시 마음과 예법을 다하였고 大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외조모 섬기기를 대부인 섬기듯 하여 시종일관 게을리 아니하였다. 선조가 물려준 재산을 나눌 적에는 모두 형제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많이 가지지 아니하였다. 치묘전(置墓田)과 노비(奴婢)를 모두 손수 마련하여 죽은 뒤의 대책을 세웠는데 운명(殞命)할 적에는 오히려 묘비 세우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다. 숙모가 곤궁하게 살며 아들이 없었으므로 언제나 철따라 옷을 해드렸으며 병이 나거나 喪事가 났을 적에 의원과 약물과 관곽(棺槨)과 염습을 모두 公이 대었다. 형제들을 대접할 적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사이가 없게 하였고 궁핍한 이들은 구휼해 주었으며 한가지 맛있는 것을 얻어도 반드시 나누어 먹었고 하사받은 노비도 또한 다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하사를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宗族 가운데 빈궁한 이들과 보통 사람들 가운데 덕이 있는 이들을 대접할 적에도 또한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을 두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네들은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孝宗大王께서 여러 사위들 대접하시기를 집안 사람들에게처럼 하시었는데 公을 가장 사랑하시어 금원(禁苑)에 놀러 거동하실 적에는 문득 公에게 따라올 것을 명하시고 자주 어제(御製)를 하사하시면서 公으로 하여금 和答하게 하시고는 상을 내리심이 매우 후하시었다. 顯宗大王 때에도 대우하심이 바뀌지 아니하여 연침(燕寢)에 불러들이시어서는 은근하게 술을 하사하시었고 仁宣王后께서 사랑을 쏟으심도 더욱 지극하였다.
그럴수록 公은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서 동복(童僕)들이 마을에서 함부로 굴지 못하게 신칙하였으며 자제들이 다른 사람들의 長短을 말하지 못하게 경계하였으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이 때문에 더욱 公을 어질게 여기었으며 市井의 미천한 백성들도 역시 公을 일컬어 賢公子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公이 본디 문사(文詞)를 좋아하고 시를 지으면 맑고 아름다우며 운치가 있어서 기꺼이 사람들이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며 술마시고 읊은 시에 화답하였지만 함부로 하지 아니하였으며 筆法이 몹시 훌륭하였으므로 산능지(山陵誌)와 옥책(玉冊)과 敎命등의 글을 여러번 써서 그때마다 문득 구마(廐馬)를 하사받았다.
公과 同時의 여러 尉들은 다 이름난 집안의 자제로서 명예가 있었지만 십여년 사이에 그들과 公主가 모두 영락(零落)하여 온전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公만이 안팎으로 탈이 없이 삼가고 온유하며 즐거움을 잃지 아니하니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며 칭찬하고 또 이르기를 『公이 이럴 수 있음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내가 여러번 빈객(賓客)의 뒤를 좇아 한가히 쉬고 있는 公을 접견한 적이 있었는데 공은 아회(雅懷)가 고요하고 풍류가 넉넉하여 평상시에 도서를 가까이 하고 때때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릴 뿐 조금도 부귀영화의 기운이 있지 아니하였으니 가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아아 공의 훌륭한 재주와 기국(器局)과 학문으로도 능히 세상에 나아가 시절의 쓰임이 되지 못하였고 當世에 드러내어 나타낼 바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의 제도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은 것이거니와 건강하고 병이 없었는데도 일찍 세상을 떠나서 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인고. 이것이 공을 아는 이들이 몹시 슬퍼하고 거듭 탄식하는 까닭이로다.
公은 아들이 둘이 있다. 맏아들은 정보(廷輔)이니 처음에 전 참판 정유악(鄭維岳)의 딸을 맞아들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나중에 판돈녕부사 李正英의 딸을 맞아들이었다. 둘째아들은 정협(廷協)이니 진사 趙相鼎의 딸을 맞아들이었다.
銘에 이르기를 沈氏는 큰 집안이니 靑松에서 현저(顯著)타가 아득한 세월 뒤에 相公을 내었도다. 우리 孝宗 보필하여 아름다운 공적 이지러짐 없었는데 公이 뒤를 이어 태어났으니 복을 내려주심은 더디지 아니하였도다. 이미 귀해지고 또 임금과 가까웠으나 유교의 바른 도리 스스로 간직하고 公卿의 재질 나라의 큰 그릇을 금하여 당시에 베풀지 못하였도다. 그 얼굴 온화하고 그 문장 아름다우며 여성(礪城)에 비견되고 前聞에 부합되도다. 어찌 德은 그리도 빛났으며 어찌 壽命은 길지 못했는고. 나의 명이 어그러짐 없으니 오래도록 보이어 잊혀짐 없으리라.
정헌대부 행강화부유수 겸 진무사 원임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이민서가 짓다.
황명 숭정 기원 戊辰 五六年 癸亥年(1683년:肅宗9년) 8月   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