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군수공(휘 종민)묘지명

개천군수공 휘 종민 묘소
소재지: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수양리(석문동)

묘 표 석


沈公士訥蚤有名長安中憲少時聞其有氣槩踈財好義與人不苟合則無不傾倒輸瀉固已心嚮之逮壯歲登朝始與相見認爲三從中表弟呼我而呼先君爲叔自後相得甚驩有忘年之契歲戊午憲居戚公亦棄世宿草不哭永負幽明之爲恨也췺十四年庚午公之胤以家狀屬余曰先君壙銘尙闕將無以賁幽堂請子之圖之也憲誼不可辭謹按公諱宗敏士訥其字也考諱錦司憲府監察娶驪興閔氏郡守希說女驪川尉子芳孫也公生於 嘉靖甲寅十月己丑踰十歲連喪二親持制若成人參贊公愍而哀之命仲子鎬曰此兒孝可後汝進士公遂子之稍長器貌寬偉發言處事循循然法家規度參贊公親自提誨動引趙靜庵使爲表準公心竊慕之刮去紈袴習就惕庵金恭謹受小學家禮諸書又游閔杏村成牛溪門下二先生皆許與勉進公趨向旣定藝業益進中丙子司馬壬午丁本生後母喪喪畢兄弟從俗分異公自以身承所後家業讓不受分己丑除北部參奉不拜進士公疾革公日夜侍側不解帶者累月有古孝子所難行者進士公謂人曰此子能如此吾豈恨無兒乎及歿執喪一如家禮母金夫人憂其過毁常加調護賴以獲全金夫人進士公配而大司憲弘胤之女也婦道母儀稱爲女士進士公有側室子性盭難得意公與之同居推誠軆恤卒以善化宗黨咸歸美焉壬辰亂奉金夫人避兵山林倉卒身自背負數經困苦便口之味未嘗之絶轉入關西行在授造紙署別提檢察使崔滉引爲從事崔少貴倨少許可故事重臣幕佐非由文塗進者不輕辟知公饒局行中事無巨細悉委果稱職辦乙未丁金夫人憂戊戌授義禁府都事滿遷繕工監直長改禮賓寺直長隨 皇朝征倭提督李承訓往南方還提督亟稱其勞 宣祖命陞軍資監主簿轉司憲府監察出補漣川縣監招撫流散民多復業以疾解歸丙午赴井邑縣監濟瞷憚威明中以蜚語見遞庚戌赴山陰縣監抑豪强理寃獄治民奉公鑿鑿可觀甲寅用薦者擢拜戶曹佐郞乙卯出利川縣監剗革宿弊導壅閼民大蒙惠一切治理流聞觀察使狀其績 特陞通政階 賜書褒美丁巳拜川郡守明年辭病還京卒于家壽六十有五其年八月庚午葬廣州石門里艮坐新卜原夫人具氏祔夫人奉常寺正忭之女吏曹佐郞壽福之孫先公二年歿初夫人見舅姑里族婦女盛集進士公素號饒財咸意饋送必錦緞珍寶竟閱視惟女訓及家範一書也衆皆歎異之夫人終身遵奉無違則閨閫之內雍雍如也有二男三女男長曰 旌善郡守次曰 司僕寺僉正皆善居官女長適參議洪瑞翼次適別坐禹祗身次適司藝鄭元奭旌善娶西川府院君鄭崑壽女生五男一女曰之澤之湜之溥之淹之澳女適持平洪柱一僉正娶奉常寺正李慶祺女生一男曰之涵參議二男五女命耉承旨命夏侍直女適佐郞金繥掌令林堜生員朴之恒幼學尹緱韓汝斗別坐二男二女崇儉崇元女李斗鎭權大胤司藝一男援監役公資禀豪擧襟量恢友愛兄弟出於天性伯兄家貧無資公奉之如父時其溫淸而衣食之日夕團會怡怡相樂平生任率無外餙無經營先業之外不求裒益歷典五邑所到著廉聲喜遊江湖間自進士公時家蓄聲伎有亭號集勝槩爲西湖第一每佳辰風月命酒引朋以娛以燕樂而有儀爲時所艶豈古之所謂賢豪間人者耶子姓繩繩其必有未艾之福歟銘曰故壟而違新原而卽魂氣流行魄惟斯宅山川發祥禔乃似績百世之下有欲公徵 此玄石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館事 金尙憲 撰 

12세조 개천군수공 휘 종민(宗敏) 묘지명
