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감사공(휘 택)묘갈명 |
|
감사공 휘 택 묘소 묘 표 석 |
沈員外瑞肩狀其叔父監司公行治歷官事始終乞銘於漢陽趙絅仍致韓夫人之語曰執事辱與妾夫兄弟遊四十年于玆知妾夫平生無執事若者今妾不幸無幹蠱子姓妾夫之墳草己宿矣如不及今未亡人存樹一石于墓隧深恐妾夫志業湮沒不稱於世也敢假妾夫靈以累執事惟執事賜之銘是豈徒盖覆幼孫輩如化者有知必銜知己之感於冥 中矣不侫聽其辭未半不覺於邑涕下而謝曰絅固年迫髦而精銷三矣尋常尺牘酬酢廢不能况麗牲文字乎然何忍使吾友歿而無傳也唯夫人命按狀公諱澤字施甫其先靑松靑鳧縣人自麗入國初名公卿繼迹曾祖諱義儉儀賓經歷贈領議政祖諱嶐折衝將軍贈左承旨考諱大亨成晉士早卒聘贈參判淸州韓仲謙之生女公兄弟養於外家以長以敎二十六成晉士筆法傾一時甲子選授金吾郞非其好也俄調利仁督郵丁卯陞寢郞戊辰由司贍簿遷殿中明年宰井邑瓜幾熟投紱罷明年敍歷秋部郞冬登上第卽乙亥歲也丙子遷禮郞宰抉安居三載賦歸己卯由禮郞拜正言倫事有諍臣風明年荐入薇垣改版曺郞中猾吏歛手圜戶頌辛巳薦拜定州牧使潔以禦下惠以濟餓旁邑賴焉壬午長公按西以嬚遆入爲司成又出宰三陟丁亥歷軍器正楊州牧樂正弼善還掌令遷禮賓正戊子秋義州府尹缺備局以儒將薦首者上公也遂陞徘涖義秩滿擢拜全南觀察使居三年垢櫛痒爬人得湖山之外御史閔鼎重藉其實以聞且請兼摠府尹以副民望
上可之異數也甲午八拜水曺左弭又入銀臺至左副冬用三事薦陞嘉善拜平安監司盖公鍊於西事也丙申春有北使聲公發平壤至定州感霜露不常左右手轡止行不聽强驅期至灣上疾遂革道卒于郭山訃聞 上恫傷下敎政院曰平安監司沈澤急於國事不顧身疾驅馳客死中道予心慘然且念此人無子只有侄子一人方在謫所千里旅櫬無人護來益甚矜惻用敷體下之仁特釋其侄且令三道監司護送喪柩有司致賻奠比例有加於乎公之目不於此瞑而何待是年閏五月十三日葬于龍仁縣義谷山下坐亥之原從先兆也公爲人長身銕面大耳狀貌偉如也襮和裏確勤勵性也自擧子業時有人十己千之志及仕官爲史持是道不變公之爲義也不侫謫居白馬有邑子若而人從而問字仍言丙丁以后環一州折入命守牙吻所好生羽所惡生痏州氓朴思命者爲命守瓜翼把國長短以啗命守公不動聲色捕得思命立斷頭梟界上置遽聞諸朝自是州民始知有國法吏胥始知畏命吏不侫起而歎曰公之此擧奚亶風一州而止繄國勢是張伊始其他獄平貨孶息特餘事耳方面之任體統雖與州別發硎之刃何處不恢平安一道最公耆力效功地也塓賓舘正溝溝實府庫核尺籍敲鍊函矢無毫甲事不徑公區畵前乎公後乎公者果有如公盡心者乎其所上請五家一統法 上方是眞計下閣臣議以行之公亡遽爾奈何乎天公內行之修又有大過人者自以孤露爲終天痛人有語及公父母事則必法然流涕謁家廟亦然事其兄如事其嚴兄按北疾病公自三陟兼程候操藥焦然之邑北人尙今稱之事嫂畜侄敬而恩奉養外王母亦盡其道盛以爲李令伯無以加焉夫人淸州韓氏西原府院君文襄公繼美六代孫司果近之女柔喜淑明事君子順而有禮敎子女慈而能儉媵侍婢使無不自在生一女無男子子取族侄爲后名瑞奎聘承旨任孝達女無子而久沒瑞奎者曰胤元長公之子瑞肩之第二子壻前縣監金君錫生六男三女男長淰次濂公與夫人擧而養之若己出才有室相繼短折楊子所謂苗而不秀者哉餘幼女長適晋士李宣岳餘未笄厠室有一子娶妻而殀生男女各一銘曰 竭竭沈公東國韙人晩遇何傷名與身伸唯其欛柄赫然忠赤佩銅按節何非循國剪彼賊間其事尤偉如緩呼吸國存餘幾虺暢破膽終莫爲毒屹然長城千里妥帖奚養之違天敚之速聖衷斯恫哀榮備至我銘玄石維眛之眎 判中樞府事 趙 絅 撰 12세조 가선대부 평안감사공 휘 택(澤) 묘갈명 원외랑(員外郞)① 심서견(沈瑞肩)이 그 숙부 감사공의 일생동안 한 행의(行儀)②와 벼슬살이한 시종(始終)을 가지고 한양 조경(趙絅)에게 와서 명(銘)해 줄 것을 빌고 이어서 한씨 부인의 말을 전하였다. 『집사(執事)께서는 저의 남편과 40年을 형제처럼 지내온 것을 알고 있으니 제 남편의 평생을 잘 아는 사람은 집사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가 불행하게도 뒤를 이을 자식이 없고 또 제 남편의 무덤에는 풀이 이미 해묵었습니다. 만약 지금 未亡人이 살아서 돌 하나를 무덤 옆에 세워두지 아니한다면 제 남편이 힘써 행한 사업이 사라져 없어져서 세상에 남지 아니할 것입니다. 감히 제 남편의 영혼을 빌려 집사를 괴롭히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다만 집사께서 명을 써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한갓 어린 손자들만 감싸주는 일이겠습니까. 