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군수공(휘 창)묘갈명

증이조판서공 휘 창 묘소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원흥리)

묘 표 석


十二世祖 贈吏曹判書公 諱 昶 墓碣銘
公姓沈氏諱昶字元亮號霞谷公之先慶尙道靑松府人也鼻祖諱洪孚仕 麗朝文林郞衛尉寺丞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德符號虛江三重大匡左侍中靑城郡忠義伯錄功靑城伯入 李朝特進左議政靑城府院君 贈諡定安生諱溫領議政靑川府院君 贈諡安孝誕生 昭憲王后生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 贈諡恭肅連三世台輔勳德在於 國乘生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純忠積德輔祚功臣生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於公爲高祖也曾祖諱逢源號曉窓同知敦寧府事贈左贊成祖諱鍵號警省軒承文院正字 贈領議政考諱昌壽號省菴軍器寺僉正 贈吏曹參判妣茂松尹氏 贈貞夫人典籍諱之瑞女也公生于萬曆戊寅五月居在序三自幼天資嚴重入孝出悌學書不怠伯父左議政文貞公諸姪中最爲鍾愛取公爲後쯼貞敬夫人光州盧氏僉正諱克愼之女公至于十六歲癸巳遭本生叅判公憂執喪如成人辛丑白沙李相國薦授四山監役以爲養奉之計公年二十四文貞公在大提學時也仍陞軍資主簿出爲堤川縣監闔境大治丁未喪配金氏解歸民衆願留戊申拜木川縣監庚戌轉移砥平縣監壬子爲文化縣令癸丑移拜振威縣令又移加平郡守治蹟如堤川時甲寅三月遭本生母夫人憂丁巳任楊根郡守壬戌五月遭文貞公喪幾至滅性水醬不入口者累日觀者危之 仁祖甲子正月李适叛亂起復爲高陽郡守募兵累千以屬延平李貴麾下以禦臨津東路适以灘口渡江貴因公馳馬入啓 上急遽南行因爲扈駕從事下公州適有溫陽賊警因守防禦治蹟蔚然嗚呼戊辰二月卒于郡衙享年五十一也訃聞于朝 上敎曰前日适亂沈某之起復行公實是奪人情禮豫甚缺然以孝特加超階 贈資憲吏曹判書之典奉窆于高陽郡木稀里先塋兆下壬坐之原盖公之孝友出於天性怡聲愉容極盡誠敬事生養庭父母養志之奉甘旨之供不以少懈與伯仲叔季務在和悅隨事規警起居常有度止進常有處前後居廬不脫絰帶昕夕祭奠未嘗替行人皆服其孝友居官也尊尙學宮培植士林痛禁巫覡抑豪撫弱愛民治吏闔境大治堤川楊根溫陽有去思碑累轉郡邑淸白自標不計私槖平生廉節一如寒士樣朝野嘆其篤志及卒世人惜之初配 贈貞夫人豊山金氏父察訪諱命賢祖奉事諱鎛曾祖副正諱順貞外祖僉正盧克愼光州人生于萬曆庚辰七月卒于丁未七月享年二十八後配 贈貞夫人南陽洪氏父進士瑮祖判官諱炳聲曾祖縣監諱濂外祖柳泰老文化人生于萬曆壬辰五月卒于壬子十月享年八十一也有三男三女長男諱儒訓以逸擧進善不就 贈戶曹判書次男諱儒行文科執義 贈左贊成次男諱儒業折衝副護軍女長適元振海縣監原州人次適柳廷益統制使文化人次適李志復全州人儒訓娶判書淸道金振先女生三男六女男長彬初娶晉州柳溥之女再娶慶州金重鉉女次男 登別武歷統制使捕將至刑曹判書不起初娶昌原孔氏纘之女再娶旌善李氏副司果聖諡女三男根娶晉州河氏濟允女女長適李時馝全州人次適元振澤文科正言原州人次適白昌門武通政水原人次適李萬林文科學諭全州人次適崔萬峙慶州人次適李廷彬永川人儒行娶郡守安東權紞女生一男一女梓文科歷吏曹判書止判中樞娶都事慶州李象乾女女適吳始泰工曹佐郞海州人儒業後無聞焉元振海柳廷益李志復後不能盡記也貞夫人兩位墓與乾位品字成墳而不肖孫 不避僣越敢擧公之狀猥撰以爲銘
銘曰
惟公稟性簡嚴淸貞早襲庭訓詩禮夙成白沙薦導早出仕路先監東堤闔境安堵适亂高陽募兵累千以禦臨津适己渡船馳馬入啓扈駕南遷因守溫昌以終天年訃聞于朝莫不涕泣 上悼震念特下焜典垂後雲仍赫赫綿綿竪碑刻銘木稀之阡
資憲大夫行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不肖孫    謹撰
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按海州牧使 曾孫 仲良 謹書

12세조 증이조판서공 휘 창(昶) 묘갈명
공의 성은 沈氏요 휘는 창(昶)이요 자는 원양(元亮)이요 호는 하곡(霞谷)이다. 공의 선대는 慶尙道靑松府의 사람이니 시조의 휘는 홍부(洪孚)인데 高麗朝에 벼슬하여 문림랑 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 되었다.