심공(沈公) 사눌(士訥)은 일찍이 한양에 명성이 자자했다. 나는 어렸을 때, 그가 기개(氣槪)가 있고 재물을 멀리하며 의리를 좋아하여 사람과 더불어 구차하게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마치 물이 흐르듯 경도(傾倒)되지 않음이 없었으니, 진실로 마음은 이미 그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성한 나이가 되어 조정(朝廷)에 올라 처음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삼종(三從) 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나를 표제(表弟)①라 부르고 선군(先君)을 叔父라 불렀으니 이로부터 서로 만나면 몹시 기뻐하며 忘年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戊午年에 나는 상중(喪中)에 있었고 公 또한 세상을 버리셨다. 그러나 여막(廬幕) 생활을 하는지라 곡(哭)하지 못했기에 유명(幽明)을 영원히 저버린 것이 한스러웠다. 14년이 지난 庚午年에 公의 아들인 혁()과 집()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先君의 묘지명(墓誌銘)이 아직도 빠져 있으니 장차 묘소를 아름답게 꾸밀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그대가 도모해 주십시오.』라 하여 나는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公의 휘는 종민(宗敏)이요 사눌(士訥)은 그의 字이다. 부친의 휘는 금(錦)인데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셨고 여흥민씨(驪興閔氏)를 夫人으로 맞으셨는데 군수 희열(希說)의 따님이시자, 여천위(驪川尉) 자방(子芳)의 孫女이시다. 公은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0월 기축(己丑)에 태어나셨다. 열 살이 넘으면서 연이어 두 부모의 상(喪)을 당했는데 상제(喪制)를 지키는 것이 마치 成人과도 같았다. 참찬공(參贊公)이 근심하고 슬퍼하며 중자(仲子)인 호(鎬)에게 命하며 『이 아이는 효성스러우니 너의 후사(後嗣)가 될 만하다』라고 말하자 進士公이 마침내 그를 아들로 삼았다.
조금 장성하자 기국(器局)과 용모(容貌)가 크고 웅장했으며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함에 순종하며 가문의 법도를 본받았다. 참찬공(參贊公)이 친히 그를 데리고 가르치셨는데 걸핏하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인용하며 사법(師法)으로 삼게 했다. 公은 마음속으로 그를 사모하며 부유한 자제의 습속(習俗)을 말끔히 제거하고 척암(惕庵) 김공근(金恭謹)에게 나아가 『小學』과 『家禮』 등 여러 책을 배우셨다. 또 행촌(杏村) 민순(閔純)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門下에서 노닐었는데 두 선생께서 모두 허여(許與)하고 권면(勸勉)하셨다. 公은 나아갈 길이 이미 정해지자 문예(文藝)와 학업이 더욱 진보하여 丙子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壬午年에 本生 후모(後母)의 상(喪)을 당했는데 상(喪)을 마치자 형제가 세속(世俗)에 따라 재산을 따로따로 분배했다. 公은 스스로 후사(後嗣)가 된 집안의 가업(家業)을 계승한다고 생각하여 사양하며 자신의 몫을 받지 않으셨다.
