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과훈도공(휘 응렴)묘갈명

훈도공 휘 응렴 묘소
소재지: 청송읍 덕천리(부서 요동)

묘 표 석


十二世祖 將士郞 玉果訓導 靑松沈公 諱 應濂 墓碣銘竝書
公諱應濂字仲述姓沈氏麗季時有諱洪孚官文林郞衛尉寺丞靑己君是初祖生諱淵閤門祗侯退休于山淸石畓村有望京臺生諱龍典理正郞追封靑華府院君生諱元符典理判書麗亡罔僕入杜門洞號岳隱享杜門洞書院生諱天潤令同正朝鮮初歸山淸舊庄守先戒不就徵 太宗嘉其忠孝 特命旌生諱孝尙號石村生諱太山副司果還奠于靑松月明村生諱遜集賢學士 光廟攝政棄官歸號月軒士林擬尸祝於遺址而未果生諱弼倫壽護軍生諱鶴齡宗簿寺主簿號道谷師事盧蘇齋先生生諱淸進士壬辰倡義除訓鍊奉事 賜亭號碧簿丁酉島山之役亡後還葬配礪山宋氏禦侮億齡女郞公考妣也生公以宣祖壬午三月九日卒以 孝宗壬辰十二月十七日壽七十一蔭補玉果訓導與伯兄應洛始居德川不但廳堂恬翕日復愈深諒以下子孫計也葬家後堯洞元嶝酉坐之原配龍宮金氏士人恂鍊女生甲申五月一日卒甲午十月十六日葬府南五里草幕谷先塋同麓擧四男長鑊僉樞鐺察訪釳察訪欽忠義衛鑊男世文通政世勳出女蔣元栻金明胤金泰錫鐺男世章忠義衛世明釳嗣男世勳通政欽男世蕃女李培孫亨直曾玄以下不盡錄於乎公承忠孝義烈之世涵漬而修省者固當爲何而遺篋蕩然而無可據其實而證其蹟惟先公行錄有曰長子應洛同我赴國難次子應濂謹守田廬善事吾老母公堯體先志扶養焉進退爲一誠不怠而人或有稱善則義不自居其嗣守之篤積累之而罕儷而嗣後承克蕃文學德行籍完鄕邦豈非公積蔭之攸發哉懿歟休矣公之墓有碣而無銘方議竪而十一世孫相恪君以門父兄命責余所以銘公者以余萎毫何能不朽公於無窮也謹撰其大盖以銘曰
承家緖以靄徽恩志則安矣臨國訌而遵親命孝亦至矣欽謙之德裕乎肇業之基歸眠公家後嗣式堯洞之岡有寧其富我銘焯然來者益詳

檀紀四千二百八十二年己丑重陽節下翰
聞韶 金衡七 謹撰
星山 李昌基 謹書


12세조 장사랑 옥과훈도 청송심공 휘 응렴(應濂) 묘갈명병서
공의 휘는 응렴(應濂)이요 자는 중술(仲述)이며 성은 심씨이다. 고려말에 홍부(洪孚)는 벼슬이 문림랑 위위시승 청기군이 있었으니 이 분이 시조요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산청석답촌(山淸石畓村)에 물러나 살며 망경대(望京臺)가 있었고 휘 용(龍)을 낳으니 전리정랑(典理正郞)이었고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려가 망하자 이조(李朝)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 갔으니 호가 악은(岳隱)이요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고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영동정(令同正)으로서 조선조 초기에 산청의 옛집으로 돌아와 살며 선조(先祖)의 유계(遺戒)를 지키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니 태종대왕이 그 충효(忠孝)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휘 효상(孝尙)을 낳으니 호가 석촌(石村)이요 휘 태산(太山)을 낳으니 부사과(副司果)로서 청송 월명촌(月明村)으로 돌아와 살았고 휘 손(遜)을 낳으니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서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고 호가 월헌(月軒)이며 사림(士林)에서 유허(遺墟)에 사당을 지으려다가 못하였고 휘 필륜(弼倫)을 낳으니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이었으며 휘 학령(鶴齡)을 낳으니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요 호가 도곡(道谷)이며 노소재(盧蘇齋)선생에게 사사(師事)하였다. 휘 청(靑)을 낳으니 진사(進士)로서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서 임금이 벽절(碧節)이라 호를 내렸고 정유년 도산성(島山城)의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여 환장(還葬)하였고 배위는 여산송씨 어모장군 억령(億齡)의 따님으로 즉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공은 선조임오 3월9일에 낳아 효종임진 12월17일에 졸하니 수(壽)가 71이요.
음보(蔭補)로 옥과훈도(玉果訓導)를 지냈고 큰형 응락(應洛)과 더불어 처음으로 덕천(德川)에 살았으니 다만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편히 살려고 한 것만 아니고 자손에게 영원한 터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집뒤 요동(堯洞) 원등(元嶝) 유좌원(酉坐原)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용궁김씨(龍宮金氏) 사인(士人) 순련(恂鍊)의 따님으로 갑신 5월1일에 낳아 갑오 10월16일 졸하니 부남오리 초막곡(府南五里草幕谷) 선영동록(先塋同麓)에 장사지냈다.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확(鑊)이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였고 2남 당(鐺)은 찰방(察訪)이요 3남 흘(釳)은 찰방이며 3남 흠(欽)은 충의위(忠義衛)이다. 鑊의 아들은 세문(世文)이니 통정(通政)이요 세훈(世勳)은 숙부(叔父) 흘에게 출계(出系)하였고 사위는 장원식(蔣元栻) 김명윤(金明胤) 김태석(金泰錫)이다. 당의 아들은 충의위 세장(世章)과 세명(世明)이요 흘의 아들은 세훈이니 통정이요 흠의 아들은 세번(世蕃)이요 사위는 이배(李培)와 손형직(孫亨直)이며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이 충효의열(忠孝義烈)의 세가(世家)를 이어 아름다운 행실이 있을 것인데 상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그 사실을 증거할 만한 것이 없고 오직 선공(先公)의 행록(行錄)에 말하기를 장자(長子) 응락(應洛)이 나와 함께 국난(國難)에 나갔고 차자(次子) 응렴(應濂)이 집을 지킬 우리 노모(老母)를 잘 섬겼다고 하였으니 공은 능히 부모의 뜻을 받아 부양한 것이다. 진퇴(進退)에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사람이 혹 칭찬하면 스스로 잘한척 하지도 않으며 이어서 독실히 지키고 덕을 쌓은 것이 짝할만한 사람 드믈고 후손들이 번성하여 문학과 덕행으로 향리에서 이름났으니 어찌 공이 쌓은 음덕이 아니리요 아아 아름답도다. 공의 묘소에 묘갈(墓碣)이 없어 바야흐로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고 11세손 상각(相恪)이 문중 부형의 명으로써 나에게 묘비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나같이 글 못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당하리오만 삼가 대략 위와같이 짓고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가업(家業)을 이어 애연(靄然)히 아름다우니 은혜로 생각하는 마음 편안하도다. 국란(國亂)에 임하여 친명(親命)을 준수(遵守)하였으니 효성 또한 지극하도다. 공경하고 겸손한 덕은 창업(創業)하는 기본에 넉넉하였도다. 공의 무덤 요동(堯洞)의 언덕에 있고 내가 명(銘)으로 밝혔으니 와서 보는 자 더욱 자상히 알 것이로다.

단기 4282년 기축 9월 하순에
문소 김형칠이 삼가 짓고
성산 이창기가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