죽은 사람도 반드시 저승에서 知己③의 고마움을 통감(痛感)④할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반도 듣기 전에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감사하여 회답하였다. 『제 나이 70歲가 가까운데 정신도 삼분의 일이 소모되었습니다. 통상적인 편지나 이야기 같은 것도 하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비석에 새기는 문자이겠습니까. 그러나 차마 어찌 제 친구가 죽었는데 전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부인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상고해 보니 公의 이름은 택(澤)이요, 字는 시보(施甫)이다. 그 시조는 靑松 사람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도록 이름난 공경(公卿)이 뒤를 이었다. 증조부의 이름은 의검(義儉)인데 의빈부 경력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조부의 이름은 융(嶐)인데 절충장군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대형(大亨)인데 성균관 진사였으나 일찍 죽었다. 참판에 추증되고 청주 한중겸(韓重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의 형제가 외가에서 길러졌는데 키우고 가르쳐서 26歲에 성균관의 진사가 되었고 필법(筆法)이 당시를 지배했다. 甲子(1624)년에 선발되어 금오랑(金吾郞)⑤이 되었으나 그가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뒤 利仁의 독우(督郵)⑥가 되고 丁卯(1627)년에 참봉으로 승진했다. 戊辰(1628)년에 사섬시(司贍寺)에서 전중(殿中)으로 옮겼다. 이듬해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고 임기가 차려고 할 때 인수(印綬)를 던지고 사임했다. 이듬해 서용되어 형조좌랑이 되어 겨울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해는 乙亥(1635)년이다. 丙子(1636)년에 예조좌랑으로 옮기고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나가서 3年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己卯(1639)년에 예조좌랑에서 정언으로 옮기고 일을 논함에 참다운 간신(諫臣)⑦의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자리를 옮겨 사간원에 들어갔다가 호조정랑이 되었고 활리(滑吏)⑧들이 손을 못쓰게 하여 칭송을 받았다. 辛巳(1641)년에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가서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부하를 통솔했고 은혜를 베풀어서 기민(飢民)을 구제했다. 그래서 이웃 고을까지 그를 본받았다. 壬午(1642)년에 형님이 안서사(按西使)가 되자 형제가 같은 지방에 근무하는 것이 꺼림찍하다 하여 교체되어 조정으로 들어와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곧 삼척(三陟)부사로 나갔다. 丁亥(1647)년에 군기정을 거치고 이어서 양주(楊州)목사, 장악원정, 필선(弼善)을 지낸 뒤 다시 사헌부로 돌아와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리고 곧 예빈시정으로 옮겼다. 戊子(1648)년 가을에 의주(義州)부윤이 결원되자 비극(備局)⑨에서는 유장(儒將)⑩을 추천했는데 공이 첫째로 뽑혔다. 