기축년(己丑年)에 북부 참봉(北部參奉)에 제수(除授)되셨으나 숙배(肅拜)하지 않으셨다. 進士公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公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여러 달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으셨다. 비록 옛날의 효자가 있더라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進士公께서 다른 사람에게 『이 아들이 능히 이와 같거늘 내 어찌 자식이 없다고 한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돌아가시자 상례(喪禮)를 집행함이 모두 『가례(家例)』와 같이 하셨다. 母夫人께서는 그가 지나치게 몸을 해치는 것을 염려하셔서 항상 조호(調護)를 더해주셨는데 이로 인해 건강을 보존하실 수 있었다.
金夫人은 進士公의 配位 大司憲 홍윤(弘胤)의 따님이시다. 부도(婦道)와 모의(母儀)가 女士라고 일컬어지셨다. 進士公께서는 측실(側室) 所生의 아들이 있었는데 성격이 어그러져 뜻을 얻기 어려웠다. 公께서 그와 함께 거하시며 성심껏 대하고 몸소 돌보셔서 마침내 선량(善良)하게 교화되었으니 종친(宗親)의 모든 사람이 선(善)으로 귀의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金夫人을 모시고 숲으로 들어가 적병(賊兵)을 피하셨는데 창졸간(倉卒間)에 몸소 夫人을 등에 업으셨고 자주 곤란함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입에 맞는 음식이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관서(關西)에 있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자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除授)되셨는데 검찰사(檢察使) 최황(崔滉)이 그를 추천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최(崔)는 남을 존경하거나 허여(許與)해주는 것이 적었다. 예로부터 重臣의 막좌(幕佐)는 문도(文塗)를 말미암아 진출한 자가 아니면 경솔하게 불러들이지 않았으니, 公의 커다란 기국(器局)을 알았던 것이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간에 모든 일을 公에게 위임했는데 과연 직분에 맞게 일을 수행하셨다.
乙未年에 金夫人께서 돌아가셨고 무술년(戊戌年)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除授)되셨다. 임기를 마치고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으로 옮기셨다가 다시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으로 바뀌셨다. 황조(皇朝:)의 정왜제독(征倭提督)인 이승훈(李承訓)을 수행하여 南方을 巡行하다가 환조(還朝)했는데 제독(提督)이 그의 공로(功勞)를 극찬(極讚)하자 선조(宣祖)께서 특명을 내리시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로 승진시키셨다. 다시 사헌부 감찰로 전임(轉任)되셨다가 연천현감으로 부임하셨다. 流民들을 불러모아 안무(按撫)하자 많은 백성들이 본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병환으로 해직(解職)되어 돌아왔다.
丙午年에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자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위엄(威嚴)과 명철(明哲)함을 꺼려했고, 중간에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인해 체직(遞職)되셨다. 庚戌年에는 산음 현감으로 부임하여 토호(土豪)를 억누르고 원통한 옥사(獄事)를 잘 다스리셨다. 백성을 다스림에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조리(條理)에 맞게 진행되는 일이 볼만하였다.
甲寅年에 추천을 받아 戶曹佐郞에 배수되셨고 乙卯年에는 利川縣監으로 나가셔서 오래된 병폐(病弊)를 혁파하고 제거하셨으며 막힌 것을 인도하여 소통시키셨으니 백성들은 커다란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일체의 선정(善政)이 널리 유전(流轉)되니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치적(治績)을 장계(狀啓)에 담아 올렸다. 이에 특명으로 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오르셨고 글을 하사(下賜)하여 아름다움을 포장(襃奬)하셨다.
丁巳年에는 价川郡守에 배수(拜授)되셨고 이듬해 병환으로 사직하여 환경(還京)하신 후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은 65세이다. 같은 해 8월 庚午일에 廣州 石門里 간좌(艮坐)에 새로 만들어진 묘역에 장사지냈고 부인 具氏도 부장(쯊葬)되셨다.
