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군수공(휘 인보)행장

여산군수공 휘 인보 묘소
소재지: 충주시 소태면 복탄리(무곡)

묘 비 석


十二世祖 通訓大夫 行 全州鎭管兵馬同節制使 礪山郡守公 諱 仁補 行狀
公諱仁補字益甫靑松人始祖麗朝文林郞諱洪孚寔生閤門祗侯諱淵寔生吏曹正郞諱龍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寔生左議政靑城伯諱德符寔生領議政靑川府院君諱溫寔生領議政靑松府院君諱澮寔生兵曹參議諱潾寔生贈左贊成行高城郡守諱順路寔生成均進士諱幹卽公曾王考也王考 諱宗元堤川縣監考諱荀豊德郡守贈司憲府執義娶贊成企齋先生申光漢女嘉靖乙卯明宗十年一五五五年正月七日生公之兄弟五人皆醇槿恭遜公弟天品尤美和順之氣彬外人愛之稍長力學中己丑司馬庚子拔昌樂察訪乙卯除金吾郞庚戌陞司果癸丑爲高敞縣監甲寅主太僕簿乙卯移殿中轉 漢城判官丁巳佐刑曹遷工曹正郞戊午拜繕工僉正秋出子礪山淸靜無爲鞭朴不用誠心愛民悃愊無華辛酉春罷歸忠州田舍構屋數間將老焉爲造物所忌得風疾翌年七月晦日卒享年六十九是年九月葬于忠州武洞甲坐之原與內子同穴當壬申歲先大夫早棄郡兒公尙五號哭不止弔者不忍見壬辰之亂棄家累奉慈夫人入定州色養備至及仲氏宰禮山公又隨之慈夫人病劇公割脂進血居憂哀禮俱至事親之誠老而彌篤祭之目親自親具閏月遇忌亦必哭泣與兄弟友待子侄爲思宗族之自鄕來自具酒食以盡其歡公孝悌人也爲文尙古不事擧子業工於書晝鳴于一世殷門之額碑版之書多出其手又有政事才而晩出仕路未蘊見擠權黨官不達惜矣夫人坡平尹氏坡城君贊之後司直希元之女 光州金夢奭之外孫生於 嘉靖癸丑卒於 萬曆壬寅六月十八日與合德婦道備盡治家有法一門稱其賢有三男一女長綽進士次進士次 生員女適縣監宋時保側室有四子一女男曰紇進士曰紐進士曰綬曰緖武郡守女爲許相積无后綽娶全義李氏士人永男之女生三男四女男長挺豪進文官司藝次挺賢進士次挺雄女長適都事鄭時諶次通德洪宇宏次處士趙世馨次適通德韓命慶紞生三男二女男長挺信次挺善次挺義女長適察訪洪克次適進士韓靖相 生二男四女男長挺彬次挺松女長適縣監趙公澈次適李善白次適洪允次適縣令趙見素紇有子曰挺萬綬子曰挺漢有女適黃立準紐有子曰挺海緖之女適萬戶南重澤宋時保生五子一女男孺孝次孺悌縣令次孺忠次孺敬次孺直女適察訪姜聖基內外孫贈玄無麗百數官冕繼繼姑不盡書以俟刻石之銘刻銘曰仁慈孝友寬和廉淸風德懿行君子儀形赫門闌振振弟兄寔繁以昌光溢東埛
妹壻 扈聖功臣輔國崇祿大夫廷原府院君
李光庭 撰
傍後孫 厚澤 謹書