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요 휘 용(龍)을 낳으니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문하시중 청화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을 추봉하였고 휘 덕부(德符)를 낳으니 호는 허강(虛江)이며 삼중대광 좌시중(三重大匡左侍中) 청성군 충의백(靑城郡忠義伯)인데 훈공(勳功)으로 청성백(靑城伯)을 녹봉하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특별히 좌의정 청성부원군(左議政靑城府院君)이 되었고 정안(定安)의 시호를 내리었으며 휘 온(溫)을 낳았으니 영의정(領議政)으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을 봉했으며 안효(安孝)의 시호를 내리고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탄생하였으며 휘 회(澮)를 낳으니 영의정(領議政)으로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이며 공숙(恭肅)의 시호를 내리었으니 3대를 연하여 태보(台輔:宰相)와 훈덕(勳德)이 나라 사기에 실려 있다. 휘 원(湲)을 낳으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으로 증직이 좌찬성(左贊成)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이요 휘 순문(順門)을 낳으니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증직이 영의정(領議政)이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봉원(逢源)이요 호는 효창(曉窓)이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증직이 좌찬성(左贊成)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건(鍵)이요 호는 경성헌(警省軒)이니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증직이 영의정(領議政)이요 선고의 휘는 창수(昌壽)요 호는 성암(省菴)이니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증직이 이조참판이요 어머니는 무송윤씨(茂松尹氏) 증정부인(贈貞夫人)이니 전적 휘 지서(之瑞)의 따님이다.
공이 만력 무인(萬曆戊寅:1578)년 5월에 출생했으니 차례가 셋째이다. 어릴 때부터 천품이 엄중하며 들어와서는 효하고 나가서는 공경하고 글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부 좌의정 문정공(左議政文貞公)께서 여러 조카중에서 가장 총애(寵愛)하여 공을 취택하여 아들을 삼았다. 어머니는 광주노씨 첨정(光州盧氏僉正) 휘 극신(克愼)의 따님이다. 공이 16세에 이르러 본생아버지 참판공(叅判公)의 상사를 당하여 집상함이 성인과 같았다. 辛丑(1601)년에 백사 이상국(白沙李相國)의 천거로 사산감역(四山監役)을 제수하여 봉친의 계획을 삼게 했으니 공의 나이 24세이며 문정공(文貞公)께서는 대제학(大提學)으로 계실 때이다. 이해 군자주부(軍資主簿)에 승진했다가 제천현감(堤川縣監)으로 나가매 온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 丁未(1607)에 부인 김씨(金氏)가 돌아가매 해직하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유임하기를 바랐다. 戊申(1608)년에 목천현감(木川縣監)을 배수하고 庚戌(1610)년에 지평현감(砥平縣監)으로 전직하였으며 壬子(1612)년에 문화현령(文化縣令)이 되었고 癸丑(1613)년에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옮기고 또 가평현령(加平縣令)으로 옮기매 치적이 제천(堤川)에 있을 때와 같았다. 甲寅(1614)년 3월에 본생모부인(本生母夫人)의 상사를 당하고 丁巳(1617)년에 양근군수(楊根郡守)가 되었다. 壬戌(1622)년 五월에 문정공(文貞公)의 상사를 당하여 거의 돌아갈 지경에 이르렀으며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은지가 여러날이 되매 보는 자가 위태롭게 여기었다. 仁祖甲子(1624)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매 기복(起復:상중에서 복을 벗고 나옴)하여 고양군수(高陽郡守)가 되매 군사 수천명을 모집하여 연평 이귀(延平李貴)의 휘하에 들어가 임진강(臨津江) 동쪽 길을 방어했는데 괄이 여울 입구로 강을 건넜다. 연평(延平)이 공에게 말을 달리고 들어가 게달하니 임금이 급거 남하하므로 인하여 호가(扈駕)의 종사관이 되어 공주(公州)로 내려가는데 마침 온양(溫陽)에서 도적을 만나 인하여 방어를 맡아 치적이 훌륭했다.