夫人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구변(具忭)의 따님이요 이조 좌랑(吏曹佐郞) 수복(壽福)의 손녀인데 公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셨다. 처음 夫人이 시부모를 뵐 때 온 집안의 부녀자가 모두 모였는데 進士公이 평소 재물이 많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분명 비단과 진기한 보물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내 예물을 보니 오직 『여훈(女訓)』과 『가범(家範)』 한 책일 뿐이었다. 이에 좌중(座中)이 모두 감탄하며 기이하게 생각했다. 夫人께서 종신토록 이를 받들어 준행(遵行)하며 어김이 없었으니 규방(閨房) 안이 온화해졌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長子는 정선 군수(旌善郡守) 혁()이었고 次子는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집()이었다. 모두 직분을 잘 수행했다. 첫째 딸은 참의(參議) 홍서익(洪瑞翼)에게 시집갔고 둘째와 셋째는 각각 별좌(別坐) 우지신(禹祗身)과 사예(司藝) 정원석(鄭元奭)에게 시집갔다.
旌善郡守는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의 따님을 맞이하여 5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지택(之澤)·지식(之湜)·지부(之溥)·지엄(之淹)·지오(之澳)이고, 딸은 지평(持平) 홍주일(洪柱一)에게 시집갔다. 사복시 첨정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이경기(李慶棋)의 따님과 혼인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지함(之涵)이다.
참의(參議)는 2남 5녀를 낳았는데 명구(命耉)는 승지(承旨)이고 명하(命夏)는 시직(侍直)이다. 딸은 좌랑(佐郞) 김희(金繥)와 장령(掌令) 임연(林펋), 生員 박지항(朴之恒), 유학(幼學) 윤구(尹緱), 한여두(韓汝斗)에게 시집갔다. 별좌(別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숭검(崇儉)과 숭원(崇元)이고 딸은 이두진(李斗鎭)과 권대윤(權大胤)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예(司藝)는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감역(監役) 원(援)이다.
公은 타고난 바탕이 호걸(豪傑)스럽고 국량(局量)이 드넓었으며 형제와 友愛로웠으니 모두 천성(天性)에서 발현된 것이다. 백형(伯兄)의 집이 가난하여 재물이 없자 公께서 마치 아버지를 모시듯이 봉양했다. 때때로 온청(溫凊)②하고 의식(衣食)③을 바치는 날이면 저녁에 단란히 모여 기뻐하며 화락(和樂)했다.
평생토록 성품이 진솔(眞率)하셨기에 외면을 치장하지 않으셨고 재산을 경영하지 않으셨으며 先人의 사업을 제외하고는 이익을 모으려 하지 않으셨다. 다섯 고을을 두루 다스렸으니 이르는 곳마다 청렴(淸廉)한 명성이 자자했고 강호(江湖) 사이를 노니는 것을 좋아하셨다.
進士公 때부터 집안에 가무(歌舞)하는 여인들을 소유하였고 집승정(集勝亭)이라는 정자(亭子)를 소유하였는데, 승경(勝景)이 서호(西湖)의 으뜸이었다. 매양 아름다운 절기(節氣)를 만나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벗을 초대하여 즐기셨는데 즐거워하되 법도에 맞게 하셨으니 당시 사람이 염모(艶慕)하는 바가 어찌 옛날의 이른바 「현호한인(賢豪閒人)」이었겠는가! 자손이 끊임없이 번창하니 분명히 무궁한 복이 있을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 무덤과는 맞지 않아 새 무덤에 나아가시니
 혼은 하늘을 떠다니시고 몸은 이 곳에서 쉬시는구나
 산천이 상서로움을 발양하니 만복이 곧 쌓일 것이라
 백세(百世)가 흐른 뒤에 公을 징험하고 싶으면
 이 검은 비석(碑石)를 보시게나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김상헌 찬

주(註)
① 표제(表弟):고모, 외삼촌, 이모의 아들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이를 말함.
② 온청(溫凊):「동온하청(冬溫夏凊)」의 약칭(略稱)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불로 보온해주고 여름에는 부채와 자리로 서늘하게 해주며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③ 의식(衣食):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하여 양활(養活)하는 것을 말한다.