드디어 당상관에 승진하여 의주부윤이 된 뒤 만기가 되자 발탁되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3年을 지내는 동안 때묻은 곳은 벗기고 가려운 곳은 긁어서 사람들로부터 호남(湖南)의 외어사(外御史)⑪라는 칭송을 들었다. 민정중(閔鼎重)이 그 실상을 조사해서 보고하고 또한 총부윤(摠府尹)을 겸임시켜 도민들의 요구에 응해줄 것을 청했다. 임금께서 승낙을 했으니 특이한 명수(命數)⑫라 할 수 있다. 甲午(1654)년에 좌수사(左水使)를 거쳐 승정원에 들어와서 좌부승지가 되었다. 겨울에 세 가지 일을 잘 처리한 탓으로 가선계(嘉善階)⑬ 에 승진하여 평안감사로 나갔는데 이것은 공이 평안도 지방의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丙申(1656)년 봄에 북에서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문이 있자 공이 평양을 떠나 정주(定州)로 가다가 풍기(風氣)⑭에 감상(感傷)⑮에 드니 좌우에서 말고삐를 잡고가지 못하게 말렸으나 듣지 아니하고 억지로 달려 만상(灣上)⑯에 이르고자 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도중인 곽산(郭山)에서 일생을 마쳤다. 부음이 이르자 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시면서 정원(政院)⑰에 하교(下敎)하셨다. 『평안감사 심택이 국사에 급급한 나머지 몸의 병을 돌보지 아니하고 급히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객사(客死)⑱했으니 과인의 마음이 슬프구나. 그러나 또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아들이 없고 다만 조카 한 사람이 지금 적소(謫所)⑲에 있는데 천 리에서 운구(運柩)⑳하려고 해도 보호할 사람이 없으니 더욱 측은하구나.』 부조를 넉넉하게 하사하고 특별히 그 조카를 석방했으며 삼사에령을 내려 상구(喪柩)(21)를 호송하게 하고 유사를 시켜 부전(賻奠)(22)을 하게 하니 다른 예에 비하여 후한 것이었다. 아! 공의 영혼이 이 때에 눈감지 않는다면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이해 윤5月13日에 용인현(龍仁縣) 산의곡(山義谷) 아래 해좌의 언덕에 안장하니 선대의 묘소 밑이다. 공의 생김새는 키가 크고 얼굴이 검으며 귀가 크고 얼굴 모양이 잘 생겼다. 겉은 온화하고 속은 명확하며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것은 그의 성품이다. 과거공부를 할 때부터 다른 사람이 열을 알려고 하면 나는 그 百배인 千을 알고자 노력했고 벼슬을 해서 史官(23)이 되어서는 옳은 도리를 지켜서 변하지 아니한 것이 공의 의리이다. 나는 白馬邑에서 귀양살이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공에게 자식처럼 따라다니면서 글을 배우고 글자를 물었다고 한다. 병·정년(丙丁年)(24) 이후에는 고을 안을 돌아다니면서 命守(25)의 일을 방해하는 자를 잡아들였다. 그래서 관명을 잘 따르는 자를 도와주고 싫어하는 자는 매를 쳤다. 고을 백성 가운데 박사명(朴思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명수를 헐뜯고자 나라의 장단을 이러쿵저러쿵 험담하면서 명수를 씹었으나 공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사명을 잡아들여서 머리를 짜른 뒤 군계(郡界) 위에 효수(梟首)(26) 해 두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때부터 州民들이 처음 국법이 엄중함을 알았고 아전들도 처음으로 명령이 두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일어나서 칭찬하였다. 