슬프다 戊辰(1628)년 2월에 군청관사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1歲이다. 부음이 조정에 들리매 임금이 교지를 내려 말씀하기를 전날 이괄(李适)의 난리에 심 아무를 기복(起復)시키어 공사(公事)를 이행케 한 것이 실상 남의 정례를 빼앗으므로 내가 심히도 결례하였다 하시고 효행으로써 특별이 계급을 올리어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를 증직했다. 고양군 목희리(高陽郡木稀里) 선영아래 임좌(壬坐)의 언덕에 안장했다. 대개 공의 효가 천성에서 우러났으므로 화평한 소리와 부드러운 용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생양정(生養庭)의 부모를 섬기되 뜻을 기르며 감지(甘旨)의 공양을 조금도 게을리 않고 백·중·숙·계(伯·仲·叔·季)와도 화열을 힘써서 일에 따라 규간하고 일깨웠으며 기거에도 항상 법도가 있고 그치고 나감에도 항상 일정한 곳이 있었다. 전후의 상사에 여막에서 거처하고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어 일찍이 대행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그 효우를 탄복했다. 관직에 있어서는 학교를 높이 숭상하여 士林에서 인재를 기용하고 무당을 통금하며 부호를 누르고 빈약을 구제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관리를 단속하여 온 고을이 크게 다스리니 제천(堤川)·양근(楊根)·온양(溫陽)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여러 번 郡邑에 전보되었으나 淸白으로 표본을 삼고 사탁(私槖)은 계교하지 않으므로 평생에 염치와 절조가 寒士의 양상과 같으니 朝野에서 그 돈독한 뜻을 감탄하며 돌아가서는 세상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었다. 초배(初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풍산김씨(豊山金氏)니 아버지는 찰방(察訪) 휘 명현(命賢)이요 할아버지는 奉事 휘 박(鎛)이요 증조는 부정(副正) 휘 순정(順貞)이요 외조는 첨정(僉正) 노극신(盧克愼)이니 光州사람이다. 만력경진(萬曆庚辰 1580)년 7월에 출생하여 丁未(1607)년에 돌아갔으니 향년이 28세이다. 후취 배위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니 아버지는 進士 율(瑮)이요 할아버지는 판관(判官) 휘 병성(炳聲)이요 증조는 현감(縣監) 휘 염(濂)이요 외조는 유태노(柳泰老)니 文化사람이다. 만력임진(萬曆壬辰 1592)년 五월에 출생하여 壬子(1672)년 10월에 하세 했으니 향년이 81세이다. 3男 3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유훈(儒訓)인데 유일(遺逸)로 진선(進善)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으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했다. 다음 아들은 유행(儒行)이니 문과로 집의(執義)인데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했다. 다음 아들은 유업(儒業)인데 절충부호군(折衝副護軍)이다. 장녀는 현감 원진해(縣監元振海)에게 시집갔으니 原州사람이요 다음은 통제사 유정익(統制使柳廷益)에게 시집갔으니 문화(文化)사람이요 다음은 이지복(李志復)에게 시집갔으니 전주사람이다. 유훈(儒訓)은 判書 청도 김진선(淸道金振先)의 딸에게 장가들어 3男 6女를 낳았으니 장남 빈(彬)은 진주 유부(晉州柳溥)의 딸에게 초취하고 경주 김중현(慶州金重鉉)의 딸에게 재취했다. 다음 아들 박(樸)은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여 통제사 포도대장(統制使捕盜大將)을 거치어 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초취는 창원공씨(昌原孔氏) 찬(纘)의 딸이요 후취는 정선이씨(旌善李氏) 부사과 성일(副司果聖鎰)의 딸이다. 셋째 아들은 근(根)이니 진주하씨 제윤(晉州河氏濟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전주 이시필(全州李時馝)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원주 원진택(原州元振澤)에게 시집갔으니 문과로 정언(正言)이요 다음은 수원 백창문(水原白昌門)에게 시집갔으니 무과로 통정(通政)이요 다음은 문과로 학유(學諭)를 지낸 전주이만림(全州李萬林)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영천 이정빈(永川李廷彬)에게 시집갔다. 유행(儒行)은 郡守 안동 권담(安東權紞)의 딸에게 장가들어 1男1女를 낳았으니 아들 재(梓)는 문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치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으며 도사(都事) 경주 이상건(慶州李象乾)의 딸에게 장가들고 딸은 해주 오시태(海州吳始泰)에게 시집갔으니 공조좌랑(工曹左郞)이다. 유업(儒業)은 후손이 없으며 원진택·유정익·이지복의 후손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정부인(貞夫人) 두 분의 묘소는 건위(乾位)와 품(品)자로 봉분이 되어 있다. 불초손(不肖孫) 박(樸)이 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공의 행장을 들어서 외람되이 명(銘)을 지으니
명에 이르기를.
오직 공의 성품은 간엄하고 청정(淸貞)하였네 일찍이 정훈을 답습하여 시와 예가 숙성하였네.
백사(白沙)가 천거하여 일찍 벼슬길에 나갔네 먼저 제천(堤川)을 맡으니 온 고을이 안정되었네.
고양(高陽)에서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매 군사 수천명을 모집하여 임진강을 방어하니 이괄이 이미 배를 건넜네 말을 달리어 임금께 주달하고 호가(扈駕)하여 남하하였네.
인해 온양(溫陽)을 지키다가 천수로 마치었네.
조정에 부음이 들리니 위에서 애도하여 특별히 성전(盛典)을 내리었네.
후손에게 복록이 드리워서 혁혁하고 면면하였네.
비를 세워 명(銘)을 새기니 목희(木稀)에 세천(世阡)이네.
자헌대부 행삼도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불초손 박 삼가 지음
통정대부 수 황해도 관찰사겸 병마수군 절도사 안찰사해주목사 증손 중량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