12세조 통훈대부 행 전주진관병마동절제사 여산군수공 휘 인보 행장
公의 諱는 인보(仁補)요 字는 익보(益甫)이며 靑松沈氏이다. 始祖는 고려문림랑위위시승(高麗文林郞衛尉寺丞)이고 휘는 홍부(洪孚)이신바 이 분이 합문지후(閤門祗侯) 휘 연(淵)을 낳으시고 이 분이 이조정랑(吏曹正郞) 휘 용(龍) 추봉(追封) 문하시중청화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을 낳으시고 이 분이 좌의정(左議政) 청성백(靑城伯) 휘 덕부(德符)를 낳으시고 이 분이 영의정청천부원군(領議政靑川府院君) 휘 온(溫)을 낳으시고 이 분이 영의정청송부원군(領議政靑松府院君) 휘 회(澮)를 낳으시고 이 분이 병조참의(兵曹參議) 휘 린(潾)을 낳으시고 이 분이 증좌찬성 行 고성(高城)郡守 휘 순로(順路)를 낳으시고 이 분이 成均進士 휘 간(幹)을 낳으시니 즉 公의 曾祖가 되신다. 祖考 휘는 종원(宗元)이니 제천현감이고 아버지의 휘는 순(荀)이니 豊德郡守 증사헌부집의(贈司憲府執義)이시다. 執義께서 贊成(企齋선생:신광한(申光漢)의 따님과 결혼하시어 가정 을묘(明宗10年 1555)年 正月7日에 公을 낳으셨다. 공은 형제가 다섯인데 모두 공손하였다. 公은 五兄弟中 셋째로서 天品이 아름답고 和氣가 있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장성하여 착실히 공부하더니 乙丑(1765)年 公의 나이 35歲에 司馬試(進士生員試)에 합격하고 경자년(公年 46)에 창락찰방(昌樂察訪)에 任命이 되고 乙卯年에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며 庚戌年(1610)에 사과(司果)로 승진되며 癸丑年(1613)에 고창현감(高敞縣監)으로 나가고 그 해에 衛聖原從功臣一等 翼社原從一等功臣이 되고 甲寅年(1614) (公年50)에 태복주부(太僕主簿)가 되고 乙卯年(1615)에 殿中에 옮겨 漢城判官으로 전근되며 丁巳年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며 戊午年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으로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與山郡守로 나갔는데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고 사치를 피하고 성심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辛酉年 봄에 퇴직하고 忠州에 돌아가 가옥수간을 짓고 여생을 보내려했는데 이때 風病이 생겨 이듬해(1622年) 7月 그믐날에 별세하니 향년이 69歲이다. 이해 9月에 忠州武洞(현 소태면 복탄리) 艮坐의 언덕에 葬禮하니 부인과 합폄(合窆)이다. 지난 壬申年에 공의 아버지(諱 荀)께서 일찍 世上을 떠나시고 여러 아들을 남기셨을 때 公은 어린 나이였으나 哭소리를 그치지 않으니 弔客이 참아 보지를 못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자기 집을 떠나 모친을 모시고 정주(定州)에 가서 생활하였는데 얼굴빛도 순하고 봉양도 잘했다. 仲氏(仁禔)께서 禮山현감으로 부임할 때는 兄을 수행했다. 모친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드렸으며 초상 때에는 애례(哀禮)를 다하였다, 늙을수록 효성이 높아 제사 날에 친히 제물을 살피고 亡日에는 반드시 哭泣을 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子侄을 恩義로 대하고 시골에서 온 宗族에게는 主食을 대접하였으니 公은 참 孝悌하는 사람이다. 文學을 하되 古文을 즐기고 과거공부는 안 하며 글씨와 그림에 유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殿門의 看板과 비석의 글씨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또 정사에 재조(才操)가 있어 晩年에 벼슬길에 나갔으나 크게 승진을 못하고 權黨의 오역(忤逆)을 당하여 官運이 펴지를 못하였으니 哀惜하도다. 부인은 坡平尹氏 坡城君贊의 후손이고 司直希元의 따님이며 光州 金夢奭의 외손녀이다. 嘉靖癸丑(1553)年에 출생하고 萬曆壬寅(1602)年에 下世하니 향년이 50歲이다. 부인은 공과 結婚後 婦道를 겸비하고 집 살림을 잘하여 門中이 賢婦라 칭찬했다. 3男1女를 둔바 장남 작(綽)은 進士이고 차남 담(紞)도 進士이며 삼남 율()은 生員이며 따님은 현감 송시보(宋時保)에 출가했다. 후취부인은 4子1女를 두었는데 장남은 흘(紇)이고 차자는 뉴(紐)로 進士이고 셋째는 수(綬)고 넷째는 서(緖)로 武郡守이며 딸은 許相積에 출가하였으며 无后이다. 작(綽)은 全義李氏 士人 永男의 따님을 취하여 3男4女를 두니 장남 정호(挺豪)는 문관사예(文官司藝)이고 차남 정현(挺賢)은 진사이고 셋째는 정웅(挺雄)이며 큰딸은 도사 정시심(鄭時諶)에 둘째딸은 통덕랑 홍우굉(洪宇宏)에 셋째딸은 處士 조세형(趙世馨)에 넷째딸은 통덕랑 한명경(韓命慶)에 각각 출가했다. 담(紞)은 3男2女를 두니 장남 정신(挺信) 차남 정선(挺善) 삼남 정의(挺義)이며 큰딸은 찰방 홍극(洪克)에 둘째딸은 진사 한정상(韓靖相)에 출가했다. 율()은 2男4女를 두니 장남 정빈(挺彬) 차남 정송(挺松)이며 큰딸은 현감 조공철(趙公澈)에 둘째딸은 이선백(李善伯)에 셋째딸은 홍윤(洪允)에 넷째딸은 현령 조견소(趙見素)에 출가했다. 屹의 아들은 정만(挺萬)이고 수(綬)의 아들은 挺漢이고 딸은 한평준(韓平準)에 출가했다. 紐의 子는 정해(挺海)이며 서(緖)의 딸은 萬戶 남중택(南重澤)에 출가했다. 宋時保는 5子1女를 두니 큰아들은 孺孝이고 둘째 유제(孺悌)는 현령이고 셋째는 유충(孺忠)이고 넷째는 유경(孺敬)이고 다섯째는 유직(孺直)이며 딸은 察訪 강성기(姜聖基)에 출가했다. 內外孫과 曾玄孫을 합하면 百餘名이 되고 官員도 많이 나와서 모두 記錄할 수 없기에 이만 그치는 바이다.
역자 전 서기관 풍덕공파 종회장 沈載榮
西紀2000年 청송심씨대동세보편찬시 규장각에 비치된 원종공신록권이 발견되어 조상의 공훈을 기리고자 원종공신 사적을 추가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