『공의 이번 조치가 어찌 한 고을에 법을 세우는 데 그치겠습니까. 이와 같이 국가의 형편이 어려울 때 다른 옥에서도 본을 받을 것이니 재물을 모으고 利息이 불어나게 하는 일은 특별히 그 밖의 일일 것입니다. 일방의 책임자가 되는 체통(體統)(27)이 다른 고을과 달라서 숫돌에서 막 갈아놓은 칼과 같다면 어느 곳이든 회복(恢復)(28)시키지 못하겠습니까. 평안(平安)의 한 도는 가장 공의 노련한 능력을 표시할 좋은 곳입니다.』 빈관(賓舘)(29)을 개수하고 토지경계를 바르게 하며 창고를 채우고 지적을 정비하여 군대를 훈련하고 병기를 수선하니 털끝 만한 작은 일이라도 공의 손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보다 앞에 와서 이 자리를 지킨 자나 공보다 뒤에 와서 이 자리를 지킬 자가 과연 공과 같이 마음을 다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가 상부에 요청한 오가일통법(五家一統法)(30)은 임금께서 이것이 좋은 계책이라 하여 각신(閣臣)(31)들에게 내려보내 상의해서 실행하도록 했는데 공이 갑자기 떠나갔으니 하늘인들 어찌하겠는가. 공이 안으로 마음을 닦은 일은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지나침이 있었으니 스스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찍 고아가 되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슬프게 한다.』 또한 공의 부모의 일에 말이 미치면 반드시 슬프게 눈물을 흘렸고 가묘(家廟)(32)를 배알(拜謁)(33)할 때도 또한 그러했다. 그 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처럼 하여 형이 북방의 안서사로 나가서 병이 들었을 때 공이 삼척(三陟)에서 길을 배로 걸어서 나아가 병을 진맥하고 약을 지어 바쳤다. 당시 초조하던 낯빛을 북쪽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칭찬하고 있다. 형수를 섬기고 조카를 양육하여 공경과 은혜를 다했고 외조모를 봉양하여 또한 그 도리를 다했다. 그 성대한 행의는 비록 이령백(李令伯)이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부인은 청주 한씨로 서원부원군 문양공(西原府院君文襄公) 계미(繼美)의 6대손이며 사과(司果) 근(近)의 딸이다. 부드럽고, 기쁘고, 깨끗하고, 맑은 성품으로 남편을 잘 섬겨서 온순하면서 예의 바르며 자녀를 사랑으로 가르쳐서 검소하게 하였으며 잉첩(媵妾)이나 시비(侍婢)들까지도 自在하게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딸 하나를 낳고 아들은 없다. 족질(族姪)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으니 이름은 서규(瑞奎)이다. 승지 임효달(任孝達)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이 오래 전에 죽었다. 서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윤원(胤元)으로 공의 형님의 아들 서견(瑞肩)의 둘째 아들이다. 사위는 전현감 김군석(金君錫)이다. 6男3女를 낳으니 맏아들은 념(淰)이요, 둘째 아들은 렴(濂)이다. 공과 부인이 데려다가 기르면서 己出같이 대했지만 겨우 장가가면 서로 이어가면서 요절(夭折)했다. 양자(楊子)가 말한 「움만 트고 자라지는 못한 것」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맏딸은 진사 이선악(李宣岳)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려서 시집가지 아니했다. 