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수공(휘 혁)묘표

정선군수공 휘 혁 묘소
소재지: 광주군 실촌면 수양리(석문리)

묘 표 석


十三世祖 旌善郡守公 諱 墓表
公諱字君碩靑城伯德符之後曾祖諱光門郡守祖諱鎬贈大司憲號逸齋考諱宗敏贈判書號晴灣晴綾城具氏奉常正忏女公生于萬曆癸酉正月晦日辛丑始仕繕工監役濟用叅奉陞東部主簿歷監察知山陰縣丙辰戊午連丁內外艱服闕又以監察宰鎭川縣還拜監察轉敦寧判官宗親典簿軍資判官守旌善郡守癸酉至月二十七日卒于家配淸州鄭氏西川府院君崐壽女後公三年十月二十二日生先公二年十月十一日卒並葬廣州石門里艮坐原從先兆也生男之澤之湜之簿之淹府使之澳佐郞女適牧使洪柱一之澤娶郡守嚴悅女生男 櫟縣令益善府使出繼女尹鐺之湜娶生員姜渭興女生男楷根楦之簿娶同知李聖賢女生男榕女李漢岳尹遇白尹衡甲韓聖箕參奉之淹娶縣監權諒女生男榎主簿楫格檣女適尹墰李縉長奉事李翊判書之澳娶贈參議兪信曾女生男女許鎬洪生男萬始始始曾玄累百人嗚呼我先考縣令公蚤孤無家來遂使公之制行以孝友睦宗族公以恪謹廉潔見重於當世者泯而不章痛哉先考當略擧公世系履歷子□□□平撰誌燔安未及竪表今小子遵先志敢依誌文梗槩刻之后陰如右

崇禎紀元後七十七年甲申 月 日
曾孫 廷熙 謹書


13세조 정선군수공 휘 혁() 묘표
公의 휘(諱)는 혁()이요 자(字)는 군석(君碩)이며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이다. 증조의 휘는 광문(光門)이니 군수요 할아버지의 휘는 호(鎬)니 대사헌에 증직되었고 호는 일재(逸齋)이다. 아버지의 휘는 종민(宗敏)이니 판서에 증직되었고 호는 청만(晴灣)이다.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 봉상시정(奉常寺正) 인(忏)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癸酉(1573)년 정월 그믐날 낳아 辛丑(1601)年에 비로소 벼슬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과 제용감(濟用監) 참봉을 지냈고 동부주부(東部主簿)에 승진되었으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歷任)하고 산음(山陰)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병신(1616)년으로부터 무오(1618)년 까지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가 복을 벗고나서 또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진천(鎭川)현감을 지내고 돌아와서 다시 사헌부 감찰을 거쳐 돈녕부(敦寧府) 판관과 종친부(宗親府) 전부(典簿)와 군자감(軍資監) 판관을 역임하고 정선(旌善)군수로 나갔다가 계유(1633)년 동짓달 27일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부인은 청주정씨(淸州鄭氏)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곤수(崐壽)의 따님으로 공보다 3年 뒤에 낳으셨고 2년 먼저 10월11일 돌아가셔 광주(廣州) 석문리(石門里) 간좌(艮坐)에 합장하였으니 선영(先塋)을 따를 것이다. 아들은 지택(之澤) 지식(之湜) 지부(之簿)요 지엄(之淹)은 부사(府使)요 지오(之澳)는 좌랑(左郞)이며 딸은 목사(牧使) 홍주일(洪柱一)에게 출가하였다. 지택이 군수 엄열(嚴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력(櫟)을 낳았으니 현령(縣令)이요 익선(益善)은 부사(府使)로서 출계(出系)하였고 딸은 윤당(尹쩬)에게 출가하였다. 지식(之湜)이 생원 강위홍(姜渭興)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해(楷) 철() 근(根) 훤(楦)을 낳았다. 지부(之簿)가 동지중추부사 이성현(李星賢)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용(榕)을 낳았고 딸은 이한악(李漢岳) 윤우백(尹遇白) 윤형갑(尹衡甲) 참봉 한성기(韓聖基)에게 출가하였다. 지엄(之淹)이 현감 권량(權諒)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주부 가(榎) 집(楫) 격(格) 장(檣) 계() 연()을 낳았고 딸은 윤담(尹墰) 봉사(奉事) 이진장(李縉長) 판서 이익(李翊)에게 출가하였다. 지오(之澳)가 참의에 증직된 유신(兪信)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아들은 량()이요 딸은 허호(許鎬)에게 出嫁했고 洪의 아들은 만시(萬始) 시총(始摠)이다. 증손 현손에 수(數)가 여러 백명이다. 아아 우리 아버지 현령공께서 효도와 우애로써 일가들과 화목하였고 정성스럽고 삼가고 청백(淸白)하여 당세에 소중히 여겨졌으나 그러한 사적이 없어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슬프도다. 아버지께서 닦으신 세계(世系) 이력(履歷)이 병화(兵火)에 없어져 표석(表石)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지금 소자(小子)가 아버지의 뜻을 좇아 감히 지문(誌文)에 의하여 대략 비석의 뒤에 위와 같이 새기노라.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77년 갑신 1644년  월   일
증손 정희는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