측실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장가들자 곧 죽었고 남녀 각 하나씩 있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충성과 효도를 다한 심공은 동국의 위인(韙人)이시다. 늦게 때를 만나서 명예와 건강을 다 펴지 못하였는가. 다만 그 칼자루를 잡아 빛나는 충절을 세웠고 안절(按節)의 동인(銅印)(34)을 차고 나라 안을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저 적의 무리를 소탕하였으니 그 일이 더욱 위대하구나. 목숨을 조금만 더 연장해 주었으면 나라 위해 더 많은 업적 남겼으리. 독사가 자라서 간담을 찢고자 했지만 끝내 독이 될 수는 없었다. 우뚝 솟은 長城에 천리를 이어가는 안전한 성첩 쌓았네. 어찌 안양의 도리를 어겨서 하늘이 이렇게도 빨리 빼앗아 갔는가. 임금님 슬퍼하시어 죽은 뒤 영화가 골고루 이르렀네. 내 묘비에 명을 하니 어두운 곳에서나마 보아주오. 판중추부사 조경(趙絅) 지음. 주(註) ① 원외랑(員外郞):낭관(郎官)의 후보. 후세에 와서는 낭중(郎中)의 아래, 주사의 윗 자리. ② 행의(行儀):한 일. 행동. ③ 지기(知己):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막역한 사이. ④ 통감(痛感):뼈가 아프도록 간절하게 느낌. 깊이 감동함. ⑤ 금오랑(金吾郞):임금의 호위대의 낭관, 즉 경호대의 분대장. ⑥ 독우(督郵):지방감찰관. 찰방의 아랫자리. ⑦ 간신(諫臣):임금의 잘못에 바른말로 폐지 또는 중지를 건의하는 사간원의 직원. ⑧ 활리(猾吏):교활한 아전. 관장을 우롱 또는 이용하여 자기의 야욕을 채우는 교활한 관리. ⑨ 비국(備局):비변사의 이칭. 나라에 일이 생기면 장관 이상으로 구성하는 일시적인 군의 통솔기관. ⑩ 유장(儒將):문관 출신으로 국방을 담당하는 군의 책임자. ⑪ 외어사(外御史):어사 아닌 어사. 지방 관장이 수탈을 일삼는데 비해 그 전습을 타파하고 어사와 같이 부정을 척결하는 데서 나온 말. ⑫ 명수(命數):운명의 수. 즉 운명. ⑬ 가선계(嘉善階):종2품인 문무관원의 품계. ⑭ 풍기(風氣):바람과 기운. 즉 기후, 또는 절기. ⑮ 감상(感傷):감기가 들어 몸이 상함. ⑯ 만상(灣上):포구. 항구도시. 여기서는 의주. ⑰ 정원(政院):승정원. ⑱ 객사(客死):객지에서 죽음. ⑲ 적소(謫所):배소(配所) 또는 부처지(付處地). 즉 귀양살이하는 곳. ⑳ 운구(運柩):널을 운반함. 즉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하는 일 (21)상구(喪柩):시신이 든 관. (22)부전(賻奠):부조와 제사지내는 데 필요한 전물. 즉 제물. (23)사관(史官):궁중의 명령을 출납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관리, 또는 역사 편수관. (24)병정년(丙丁年):병자호란이 일어난 해, 즉 병자 정축년. (25)명수(命守):왕명을 받고 고을을 지키는 관장. 목사, 부사, 군수 현령 등. (26)효수(梟首):중죄인의 머리를 잘라 남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둠. (27)체통(體統):위신. 행동의 표준을 지키는 일. (28)회복(恢復):원상복귀 시킴.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침. (29)빈관(賓舘):손님을 접대하는 곳. 영빈관. (30)오가일통법(五家一統法):다섯 집 단위로 한데 묶어서 마을의 경비, 생활의 협조 등을 맡게 함. (31)각신(閣臣):대각의 신하, 장관 이상의 신하. (32)가묘(家廟):개인 집의 사당. (33)배알(拜謁):찾아서 절하고 뵈옴. (34)동인(銅印):동으로 만든 인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